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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 그룹의 등장

by 링고

1. 디오르와 LVMH


쿼츠 혁명이 절정에 이른 1982년 중동의 귀족 가문 출신으로 미국에서 공부한 후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서 중동을 담당하던 매니저였던 네미르 키르다르는 인베스트코라는 투자회사를 설립한다. 그리고 자금에 어려움을 겪던 티파니와 구찌 등을 인수하여 위기를 넘기고 뉴욕 증시에 상장시켜 투자금을 몇 배로 회수하는 헤지펀드를 시작하게 된다.


가족 기업이었던 귀금속과 패션 회사들이 LVMH, 리치몬트, 케링의 럭셔리 그룹으로 통합되는 과정이 1980년대와 1990년대에 본격적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이 과정에는 소규모 가족기업들을 증시에 상장시켜 투자금을 늘려 새로운 럭셔리 브랜드를 인수하며 럭셔리 그룹을 만드는 방법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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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조금 앞서 1968년과 1972년 디오르와 구찌를 통해 패션 시계가 등장하면서, 쿼츠 기술을 바탕으로 새로운 시계 트렌드가 생겨나게 된다. 이어 Dior를 인수한 아르노와 카르티에를 인수한 루퍼트에 의해 LVMH와 리치몬트가 등장하게 된다. 먼저 패션 시계의 유행을 가져온 디오르와 구찌에 대해 알아본 후 LVMH와 리치몬트의 등장 과정을 추적해 보도록 하자.


쿼츠 혁명의 초창기였던 1970년대 모바도 그룹의 회장이었던 그린버그의 성공담과 쿼츠 혁명의 시발점이 되었던 어큐트론으로 시계 시장을 석권했던 블로바의 성공과 몰락에 대해 이야기했다.


1968년 블로바가 어큐트론으로 전성기를 달리던 시절로 잠시 돌아가 보자. 시계 시장에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었던 것이다. 1969년 세이코의 아스트론이 등장하기 전의 이야기이다. 1968년 블로바는 디오르 컬렉션이라는 명칭으로 블로바와 디오르의 더블 네임 시계를 출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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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패션 브랜드에서 시계는 액세서리의 하나이다. 패션 브랜드의 중심인 의류 가격에 따라 고가의 시계부터 파슬(Fossil), 타이멕스(Timex), 시티즌(Citizen)에서 OEM으로 생산하는 홍콩이나 중국제 쿼츠 시계까지 다양한 시계들이 팔리고 있다.


루이 카르티에가 탁상시계를 시작으로 다양한 시계를 디자인하여 판매하면서 아르 데코 시대에 산토스, 탱크, 베누아 같은 매력적인 손목시계들을 디자인했었다. 그 덕분에 1977년 머스트 카르티에의 버메일 탱크가 베스트셀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루이 카르티에 외에 다른 보석 디자이너들은 그 후 시계의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그래서 그린버그가 인수했던 콩코드 처럼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자체 브랜드 영업보다는 유명 보석 브랜드에 자신들이 디자인한 시계들을 납품하는 OEM 전문의 시계 업체들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이 처럼 디오르 이전에도 보석 브랜드들이 귀금속 제품과 함께 시계도 판매했었지만 디오르는 조금 다른 의미로 시계사에 등장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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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바에서 제조한 Dior 컬렉션을 판매한 지 3년 후인 1971년 디오르는 블로바에 50가지의 디자인을 보내며 자신들의 디자인대로 시계를 제조해줄 것을 요구하게 된다. 비대칭적인 디자인으로 고가의 귀금속 제품 외에도 금도금에 빨강, 노랑, 초록 등 기존의 시계에서는 사용한 적이 없던 원색의 밴드를 사용한 시계들이었다.


블로바에서 1970년까지 3년간 만든 초창기의 Diro 시계가 블로바가 제조하는 시계들 중에서 고른 것이라면 1971년에 등장하는 디오르 시계들은 기존의 시계들과는 전혀 다른 디오르만의 디자인 시계로 변화하게 된다. 그리고 디오르의 시계들은 그 무렵부터 가격도 절반 이하로 저렴해진다. 디오르의 시계란 Dior 부띠끄에서 판매하는 액세서리였으므로 시계를 자신들의 패션에 맞추기 시작한 것이다.


