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에드먼트 캡트 : 스위스 하이엔드 부활에 숨겨져 있던 인물
에드먼드 캡트(1946- )는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많이 팔린 크로노그래프인 밸쥬 7750의 설계자이자, 20년 이상 블랑팡과 브레게의 무브먼트 개발을 총지휘한 인물이다. 또한 무브먼트 설계에 컴퓨터를 도입한 첫 기술자였다. 캡트 이후 파텍 필립을 비롯하여 무브먼트 설계는 컴퓨터를 이용하여 이루어지게 되며 이를 시작으로 스위스 무브먼트 설계자들의 세대교체도 이루어지게 된다.
발레 드 쥬의 르 브라서스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파리의 디자인스쿨에 진학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러나 집안 형편이 어려워 화가가 되는 꿈을 포기하고 1962년에 르 센티에르의 시계학교에 진학하게 된다. 재학 중 탁월한 실력으로 선생님들을 사로잡아 졸업반에는 무브먼트 설계를 전공한다. 20살에 시계학교를 졸업하고는 제네바에 있는 공과대학에 진학했다. 그리고 쿼츠 혁명이 일어나던 1969년에 졸업과 동시에 비엔의 롤렉스에 취업하게 된다. 그러나 1년 후인 1970년 그는 고향인 발레 드 쥬의 크로노그래프 전문 회사인 밸쥬로 옮긴다.
이때부터 평생에 걸쳐 무브먼트를 설계하는 일에 전념하게 되었다. 공과대학에서 설계에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을 배웠던 것이 이후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주었다. 그가 맡은 첫 번째 설계가 역사상 가장 많이 팔린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인 밸쥬 7750이다. 당시 밸쥬는 오랜 기간 수동 크로노그래프만 만들어온 회사였다. 1969년 제니스의 엘프리메로, 호이어의 칼리버 11이 개발되어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인기를 끌던 시절이었다. 크로노그래프 전문 회사인 밸쥬는 쿼츠 시계를 앞두고 제조비용이 저렴한 캠 형식의 수동 크로노그래프 밸쥬 7730을 바탕으로 자동 무브먼트를 만드는 과제를 24살의 캡트에게 주었다.
첫해에 캡트는 혼자서 이 일을 담당하고 있었고, 여가시간에 자신이 졸업한 르 센티에르의 시계학교에서 무브먼트 설계를 강의했다. 그 과정에서 친하게 된 가장 우수한 학생이었던 제랄드 간데르(Gerald Gander)를 설득하여 영입하고 도면사와 시계 조립 기술자를 영입하여 5명의 팀을 만들게 된다. 이 5명은 모두 20대여서 친구처럼 지내며 일을 했다고 한다.
캡트는 짧은 시간에 임무를 완성하려면 기존의 도면에 의존하는 방식으로는 곤란하다고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당시는 소형 컴퓨터가 개발되기 전이라 컴퓨터를 이용하려면 뇌샤텔에 있는 헤드오피스까지 가야 했다. 장거리를 오가며 캡트는 컴퓨터를 통해 설계하고 시뮬레이션을 하는 방식으로 설계를 완료하여 업무를 3년 만인 1973년 밸쥬 7750이 판매에 들어가게 된다.
발매 첫해부터 성공을 거두어 밸쥬 7750은 연 10만 개를 생산할 정도였다. 그러나 2년 후 수요가 점점 사라져 경영진은 이제 더 이상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의 시대는 끝난 것으로 생각하고 생산을 중단하고 관련 자료와 생산설비를 폐기하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당시 밸쥬의 기술자들은 경영진의 결정을 거부하고 필요한 공구 및 설비를 잘 포장하여 보관하게 된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제니스의 엘프리메로의 재생산에도 등장하게 된다.
캡트는 1972년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쿼츠 혁명을 지켜보며 밸쥬에서 8년을 보내게 된다. 이 시기의 에드먼트 캡트에 대한 이야기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그 후 캡트의 행적을 보면 1975년 밸쥬 7750의 생산이 중단된 후 밸쥬가 소속된 에보슈 S.A.(ETA)에서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일에 종사한 것으로 보인다. 쿼츠 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1970년대 중반에서 1980년대 초 모든 기계식 스톱워치나 크로노그래프를 판매하는 것은 불가능해 보여 생산이 중단되었고 스위스에서도 쿼츠 무브먼트를 본격적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캡트는 에보슈 S.A.에서 쿼츠 무브먼트의 개발에 참여하면서 쿼츠 무브먼트의 핵심적인 구성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그런 경험을 통해 발레 드 쥬의 프레드릭 피게로 옮겨 쿼츠 무브먼트 개발을 담당하게 되는 것이다.
1978년 캡트는 ETA에 통합되지 않고 7001 등 스위스의 에보슈 중 가장 슬림한 무브먼트를 제조하며 버티던 에보슈 전문 업체 푸조(Peseux)로부터 쿼츠 무브먼트 설계의 책임자가 되어달라는 제안을 받게 된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오랜 역사를 가진 프레드릭 피게의 사장이자 쿼츠 무브먼트 개발이 필요했던 프레드릭 피게의 사장인 자크 피게도 기술 책임자 자리를 제안하게 된다. 고향인 발레 드 쥬에서 일을 해도 된다는 피게의 제안이 캡트에게는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에보슈 S.A. 소속의 밸쥬에서의 8년간의 경험이 캡트로 하여금 대기업의 조직에서 일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도 갖게 만든 것으로 보인다. 발레 드 쥬 출신들은 큰 조직에 묶여 사는 도시의 생활보다는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사는 것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고 한다. 캡트가 대기업인 롤렉스와 밸쥬를 떠나 프레드릭 피게로 옮기게 된 것도 그런 이유가 컸다.
