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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에와 리치몬트

by 링고

1. Carti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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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에의 시조인 루이-프랑소와 카르티에는 31살이었던 1847년 자신이 일하던 피카드의 보석공방을 물려받은 후 1859년에는 보석의 중심지 파리로 이전하게 된다. 1874년 창업자의 아들인 알프레드가 이를 이어받게 되고, 1898년 알프레드는 그의 큰 아들인 루이(1875-1942)를 파트너로 참여시키고, 1899년 파리의 루드라파로 이전하게 된다. 이어 카르티에 삼 형제 중 사업 감각이 가장 뛰어났던 루이의 동생인 피에르(1878-1964)가 런던(1902)과 뉴욕(1909)에 상점을 열면서 루이가 파리의 카르티에, 막내인 자크가 런던의 카르티에, 피에르가 미국의 카르티를 운영하면서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그러나 2차 대전 중인 1941년 막내인 자크(1884-1941)가 57살의 나이로 독일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죽고, 1942년에는 파리 본점을 잔느 투쌍에게 맡기고 미국으로 피신했던 루이도 뉴욕에서 67세를 일기로 사망한다. 피에르는 루이가 죽은 후 1942년 파리로 돌아와 파리 본점을 관리하다가 전쟁이 끝난 후 1947년에 은퇴하여 제네바 근교의 별장에서 말년을 보내게 된다. 피에르가 은퇴한 후 파리 본점은 피에르의 딸인 마리안이 운영하게 되고, 미국의 카르티에는 루이의 아들 자크가, 영국의 카르티에는 자크의 아들인 쟝-쟈크가 운영하게 된다.


카르티에에 대해서는 그 위상에 걸맞게 1984년에 출판된 한셀 나델호퍼의 'Cartier' 등 여러 권의 책들이 출판되었지만, 대부분 카르티에의 보석과 시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2019년 자크 카르티에의 아들인 장-자크 카르티에의 외손녀인 프란체스카 카르티에 브릭켈에 의해 카르티에 가문의 상세한 이야기가 출판되었다. 루이(1875-1942)와 보석 디자이너였던 잔느 투상(1887-1976)의 복잡 미묘한 관계, 카르티에가 세계적인 보석상으로 성장하는 과정, 4세들에게 넘어간 카르티에가 리치몬트의 벤돔 그룹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며 1974년 벤돔 그룹에 영국의 카르티에 마저 넘기게 된 장-자크 카르티에의 상실감 등 카르티에 성장과 몰락 과정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들이 상세히 서술되어 있다.


car39.jpg 파베르제의 에그


루이 카르티에가 손목시계에 앞서 탁상용 시계 제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1900년 파리에서 열린 박람회에서 당시 러시아 왕실 보석을 만들던 파베르제(Faberge)의 제품들을 보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파베르제의 에그는 러시아 왕실에서 부활절 계란 대신에 준 왕실스러운 보석 계란이 시작이었다. 이후 점점 발전하여 보석으로 장식된 계란 속에 '서프라이즈'가 들어 있던 역사상 가장 호사스러운 보석 장식품이었다. 이외에도 당시 파베르제에서는 일반 보석 장신구 외에도 보석과 에나멜 등이 조합된 고급스러운 장식품들을 많이 만들었다고 한다.


25살의 루이 카르티에는 1900년 파리 박람회에 출품된 파베르제의 계란을 포함하는 작품들을 보면서 보석 디자인 외에 파베르제 같은 고급 장식품에도 관심을 가지게 된다. 루이의 동생 피에르는 파베르제의 본거지인 페테스부르크에 카르티에의 분점을 열기 위해 러시아에 잠시 머무르게 된다.