시계가 패션의 일부가 된 것이다. 보석 브랜드의 시계 처럼 고가로 구입하여 평생을 사용하는 시계가 아니라 패션 의류처럼 유행이 지나면 버리는 시계였다. 그런 시계를 보석이나 귀금속으로 만드는 것은 넌센스이므로 스텐레스며 도금 시계들이 등장하며 보석 시계들보다 저렴해 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디오르의 시계들은 패션 시계의 시초로 여겨지고 있다. 파텍 필립의 선전문구인 자손에게 물려주어 세대를 넘어 착용하는 시계가 아니라 패션과 함께 변화하는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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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바는 디오르 컬렉션 출시를 위해 Dior의 디자이너들과 만나 상담하던 상황을 첫 번째 Dior 컬렉션을 출시하며 광고 문구에 담았다. 당시 블로바는 어큐트론의 성공으로 세계에서 가장 정확한 시계를 만드는 곳이었다. 패션 브랜드인 Dior에서 어떤 수준의 시계들을 고르게 될 지 몰라 어큐트론과 기계식 시계 등 다양한 컬렉션을 가지고 갔다. 쿼츠 혁명 이전의 시계 가격이란 시계의 재질과 정확성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는 제품이었다. 시계에 대해서는 문외한인 디자이너들에게 무브먼트와 재질의 종류에 따라 가격을 설명하면 어느 하나의 제품군을 선택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Dior 디자이너들은 블로바에서 가져간 시계들의 디자인만 보고 여러 제품군에 속하는 시계들을 고르는 것이었다. 특히 시계의 가격을 결정하는 정확성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는 것 같았다. 블로바 영업담당자의 눈에는 Dior 디자이너들에게


'시간은 아무 의미도 없는 것'


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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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계식 시계에 비해 작고 얇게 그리고 저렴하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쿼츠 시대의 개막은 액세서리 정도의 시계를 원하는 패션 브랜드들의 시계 개발과 판매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패션 브랜드의 로고가 시계의 디자인이자 컨셉이 되는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루이뷔통과 구찌의 로고가 루이뷔통과 구찌 가방의 가장 중요한 디자인 요소인 것과 같은 것이다.


디오르가 시작한 로고 시계는 시계에서 디오르보다 오랜 역사를 가진 에르메스와 불가리의 로고 시계가 등장하는 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또한, 디오르를 시작으로 1970년대부터 다양한 가격대의 패션 시계들이 등장하게 된다. 그린버그의 모바도 그룹이 코치(coach), 휴고 보스(Hugo Boss), 라코스테(Lacoste), 타미 힐피거(Tommy Hilfiger) 같은 패션 브랜드의 라이선스 제품을 판매하게 된 것도 1968년 블로바-디오르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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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최대의 럭셔리 그룹이자 와블로, 태그 호이어, 제니스를 보유 중이며 2021년 티파니를 인수한 LVMH의 역사는 1984년 프랑스의 젊은 기업가인 베르나르 아르노(1949-)가 브삭 세인트 프레레를 인수하면서 시작된다. 1971년 22살의 아르노는 프랑스의 명문대학인 '에콜 폴리테크닉'을 졸업하고 아버지가 운영하던 건설회사인 페레-사비네트에서 일하게 된다. 그리고 3년 후 아버지를 설득하여 건설 부분을 매각해 버리고 부동산 투자에 집중하게 되며, 1978년에는 사장으로 취임한다. 그리고 6년 후인 1984년 아르노는 프랑스 정부와 은행들을 중심으로 진행된 브삭 세인트 프레레라는 직물과 패션을 중심으로 성장해온 대기업의 매각에 참여하여 1 프랑의 상징적인 금액으로 인수하게 된다.


브삭 세인트 프레레는 1947년 크리스찬 디오르의 창업을 도우면서 크리스찬 디오르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 아르노는 브삭을 인수한 후 디오르와 르 봉 마르쉐 호텔을 제외한 다른 자산들을 모두 정리하고 9,000명의 직원을 해고하여 '터미네이터'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아르노의 회고에 따르면 미국에 출장 갔을 때 택시운전사와 대화를 하던 중 프랑스의 대통령 이름은 몰라도 Dior는 알고 있었다는 것을 알고는 Dior의 인수를 시작으로 명품 브랜드 중심의 사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아르노는 그 후 지방시 등 향수를 중심으로 회사들을 인수하던 루이뷔통, 코냑과 술을 중심으로 회사들을 인수하던 모에 헤네시와 투자그룹을 만들어 1987년 LVMH 그룹을 설립한다. LVMH라는 그룹명이 만들어진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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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아르노의 지분은 루이뷔통과 모에 헤네시에 비해 매우 적었다. 그러나 그룹의 주도권을 쥐려는 루이뷔통과 모에 헤네시 사이에 갈등이 생기자 아르노는 영국의 맥주회사 기네스의 투자를 받아 이들의 지분을 인수하여 LVMH 그룹의 회장이 되며 '캐시미어를 입은 늑대'라는 별명도 얻게 된다.


LVMH 그룹의 회장으로 취임한 후 아르노는 M&A를 통해 80개에 이르는 세계적인 패션 브랜드들을 차례로 인수하게 된다. 그러나 첫 번째 인수 브랜드였던 Dior에 대한 애착으로 Dior는 LVMH 그룹에 통합하지 않고 가족기업인 아르노와 함께 독립된 회사로 보유 중이다. 1990년대 구찌를 인수하려다 실패한 일과 2010년대 에르메스를 인수하려다 실패한 일 등 아르노의 M&A의 성공과 실패에 관련된 이야기들도 흥미롭다. 패션 분야의 일등 브랜드들을 전부 인수하여 세계 최대의 럭셔리 그룹을 만들려는 아르노의 노력은 계속 진행 중이다.


1999년 LVMH 그룹은 시계 업체들을 대거 인수하게 된다. 중동의 TAG 그룹으로부터 'TAG Heuer', 바레인의 인베스트코로부터 'Ebel'과 'Chaumet'를 인수하고, 스위스의 딕시로부터 'Zenith'를 인수한다. 그러나 Ebel은 2004년 모바도 그룹에 재판매하게 된다. LVMH가 인베스트코로부터 에벨과 쇼메를 인수할 때 인베스트코는 '브레게'와 '누벨 레마니아'도 보유하고 있었다. 1991년 블랑팡을 인수한 후 파텍 필립급의 브랜드를 원하던 스와치가 브레게와 누벨 레마니아를 인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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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에는 이태리의 보석 브랜드 불가리를 인수한다. 불가리는 보석 브랜드 중 시계를 오랜 기간 제조해 온 브랜드로 리치몬트의 카르티에와 비슷한 시기인 1920년대부터 시계를 제조했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여성용 보석 시계만 제조해 왔다. 그러나 얇은 시계 전쟁이 벌어지던 1977년에는 제랄드 젠타가 디자인한 'BVLGARI BVLAGARI'로 남성용 시계에도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비버가 블랑팡의 창업을 준비하던 1982년에는 뇌샤텔에 'Bvlgari Time S. A.'라는 시계 제조 회사도 설립한다. 불가리는 쿼츠 시대에 본격적으로 시계 사업을 시작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브랜드이다.


gucc8.jpg 불가리 옥토 피니시모


뇌샤텔에 시계 제조 회사를 설립하고도 성장에 한계를 느끼던 불가리는 2000년 소규모 공방 수준이지만 컴플리케이션을 만들던 제랄드 젠타와 다이엘 로스를 인수하여 컴플리케이션 제조에 나서게 되었다. 불가리의 인수로 LVMH 그룹에는 불가리 외에 1980년대에 다양한 컴플리케이션 모델들을 발표하던 제랄드 젠타와 다니엘 로스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2014년에는 비버가 사장으로 취임하여 성공가도를 달리던 'Hublot'를 인수하여 스와치 그룹, 리치몬트 그룹과 함께 중요한 시계 그룹의 하나가 되었다. 비버는 와블로를 인수한 LVMH에서 시계부문 사장으로 근무하며 태그 호이어와 제니스를 한 단계 성장시키는 데 기여를 하게 된다.