car41.jpg 카르티에의 탁상용 클럭들


2020년 크리스티에서 카르티에 가문 시절에 만들어진 탁상용 클럭들이 경매되며 20세기 전반기에 카르티에에서 다양한 디자인의 클럭들이 판매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산토스와 탱크를 디자인한 것으로 유명한 루이 카르티에는 손목시계보다는 탁상용 클럭과 회중시계에서 더 많은 시계들을 디자인했다. 루이 카르티에가 살았던 시대는 손목시계가 막 등장하는 시기였기에 회중시계가 보편적인 시계였다. 루이 카르티에가 미스터리 클럭 등 탁상용의 클럭에 많은 디자인을 남긴 것은 젊은 시절 자신을 감탄시킨 파베르제의 에그 등 고가의 소형 장식품들에 대한 루이 카르티에의 관심을 대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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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카르티에는 산토스, 탱크, 베누아 등과 함께 다양한 디자인의 보석 시계들도 디자인했다. 동일한 디자인의 시계를 대량으로 제조하는 시계 전문 브랜드가 아니라 보석이 중심이 된 보석상이었으므로 루이가 중심이 된 파리, 피에르의 뉴욕과 막내인 자크가 운영하는 런던에서 제조된 시계들도 고객들의 요구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제조되었다. 그리고 1940년대까지 파리와 미국에서 시계 판매가 많았던 것에 비해 영국에서는 소량만 제조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런던의 카르티에를 이어받은 장-자크가 시계 디자인에 관심을 가지면서 1940년대 이후 런던의 시계 판매가 증가하게 된다. 그러나 보석 판매가 중심이었기 때문에 카르티에의 시계 판매 기록도 자세히 남아 있지 않지만 1960년대에도 1년에 총 3,000 개 정도로 소량만 판매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 야거 르 쿨트르(Jaeger LeCoultre)와의 인연


car17.jpg 에드몽 야거와 자크 르 쿨트르


한편, 산토스 듀몽을 위해 1904년 시계를 만들어주었던 루이 카르티에는 자신이 디자인한 시계들을 만들기 위해 1903년 파리에서 비행기와 자동차 계기판의 정밀 계측기를 제조하던 예거(Edmond Jaeger: 1858-1922)와 만나 자신이 디자인한 손목시계의 제조를 의뢰하게 된다.


예거는 루이가 원하는 슬림한 무브먼트를 설계하여 특허를 받고는 이를 생산하기 위해 자신이 설계한 무브먼트를 제조할 회사를 찾게 되고, 야거의 광고를 본 자크-데이비드 르쿨트르(1875-1948)가 1903년에 연락하여 야거와 르 쿨트르 및 카르티에와 르 쿨트르의 인연이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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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해서 야거가 르 쿨트르의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카르티에의 산토스가 만들어지게 되었다고 한다. 산토스 제조 후 1905년 루이와 야거는 '유로피언 와치 및 클럭 컴퍼니(European Watch & Clock Co.)'를 설립하게 되고, 르 쿨트르는 야거가 설계한 무브먼트를 제조하여 납품하게 된 것이다. 회사 이름에 시계와 클럭이 함께 들어간 것으로 보아 루이가 디자인한 탁상용 시계들의 제조에도 야거가 일정 부분 기여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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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거는 1918년경부터 건강이 나빠지면서 앙리 로다네(Henri Rodanet, 1884-1956)를 고용하여 로다네에게 야거 항공 S.A.의 기술감독을 맡기게 된다. 1922년 야거가 죽은 후에도 야거의 회사와 르 쿨트르의 관계는 유지되었다. 이 시기에 앙리 로다네의 설계로 르 쿨트르에서 생산한 무브먼트가 듀오 플랜과 101이라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무브먼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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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르 쿨트르가 야거 항공 S.A.의 시계 부문을 인수하여 현대와 같은 'Jaeger LeCoultre'가 만들어졌고, 그 이후 '야거 르 쿨트르'의 시계들이 등장하게 된다. 야거가 죽은 후에도 카르티에와 르 쿨트르의 인연은 1970년대까지도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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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카르티에는 1900년대 초 손목시계가 등장할 무렵 유행하던 아르데코(Art Deco)를 상징하는 가장 클래식한 시계인 산토스, 탱크 시리즈, 베누아(baignoire) 등을 디자인했다. 현대 시각에서 본다면 1917년에 디자인되어 1919년 이후 다양한 모델로 등장한 탱크는 시계 디자인뿐 아니라 다이얼 디자인도 당시에 등장한 아르데코 시계들 중 가장 매력적인 디자인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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탱크를 애용했던 앤디 워홀은 파텍 필립, 롤렉스 등 많은 시계를 수집한 시계 컬렉터이기도 했다. 앤디 워홀(1928-1987)이 Cartier Tank에 대해 했다는 말이 탱크의 매력을 가장 잘 설명한 말로 자주 인용된다.