종합하자면, LVMH 그룹의 시계 브랜드는 슈퍼 하이엔드인 와블로, 다니엘 로스, 제랄드 젠타, 불가리를 필두로, 고급 시계 브랜드로 태그 호이어, 제니스, Dior가 있으며, 이어 Fendi, Fred 등 LVMH 그룹에 소속된 수십 개의 패션 브랜드를 통해 보급형의 시계들을 판매하는 대형 시계 그룹이다.


2021년에는 창업 150 주년을 맞이한 티파니를 인수하며 '티파니-노틸러스'를 발표하게 되었던 것이다. 2019년 아마존의 베이조스를 누르고 세계 최고의 갑부 자리에 오르기도 했던 아르노는 80대까지도 LVMH의 회장직을 유지할 것이라고 한다.



2. 구찌와 케닝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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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리들리 스콧 감독이 연출하고 레이디 가가, 아담 드라이버, 알 파치노가 출연한 '하우스 오브 구찌'가 영화로 만들어졌다. 영화 중 알 파치노가 연기한 알도 구찌(Aldo Gucci)는 유태인 출신의 타고난 사업가 스베린 분더만(Severin Wunderman)과 만나며 디오르가 시작한 패션 시계를 베스트셀러로 만들며 패션 시계의 역사에서 하나의 이정표를 만들게 된다.


Gucci는 1921년에 구찌오 구찌(Guccio Gucci)가 이태리 투스카니의 플로렌스에서 수입한 여행 가방을 팔면서 시작되어 그 지역의 가죽 장인들을 고용하여 자신의 제품을 만들게 되었다고 한다. 2차 세계 대전중 물자가 부족해지자 캔버스로 만든 가방을 판매하면서 초록색과 붉은색의 밴드에 구찌오 구찌를 상징하는 2개의 G로 구성되는 구찌의 로고가 표시되어 유명해진다.


bub12.jpg 구찌 가문


영화로 만들어진 구찌 가문의 비극은 구찌오 구찌의 사업을 3명의 아들인 알도, 바스코, 로돌포가 물려받아 미국에 진출하면서 시작된다. 미국 뉴욕의 5번가로 진출하여 성공을 거두던 알도의 아들들이 별도의 구찌 상점을 열고 구찌의 이름을 이용한 새로운 브랜드를 출시하면서 가족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는 것이다. 1983년 로돌포가 죽자 그의 아들인 마우리지오가 삼촌인 알도와 소송을 벌여 구찌의 경영권을 빼앗게 되고 1986년 알도는 탈세혐의로 1년간 감옥에 가게 된다. 이런 와중에도 구찌는 계속해서 성장하지만 이 시기에 저렴한 구찌 제품들이 마구잡이로 출시되면서 구찌의 프레스티지도 희미해지게 된다.


1988년 마우리지오 구찌(1948-1995)는 자신이 가진 구찌의 지분 중 47%를 바레인의 투자그룹인 인베스트코에 매각하게 된다. 마우리지오는 영화에서 처럼 1995년 밀라노의 사무실 1층 로비에서 이혼한 전처 파트리지아 레지아니(Patrizia Reggiani, 1948~)가 사주한 킬러에 의해 사살되게 된다. 이 사건으로 1998년 29년형을 언도받았던 레지아니는 18년간 복역한 후 2016년에 출소했다고 한다.