"나는 탱크를 시간을 보려고 차는 게 아닙니다. 사실 시계 밥을 준 적도 없어요. 내가 탱크를 차는 건 차고 싶은 시계이기 때문이에요." (1973)


( “I don’t wear a Tank watch to tell the time. Actually, I never even wind it. I wear a Tank because it is the watch to wea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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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호크와 페랭이 머스트 카르티에를 출시하기 전에도 카르티에의 탱크는 정치인들과 배우들에게 인기 있는 시계였다.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탱크를 착용하고 있는 사진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다. 마케팅을 위해 섭외하기도 쉽지 않은 정치인, 기업인, 배우, 운동선수 등 유명인사들이 작고 얇은 탱크를 애용했다. 그 덕분에 이들을 따라다니는 기자들의 사진들을 통해 탱크는 마케팅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선전되는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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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에 크리스티 경매에 나온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1929-1994)의 탱크도 그중 하나이다. 재클린의 여동생 리 라지윌(1933-2019)의 남편인 스타니스와프 라지윌(1914-1976)가 팜비치에서 열린 50 마일 걷기에 참가하여 17시간이 걸려 성공한 것을 축하하는 그림을 선물하자 그에 대한 답례품으로 재키에게 준 것이라고 한다. Jackie가 재클린의 애칭이듯이, Stais는 스타니스와프의 애칭이다.


스타니스와프는 폴란드 왕자출신으로 그 시절에 흔했던 폴란드의 민주화 혁명으로 런던으로 망명하여 있던 시절에 초고속으로 이혼하고 런던에 머물던 재클린의 동생과 만났던 것이다. 따라서 시계의 케이스백에 적힌 내용은 재키가 라지윌에게 선물로 준 그림에 축하 문구로 적은 내용을 그대로 옮긴 것이다. 이 시계는 관심받는 것을 좋아하는 미국의 방송출연자인 '킴 카다시안'이 379,500 달러에 낙찰받아 트럼프를 만나러 백악관에 갈 때 착용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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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에의 빈티지 시계 중 현재까지 가장 높은 가격을 기록한 것은 손목시계가 아닌 탁상용 시계다. 2차 세계 대전중 인 1942년 11월 미군의 북아프리카 상륙을 축하하며 피에르 카르티에가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에게 1942년에 크리스마스 선물로 증정했던 시계이다. 2007년 소더비 경매에서 160만 달러에 낙찰되었다.


cart4.jpg 탱크 바스큘런트


탱크 모델들도 1917년에 프랑스 탱크를 바탕으로 디자인되어 1919년에 판매된 탱크 오리지널(Tank Normale), 루이 자신이 사용하기 위해 디자인했다는 탱크 루이(Tank LC), 1921년에 첫 발매된 탱크 신트레(곡선형 탱크), 1922년에 중국 디자인의 영향을 받아 발매된 탱크 시누아(Tank Chinoise), 1928년의 점핑 아워 시계인 탱크 기셋(Tank Guichets), 1932년에 발매된 바스큘란트 등이 루이가 직접 디자인한 탱크모델들이다.


카르티에 가문에서 운영하던 시절에 제조된 카르티에 탱크들은 르 쿨트르, 프레드릭 피게 등의 슬림하고 고급한 무브먼트가 사용되고 있다. 1932년 발표된 바스큘란트를 제조한 것도 1931년 Réne-Alfred Chauvot의 특허권을 인수하여 리버소를 제조했던 세자르 드 트레이(Cesar de Trey)가 창업한 Spécialités Horlogères S.A이며, 이 회사도 르 쿨트르와 통합되게 된다.