guc8.png Gucci 2000


구찌 시계는 1972년에 출시된 '구찌 2000'이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로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패션 시계의 역사에서 가장 큰 족적을 남기게 된다. 패션 시계는 Dior에서 시작되었지만 구찌에 의해 전통 시계 브랜드들을 위협할 정도로 성장하게 되고, 그 후 패션 브랜드들이 브랜드 시계를 출시하는 유행을 가져오게 된 것이다. 1972년에 출시된 구찌 2000은 2년간 100만 개나 판매되면서 단일 모델로 가장 많이 판매된 시계로 기네스북에 올라가게 되었다. 쿼츠 혁명과 함께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들이 몰락해 가던 시절에 구찌 시계는 최고의 황금기를 보내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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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찌 2000은 알도 구찌(1905-1990)로부터 25년간 구찌의 상표로 시계를 독점 생산하는 계약을 맺은 세베린 분더만이 기획하여 판매한 것이다. 세베린 분더만은 시계 업계에서 기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구찌로 성공을 거두며 백만장자가 되었던 분더만은 여러 매체와 인터뷰를 했지만 알도 구찌로부터 구찌의 독점 사용권을 얻었던 일에 대해서는 인터뷰 때마다 다르게 설명하여 정확한 내막은 알려져 있지 않다. 알도 구찌는 이와 관련하여 인터뷰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알도 구찌의 혼외 딸인 패트리시아 구찌가 2016년에 발표한 알도 구찌에 대한 회고록의 내용과 분더만의 인터뷰 내용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960년대 말 스위스의 소규모 브랜드이자 콩코드처럼 판매자 상표로 시계를 제조하던 알렉시스 바르셀레이(Alexis Barthelay)의 미국 직원이었던 세베린 분더만(1938-2008)은 구찌를 방문하여 시계를 납품하는 일로 상담을 하려고 했다. 매장에 책임자가 부재중이어서 책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 서 있던 곳이 매장의 전화기 옆이었다. 전화가 울려도 아무도 전화를 받으려고 하지 않자 분더만은 자신도 모르게 전화기를 들게 된다. 전화를 건 사람이 바로 알도 구찌였다. 알도는 전화를 받은 사람이 직원이라고 생각하여 이태리 남부의 사투리로 이야기를 했다. 벨기에에서 태어나 5개 국어에 능했던 분더만은 자신도 모르게 알도의 사투리를 따라 응답을 하게 되었다. '너 누구야?' 자신의 직원 중 이태리 남부 사투리를 쓰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의아해진 알도가 눈치를 채자 분더만은 자신이 찾아온 목적과 전화를 받게 된 사정을 말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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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도는 이 특이한 세일즈맨에게 흥미를 느껴 시간을 정하여 자기가 있을 때 찾아오라며 다시 만날 약속을 하게 된다. 알도를 만나러 구찌의 사무실로 찾아온 분더만은 낡은 옷과 구두를 신은 곤궁한 모습이었다. 알도는 분더만의 사업 제안을 듣고는 즉석 해서 일 년 판매분으로 25만 달러 상당의 시계를 주문하게 된다. 예상 밖으로 엄청난 물량을 계약한 분더만은 베일러에 연락하여 알도와 맺은 계약에 대해 설명하게 된다. 소규모 회사였던 베일러는 25만 달러의 물량은 고사하고 1년에 그 10%도 생산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분더만의 사업적 재능이 발휘되는 것이다.


분더만은 알도를 다시 찾아와 회사의 사정을 설명하며 기회를 준다면 자신이 회사를 설립하여 25만 달러의 계약을 이행하고 싶다고 말하게 된다. 알도는 분더만과 함께 저녁을 먹고 술을 마시며 분더만으로부터 그의 성장과정에 대해 이야기를 들으며 당돌한 청년이었던 분더만에게 호감을 갖게 된다. 분더만이 회사를 차릴 자금도 없다는 것을 눈치챈 알도는 분더만에게 먼저 자신에게서 사업을 하는 방법부터 배울 것을 충고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분더만은 알도 밑에서 일을 배우며 알도로부터 사업자금까지 빌려서 시계 사업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패트리샤 구찌에 따르면 이후 분더만은 알도가 마우리지오와 법적 분쟁을 겪는 과정에도 알도를 찾아와 조언을 할 정도로 평생 동안 알도와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72년 향후 25년간 독점적으로 구찌의 시계를 제조하기로 계약하고 스위스에 시계 제조 회사까지 차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처음 발매한 구찌 2000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분더만은 단 기간에 백만장자가 되었고, 구찌로서는 분더만의 성공으로 시계가 핵심 사업의 하나로 성장하게 된 것이다.