파리의 카르티에는 1903년에서 1942년까지 루이가, 루이가 죽은 후인 1942년부터 1947년까지는 피에르가 그 이후 1947년부터 1966년까지는 피에르의 딸인 마리온이 운영하다가 그 후 다른 사람의 손으로 넘어가게 된다. 1933년 파리 카르티에 보석 디자인의 책임자로 승진한 잔느 투쌍은 1970년까지 근무하다가 은퇴하게 된다.


한편 뉴욕의 카르티에는 1909년부터 1942년까지 피에르가 운영하다가 그가 파리로 돌아간 후 1942년에서 1962년까지 루이의 아들인 자크가 운영하다가 1962년에 매각된다. 3대에 걸쳐 성장시킨 가업이 4대째에 몰락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이다.


cart11.png Cartier의 베누아와 크래시


막내인 자크가 운영하던 런던의 카르티에가 가장 오래 유지되었다. 1919년부터 1941년까지 자크가, 그 이후에는 자크의 아들인 장-자크 1942년부터 1974년까지 운영하다 매각하게 된다. 장-자크는 1967년 고객이 자동차 사고를 당하여 망가진 베누아 시계를 보고 카르티에의 크래시를 디자인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미국의 카르티에가 매각된 1962년부터 카르티에의 정책은 일관성을 잃게 되며 카르티에를 인수한 투자자들이 투자금을 회수하기 위해 조잡한 시계들을 카르티에 브랜드로 판매하여 1962년부터 1970년대 초까지 10여 년간은 카르티에 삼 형제들이 운영하던 시기의 럭셔리한 이미지가 대부분 사라진 시기였다.



3. 카르티에 머스트 탱크


로버트 호크(Robert Hocq, 1917 -1979)는 2차 대전 때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일원이었고 나치에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했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도 받았으나 14세에 아버지가 죽은 후 어려운 가정환경 탓에 고등교육은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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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로버트 호크는 가솔린을 사용하는 얇은 라이터를 발명하고, 1959년에는 가솔린 대신에 부탄가스를 사용하는 라이터를 개발하여 실버매치(Silver Match)라는 라이터 제조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후 연간 백만 개 이상의 라이터를 판매할 정도로 성공을 거두었다.


로버트 호크는 자기가 만드는 라이터가 품질은 최고인데도 최고급 제품이 아니라는 것이 불만이었다. 로버트 호크는 1968년 골드 라이터를 만들어 당시 가장 고급 라이터였던 던힐과 S. T. 듀퐁을 넘어서는 고급 라이터를 출시할 생각이었다. 로버트 호크는 자신의 라이터를 고급 제품으로 판매하려면 실버매치의 브랜드로는 어렵다는 생각에서 반 클립 & 어펠스의 상표를 사용하려고 협상했으나 거절당한다. 얼마 후 호크는 카르티에를 찾아가게 된다.


로버트 호크가 찾아간 카르티에는 피에르의 딸인 마리온이 1966년 매각한 이후였으므로 카르티에 가문과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1968년 로버트 호크가 반 클립 & 어펠스를 먼저 찾아가게 된 것도 1947년 피에르가 은퇴한 이후 하향세를 겪고 있던 카르티에의 프레스티지가 1896년에 창업한 반 클립 & 어펠스에 비해 밀리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라이터에 대해 카르티에의 상표 사용권을 얻은 호크는 1968년에 브리케트 카르티에 S. A.라는 회사를 설립하고, 1년 후 파리의 비즈니스 스쿨을 졸업한 28살의 알렝-도미니크 페랭(1942~)이 입사하게 된다. 카르티에 라이터로 큰 성공을 거둔 호크와 매니저로 승진한 페랭은 Cartier의 상표가 가진 판매력을 확인하고는 카르티에의 이름으로 가방, 스카프, 펜, 향수, 선글라스는 물론 저렴한 카르티에의 시계를 만들어 판다면 큰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하게 된다. 이때 직원들과 회의를 하면서 한 직원이 'Cartier. It's must!'라고 한 말에서 착안하여 등장한 것이 'les must de Cartier'의 시작이었다고 한다.


로버트 호크는 친구이자 은행가인 조셉 카로우이(1937 -2000)를 통해 카르티에를 인수할 컨소시엄을 구성하여 1972년 파리, 뮌헨, 제네바, 홍콩에 상점을 가진 파리 카르티에를 인수하는 데 성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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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크는 파리 카르티에를 인수한 후 1973년 '머스트 카르티에'를 만들어 사장으로 취임한다. 이어 단기간에 카르티에의 판매 상품을 늘리기 위해 카르티에의 브랜드로 발매해도 될 수준의 제품을 만드는 회사를 골라 선글라스, 스카프, 향수, 가방과 피혁 제품 등 다양한 카르티에 제품들을 출시한다. 유럽과 미국에 가족이 운영하는 체인점을 가진 보석 상점이었던 카르티에가 피혁, 스카프, 향수 등 다양한 제품군을 거느리게 된 것이다. 머스트 카르티에의 제품들은 호크가 처음 시작한 라이터 이상으로 모두 대 성공을 거두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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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자, 호크는 뉴욕과 런던의 카르티에를 모두 인수하기로 결정하고 카노우이의 주도 하에 추가로 컨소시엄을 구성하게 된다. 이때 호크의 컨소시엄에 남아프리카 담배 재벌인 안톤 루퍼트(Anton Rupert, 1916~2006)의 담배 그룹인 로스만이 참여하게 된다. 안톤 루퍼트는 카르티에 미국 지사의 지분 20%에 투자하여 미국 시장에 카르티에 담배를 출시하게 된다. 이것이 리치몬트와 카르티에의 첫 인연이었다.


호크와 카노우이가 중심이 된 컨소시엄은 1974년 런던의 카르티에를 인수하고, 1976년에는 로부터 뉴욕 카르티에를 인수하여 '카르티에 몽드'가 설립된다. 파리에서 시작하여 런던과 뉴욕에 지점을 만들면서 독립적으로 운영되던 카르티에가 하나로 통합된 것이다.


호크와 페렝이 생각해 낸 가장 파격적인 'Must Cartier'는 '머스트 탱크'였다. 시계를 제외한 다른 제품들은 머스트 카르티에로부터 시작되었지만 시계는 카르티에 가문 시절부터 카르티에의 주요 제품들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탱크는 머스트 카르티에의 마지막 상품이자 가장 매력적인 상품으로 재등장하게 된다. 카르티에 가문 시절의 솔리드 골드나 보석으로 장식된 시계들을 대량으로 판매하기 어려웠으므로 가격을 낮추기 위해 도금 제품을 생각하게 된다.


1977년 스털링 실버에 금도금을 한 '베르메이' 혹은 '버메일(vermeil: gold coating)'이라는 명칭으로 '머스트 카르티에'의 시계를 처음으로 출시하게 된다. 금도금이라는 말이 보편적인 용어였으나 싼 티가 나는 용어라 프랑스어를 사용한 것이다.


이 무렵은 미국의 카르티에가 1962년에 매각된 후 카르티에 브랜드로 염가의 시계들이 등장하고 한편으로는 짝퉁들이 무수히 등장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카르티에 파리를 인수한 로버트 호크와 페랭의 입장에서는 소비자들이 원하는 저렴한 카르티에 시계들이 필요한 시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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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머스트 카르티에의 출시에는 블랑팡의 역사에서 언급된 프레드릭 피게와 에드먼드 캡트가 관련되어 있다. 프레드릭 피게에게 2 밀리 정도의 쿼츠 무브먼트를 만들어 보라고 제안한 에벨의 젊은 사장 피에르 에벨은 머스트 탱크를 기획했던 알렝-도미니크 페랭과 동년배로 페렝과 친한 사이였다. 페렝의 계획과 대량으로 필요한 얇은 쿼츠 무브먼트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피에르 에벨은 같은 지역에 위치한 프레드릭 피게를 찾아갔던 것이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쟈크 피게는 에드먼드 캡트를 영입하여 슬림한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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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1978년에는 산토스 골드-스테인리스 스틸의 콤비 모델이 처음 출시된다. 루이 카르티에가 1904년 산토스 듀몽에게 만들어 준 후 일반에게도 판매했다는 역사가 남아 있지만 1978년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1970년대는 로열 오크, 노틸러스 등 스틸 브라슬렛의 고급 스포츠 시계들이 유행하던 시절이었다. 버메일 시계와 달리 산토스는 'Cartier' 브랜드로 출시된 점이 다르다. 이런 이유로 카르티에의 제품 중 버메일 제품은 'Must Cartier'로, 스테인리스 제품은 Cartier로 분류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스테인리스 스틸 제품도 로버트 호크 시대의 유산인 것이다.