한편, 죽기 2년 전인 1993년 계속해서 자금 압박을 받던 마우리지오는 50%의 지분을 추가로 인베스트코에 매각하여 구찌 가문은 창업 후 67년 만에 퇴장하게 되는 것이다. 1989년 마우리지오에 의해 부사장이자 선임 디자이너로 영입된 돈 멜로(Dawn Mello)는 방만하게 운영되던 구찌의 재건 작업을 시작하여 1,000개나 되던 상점을 180개로, 22,000개나 되던 판매상품을 7,000개로 축소하게 된다. 인베스트코에 인수된 1994년에는 1980년대 내내 구찌 가문의 변호사였던 도메니코 드 솔(Domenico De Solle)이 사장으로 취임하고, 톰 포드가 선임 디자이너로 참여하게 된다. 이들의 노력으로 구찌가 다시금 이익을 내게 되자 구찌는 뉴욕 증시에 상장하게 되고, 인베스트코는 1995년에서 1997년까지 주식을 처분하여 19억 달러를 벌게 된다.


구찌가 뉴욕 증시에 상장되자 LVMH 그룹은 구찌의 주식을 은연중 확보하여 구찌 그룹 인수를 계획하게 된다. 1999년 LVMH에서 모은 주식은 38%에 도달하게 된다. 이를 알게 된 구찌의 사장 도메니코 드 솔과 칩 디자이너 톰 포드는 프랑스 PPR(Pinault Printemps Redoute)를 찾아가게 되고, 나중에 케링(Kerring) 그룹으로 이름을 바꾸게 되는 PPR이 대규모로 주식을 구입하고 증자를 통해 LVMH의 지분을 12%로 낮추면서 LVMH 그룹의 구찌 인수 계획은 물거품이 되고 구찌 그룹은 케링그룹의 핵심 브랜드가 된다.


corum1.jpg Corum의 Bubble X-Ray


한편, 알도 구찌와 1972년에서 1997년까지 25년간 독점 시계 판매권을 계약했던 분더만은 1994년 구찌의 경영권이 인베스트코로 넘어가면서 계약 연장 문제로 구찌와 분쟁을 겪게 된다. 결국 1997년 구찌 그룹이 1억 5천만 달러에 분더만의 회사인 '세베린 몬트르'를 인수하면서 구찌의 시계 제조도 구찌 그룹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분더만은 2000년 이 자금으로 모바도의 그린버그가 미국 내 판매권을 가진 '코룸'을 인수하여 새로운 시계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2000년 바젤 페어에서 처음 선을 보인 시계가 분더만 시대의 코룸을 대표하는 버블 시계였다. 돔 형태의 두꺼운 크리스털을 특징으로 하는 시계이다. 장 콕토의 작품들과 함께 해골과 관련된 미술작품들을 수집하던 기괴한 취미를 가진 분더만을 기념하여 2022년에 버블 X-레이가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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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베린 분더만의 이런 기괴한 취미는 세계 2차 대전과 나치가 가져온 그의 불운한 인생사와 관련이 있다. 1938년에 벨기에의 브러셀에서 태어난 분더만은 어린 시절 전쟁을 겪게 되었다. 나치가 벨기에를 침공했던 것이다. 유태인이었던 분더만 부모는 3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분더만을 친척 아이들과 함께 가톨릭 교회의 신부에게 맡기게 된다. 가톨릭 교회에서 지내던 분더만은 교회가 운영하는 맹인 학교에서 학업을 시작하게 된다. 맹인 학교에서 유일하게 앞을 볼 수 있었던 분더만은 나치가 학교로 들어왔을 때 맹인 학생들의 손을 잡고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다고 한다.


bub6.jpg Corum Bubble 시계


이렇게 하여 나치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은 분더만은 10살의 나이에 어머니를 잃고 미국으로 이주하여 친척의 손에서 자라게 된다. 친척집에서의 생활이 편하지 만은 않았는지 로스앤젤레스에서 고등학교를 16살에 중퇴한 분더만은 돈벌이에 뛰어들게 된다. 영악했던 분더만은 당시 신문배달을 하는 아이들을 관리하고, 저녁에는 주차장을 관리하는 일로 돈을 버는 한편 사창가에서 손님들을 안내하는 일을 하며 팁을 받아 적지 않은 돈을 모으게 된다.