카르티에 형제들이 죽거나 은퇴한 1960년대 카르티에의 선전물들을 보면 현재의 카르티에를 대표하는 산토스, 탱크 같은 시계들을 찾아보기 어렵다. 도리어 '야거 르 쿨트르(Jaeger Le Coultre)'의 시계들을 납품받아 판매한 것으로 보이는 것이다. Cariter는 Tiffany와 같은 보석 상점으로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롤렉스 등과 더블 네임의 시계도 적지 않게 판매했었다. 탱크와 같은 자체 디자인 모델도 판매했었지만 스위스의 다른 브랜드에서 제조한 고급 시계들도 판매했던 것이다. 카르티에의 역사에 등장하는 매력적인 시계들을 발굴하여 이를 카르티에의 시계 컬렉션으로 만든 것은 카르티에 형제가 아닌 토마스 호크와 알렝의 작업이었던 것이다.


카르티에 파리를 인수한 호크는 1973년 크리스티 경매에 참여했다가 1923년 루이 카르티에가 만든 미스터리 클럭을 발견하고는 이를 낙찰받고, 회사의 직원이었던 에릭 누스바움(1940-2003)에게 중요 경매를 찾아다니며 역사적인 가치를 가진 카르티에의 제품들을 수집하도록 시킨다. 이 무렵 크리스티의 카르티에 전문가인 한스 나이델호퍼(1940-1988)가 3년간의 조사를 거쳐 Cartier에 대한 책이 처음 출간된 시기였다. 이 책을 바탕으로 누스바움은 1,500 점에 이르는 카르티에의 보석, 시계, 클럭들을 수집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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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누스바움은 1983년 카르티에 컬렉션의 총책임자로 근무하게 된다. 그가 수집한 카르티에의 제품들로 1989년 파리에서 'Art of Cartier'가 개최되며 시계, 클럭과 보석 제품들에 대한 첫 번째 전시회로 기억되고 있다. 1980년대에 시계가 럭셔리 사업의 일부로 발전하면서 프레스티지에 대한 근거를 확보하기 위한 마케팅의 일부로 브랜드의 역사가 중요해졌으며 시계 브랜드들에서 전시회를 열고 박물관을 만드는 일이 보편적이 되었다. 로버트 호크와 페랭은 이런 트렌드를 만드는 데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


피에르 카르티에가 죽기 전 연 3,000개 미만의 시계만 판매하며 파텍 필립 이상의 고가의 시계였던 카르티에를 대량 생산하여 판매하자, 카르티에의 고객이었던 부유층에서는


'사장이나 살 수 있었던 시계를 비서의 손목으로 옮겨버렸다.'라고 비난했다.


카르티에의 '이것만은 꼭 사야 해'라는 의미를 가지는 '머스트 탱크'는 디오르와 구찌에 이어 부호들이나 구입하던 고가의 제품들을 직장인들도 구입할 수 있는 가격대로 판매하여 럭셔리의 개념을 처음으로 도입했던 것이다. 디오르와 구찌가 유행을 상징하는 패션의 개념으로 등장했던 유명 브랜드의 시계는 머스트 카르티에를 통해 럭셔리의 개념으로 확장되게 된다. 20세기 말 '명품'의 시대를 연 것은 영국 왕실과 미국의 록펠러에게 보석과 시계를 팔았던 피에르 카르티에가 아니라 1970년대에 로버트 호크가 창안한 '머스트 카르티에'였다.



4. 리치몬트의 등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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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르티에를 인수하여 사업 확장을 확장하던 로버트 호크는 1979년 벤돔 광장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게 된다. 로버트 호크가 사망한 후 그의 부인이 사장이 되고, 그의 딸이 카르티에 보석 디자인의 책임자로 취임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카르티에 몽드를 운영한 것은 카르티에의 부사장이자 자금을 담당하던 카노우이와 로버트 호크와 함께 머스트 카르티에를 기획하며 1976년 머스트 카르티에의 사장으로 진급한 페랭이었다.


1974년과 1976년 로버트 호크가 영국과 미국의 카르티에를 인수할 때 미국 카르티에의 지분 20%를 투자한 것이 리치몬트와의 인연이었다. 안톤 루퍼트는 1988년 스위스에 리치몬트를 설립한 후 여러 번의 통합과 분할을 거쳐 담배 사업과 럭셔리 사업을 분리하게 된다. 그 결과 1993년 리치몬트 내의 럭셔리 사업을 통합하는 벤돔 그룹을 설립하면서 로버트 호크가 시작한 카르티에 몽드는 벤돔 그룹의 일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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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루퍼트는 남아프리카의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의과대학을 다니던 안톤 루퍼트는 학자금이 부족하자 화학 학위를 받아 졸업한 후 잠시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리고 드라이클리닝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그 무렵은 1929년 미국의 증시 폭락으로 시작된 세계적인 공황으로 모든 사업이 어렵던 시절이었다. 안톤 루퍼트는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서도 담배와 술의 판매는 줄어들지 않는 것을 보고는 주변의 투자를 받아 그의 집 창고에서 담배를 제조하여 판매하게 된다. 1939년 23살에 '부르브랜드 담배 회사'를 설립하게 된다. 이것이 담배 사업과의 인연이었다. 1941년에는 친구이자 반아파르트헤이트(anti-apartheid) 운동가인 친구의 도움을 받아 도산한 담배 회사를 인수하게 되고, 그 친구가 인도의 리테일러들을 소개해 주게 된다.


1953년에는 런던에서 '폴 몰'을 제조하는 로스만의 사장인 시드니 로스만을 만나 75만 달러의 인수 제안을 받게 된다. 당시 5만 달러밖에 없었던 루퍼트는 즉시 남아프리카로 돌아가 보험회사로부터 70만 달러를 빌려 계약 만료 10분 전에야 대금을 지급하고 인수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한편, 영국의 로스만을 인수한 후 1958년에는 영국의 또 다른 담배 기업인 카레라를 인수하게 된다. 1958년 알프레드 던힐이 사망하자 그의 부인인 메리 던힐이 사장이 되는데, 1965년 던힐의 지분 50%를 카레라에 매각하게 되고 던힐이 리치몬트 그룹에 인수되는 시초가 되었다. 이 처럼 파이프 담배와 라이터 제조가 중심이었던 던힐은 로버트 호크와는 무관하게 영국에서 담배 관련 사업을 확장하던 안톤 루퍼트의 로스만에서 인수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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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톤 루퍼트의 장남인 요한 피터 루퍼트(1950~)는 남아프리카 대학에서 경제학과 회사법을 공부하다가 사업에 투신하기 위해 대학을 중퇴하고 뉴욕으로 가서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서 2년, 라자르 페레레스에서 3년간 근무한 후 1979년 남아프리카로 돌아와 '랜드 상업 은행'을 설립하여 사장이 된다. 그리고 그 사이 해외 기업 인수 등으로 규모가 커진 그룹의 관리를 위해 1984년 아버지의 회사인 렘브란트 그룹에서 일하기 시작한다. 요한 루퍼트의 제안에 따라 1988년 스위스의 추크(Zug)에 리치몬트를 설립한 것이 리치몬트라는 이름의 시작이다. 요한은 1989년에는 렘브란트 그룹의 부회장으로 승진하고, 1991년에는 회장으로 승진하여 리치몬트의 사업을 이어받아 1993년 벤돔 그룹을 설립하게 된다.