분더만의 첫 사업은 그렇게 모은 돈으로 골드 체인을 만드는 기계를 구입하여 보석상에 골드 체인을 납품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20대에 시작한 첫 사업이 실패하면서 바르셀레이의 세일즈맨이 되어 알도 구찌와 만나 34살에 구찌 시계로 성공신화를 쓰게 되었던 것이다. 나치의 침공과 홀로코스트로 어린 시절 겪은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인지 분더만은 기괴한 메멘토 모리 문화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며. 코룸을 인수한 후 버블 시계를 발표하면서 해골을 손목시계 다이얼의 테마로 사용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2014년 케닝그룹은 율리스 나르당과 지라드 페레고를 인수하여 스와치, 리치몬트, LVMH와 함께 하이엔드 브랜드를 보유한 시계 그룹으로 등장하였으나, 2022년 이들을 매각하며 시계 사업에서는 철수한 것으로 보인다.



3. 인베스트코


in2.png 영국 수상 대처와 네미르 키르다르


네미르 키르다르(1936-2020)와 그가 창업한 인베스트코(Investcorp, 1982~)는 티파니, 구찌, 쇼메 등의 인수와 매각에 중간적인 역할을 한 중동 자본이다. 1970년대 오일파동으로 가장 이득을 본 사람들은 중동의 귀족들과 부유한 가문들이었다. 이들의 자본으로 미국가 유럽의 럭셔리 브랜드들을 인수하여 위기를 넘긴 후 주식시장에 상장하거나 재매각하여 단기간에 수십 배의 이득을 남기는 사업을 구상한 것이 네미르 키르다르이다.


네미르 키르다르(Nemir Kirdar)는 군부 쿠데타로 1958년에 폐위되는 이라크의 마지막 국왕 파이살 2세와 관련되어 있다. 키르다르 가문은 오랫동안 이라크 국왕의 정부에서 고위 관리로 근무해 왔던 것이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자 22살의 키르다르는 미국으로 피신하여 공부를 계속하다가 1960년대 초 잠시 안정을 찾은 것으로 보이던 이라크로 돌아가 가문의 재산을 되찾아 사업을 시작한다. 그러나 이라크의 쿠데타는 사담 후세인이 정권을 잡게 되는 1979년까지 반복되었다. 카르디르는 1960년대 말 가족들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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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포드햄 대학에서 공부하여 MBA를 얻은 키르다르는 체이스 맨해튼 은행에서 근무하게 된다. 1973년의 오일쇼크는 아랍지역의 귀족과 부호들과 오랜 인맥을 가지고 있던 키르다르에게 새로운 기회가 되었다. 채이스 맨해튼의 중동지역 영업 책임을 맡게 되며 엄청난 부를 누리던 중동지역의 억만장자들과 인연을 맺게 된다.


1982년 바레인의 억만장자 아흐메드 알리 카누와 사우디 석유상인 야마니 등을 포함하는 투자그룹의 지원을 받아 자금에 어려움을 겪는 미국과 유럽의 회사들에 투자하는 인베스트코를 설립하게 되었다. 인베스트코 투자의 장점은 인수한 회사의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고 기존의 경영진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부족한 투자금을 대신 투자하여 회사를 안정시켜 재매각하거나 회사를 성장시켜 증시에 상장시켜 투자금을 회수하는 방식이었다.


인수 후 상장을 통해 큰 이익을 남긴 것이 1984년의 티파니와 1987년에서 1993년까지 진행된 구찌의 인수였다. 그리고 인수 후 회사를 안정시킨 후 재매각하여 이익을 남긴 경우가 쇼메, 브레게, 누벨 레마니아의 인수 같은 경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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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인베스트코는 파산한 쇼메를 인수하면서 쇼메가 운영하던 브레게를 함께 인수하게 되고, 1992년 누벨 레마니아를 인수하여 브레게의 무브먼트를 제조하는 공장으로 만들게 된다. 1994년에는 에벨을 인수하고, 1999년 쇼메와 에벨은 LVMH에, 브레게와 누벨 레마니아는 스와치 그룹에 매각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업 인수 후 자금은 투자하면서도 경영에는 관여하지 않는다는 원칙이 쇼메 시대에 재등장한 브레게와 누벨 레마니아와의 결합을 통해 현재와 같은 브레게가 등장하는 데에는 인베스트코의 역할이 중요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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