던힐은 안톤 루퍼트가 회장이던 시절인 1977년에 몽블랑을 인수하고, 1985년에는 클레오, 1992년 라거펠트를 인수하며 리치몬트 럭셔리 사업의 한 축을 유지하다가, 1993년 요한 루퍼트의 지휘 하에 벤돔 그룹이 만들어지면서 카르티에 등과 럭셔리 사업으로 통합되었던 것이다.


1993년에 통합되는 벤돔 그룹은 로버트 호크가 인수한 카르티에와 이를 바탕으로 1988년에 인수한 피아제와 보메 마르시에, 그리고 루퍼트의 로스만 인터내셔널이 보유하던 던힐 그룹이 합쳐지면서 생겨나는 것이다. 럭셔리 기업들의 통합에 따라 로버트 호크의 가족과 카노우이가 30%의 지분을 보유하게 되었으나, 1998년 리치몬트가 남은 지분을 모두 인수하여 벤돔 그룹이 사라지고 리치몬트 그룹에 통합된다.


벤돔 그룹 시절이었던 1996년에는 불가리와 경쟁하여 바쉐론 콘스탄틴을 인수하게 되고, 1997년에는 이태리의 소규모 상점이었던 파네라이를 인수했다.


이 무렵부터 리치몬트는 담배사업의 비중을 줄이며 럭셔리 사업에 집중하게 된다. 1999년 반 클립 & 어펠스의 지분 60%를 인수하고, 2003년에 나머지 지분도 전부 인수하였다. 2002년 리치몬트는 추크(zug)에서 제네바로 헤드 오피스를 옮기게 되고, 독일 만네스만 그룹에 속해 있던 LMH(Les Manufactures Horlogeres'를 30억 스위스 프랑에 인수하게 된다. LMH는 랑에 운트 조네, 야거 르 쿨트르와 IWC로 구성된 시계 회사로 당시 귄터 블륌레인이 사장으로 있었다. LMH를 인수함으로써 리치몬트는 하이엔드 시계 그룹의 이미지가 강해지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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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에는 미네르바를 인수하여 몽블랑의 시계 제조 시설로 변경하고, 2007년에는 랄프 로렌과 50%씩 투자하여 랄프 로렌 시계 회사도 설립하고, 2008년에는 '로제 듀비(Roger Dubuis)'도 인수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카르티에의 인수에서 시작되었던 럭셔리 사업은 1996년 바쉐론 콘스탄틴, 1997년 파네라이, 2002년 LMH의 인수를 거쳐 리치몬트에서 시계 사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지면서 현재 스위스와 독일의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리치몬트 소속이 되었던 것이다.


2010년에는 인터넷 상거래 전문 업체인 Net-A-Porter 그룹을 인수하여, 향후 리치몬트 그룹의 제품들에 대한 인터넷 판매 정책을 추진 중이라고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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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스트 카르티에를 성공시킨 알랭 도미니크 페랭은 1976년 머스트 카르티에 사장으로 임명되고, 카르티에 몽드와 통합된 1981년부터는 카르티에 몽드의 사장으로 승진했다. 1998년 리치몬트가 벤돔 그룹을 완전히 인수한 후인 1999년부터는 리치몬트의 사장으로 승진하여 2003년에 은퇴하게 된다. 그의 별명이 'Mr. Cartier'이다. 1973년 머스트 카르티가 시작된 후 30년간 카르티에를 성장시킨 인물이다.


머스트 카르티에 사장 시절이던 1980년 페랭은 샤토 라그르젯(Chateau Lagrezette)을 인수했다. 2003년 리치몬트에서 퇴임한 페랭은 1984년 설립한 카르티에 예술 재단의 사장으로 근무하며 와인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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