프레드릭 피게는 이 무렵 르 쿨트르(Le Coultre)와 함께 고급시계 브랜드들이 선호하는 슬림한 무브먼트를 만드는 대표적인 고급 무브먼트 전문 업체였다. 작은 공방에서 출발하여 슬림 무브먼트 전문 기업으로 성장한 프레드릭 피게는 같은 지역의 르 쿨트르에 비하면 중소기업이었다. 하지만 파텍 필립에 컴플리케이션을 납품할 정도로 발레 드 쥬 지역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회사였다. 1859년 이 회사를 창업한 인물이 컴플리케이션 전문가 루이 엘리제 피게였고, 이를 이어받은 사람이 슬림 무브먼트 제조 전문가 프레드릭 피게이고 자크 피게는 이를 물려받은 3대째의 사장이었다.
당시 프레드릭 피게의 주요 생산품은 슬림한 무브먼트로 1925년에 개발한 수동 무브먼트 FP 21(두께 1.75 밀리)와 1970년에 개발한 자동 무브먼트 FP 71(두께 2.4 밀리)였다. 수동과 자동에서 슬림 무브먼트의 기준이 되는 두께가 바로 프레드릭 피게 무브먼트의 두께이다. 수동 2 밀리, 자동 2.5 밀리는 프레드릭 피게의 무브먼트를 구입할 것이냐 자체 개발할 것이냐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었다. 적어도 수동 무브먼트에 관한 한 파택 필립과 롤렉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전자를 선택했다.
자크 피게는 1925년 이후 수십 년 동안 독보 적었던 얇은 수동 무브먼트를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피아제, 까르티에, 롤렉스, 에벨 등 스위스 대부분의 하이엔드 브랜드들에 납품하고 있었다. 그런데 1970년대 초까지 연 15,000개나 팔리던 무브먼트가 1978년에는 연 5,000개로 줄어들어 경영이 어려운 상태였다. 당시 프레드릭 피게에 근무했던 직원이 200 명 이상이었다고 한다.
같은 지역의 시계 브랜드이자 피게 무브먼트를 사용하던 에벨의 3대째 사장이었던 피에르 블럼과 협의한 끝에 자크 피게는 쿼츠 시대에 살아남기 위해 작고 슬림한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려고 결정한 상태였다. 이 프로젝트는 카르티에와 수십만 개의 쿼츠 무브먼트 공급 계약을 맺은 에벨이 시작했지만 오데마 피게도 투자를 하게 된다. 피게가 주문받은 것은 피게의 명성에 걸맞은 두께 2 밀리 수준의 슬림한 쿼츠 무브먼트였다.
이런 과정을 거쳐 에드먼트 캡트는 1979년부터 에벨, 카르티에, 오데마 피게 등이 사용한 두께 2.1 밀리의 슬림한 쿼츠 무브먼트들을 설계했다. 그 후 1985년에는 트윈 모터를 사용하며 쿼츠와 기계식을 혼용하여 1/0초까지 측정 가능한 최초의 메카쿼츠(하이브리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인 FP 1270(두께 4.75밀리)를 설계하게 된다. 피게의 주문에 따라 캡트는 무브먼트의 성능을 높이는 대신 슬림한 무브먼트 설계에 집중하게 된다. 캡트가 밸쥬에서 설계한 밸쥬 7750의 두께는 7.9 밀리였다. 캡트는 이런 과정을 거쳐 기계식 무브먼트와 쿼츠 무브먼트를 모두 설계할 능력을 갖춘 당시로서는 거의 유일한 인물이 된다.
무브먼트 개발에서 중요시되는 2가지가 정확성과 크기인데, 크기 중 직경보다 중요한 것이 두께이다. 쿼츠 혁명기 동안 기계식 무브먼트가 쿼츠 기술에게 밀리게 되었던 것은 정확성(오차)과 함께 얇은 무브먼트를 만드는 기술이었다. 쿼츠 혁명의 절정기에 얇은 시계 전쟁이 일어난 이유이다. 여기에 기계식 무브먼트의 조립과 조정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고 숙련된 기술자를 필요로 하지만 쿼츠는 공장에서 자동 조립이 가능하다는 것이 쿼츠의 엄청난 장점이었다. 이런 조건들을 모두 감안하면 기계식 시계가 쿼츠 시계들과 정확성과 두께는 물론 제조 원가에서 애초 경쟁이 불가능하다고 당시 대부분의 시계 관련 종사자들이 인정한 것도 납득이 가는 일이다.
프레드릭 피게에서 캡트가 최초로 개발한 쿼츠 크로노그래프는 오메가, 카르티에, 브라이틀링 등 수많은 브랜드들이 사용할 정도로 프레드릭 피게의 주요 수입원이 된다. 쿼츠 무브먼트와 기계식 무브먼트 양쪽 기술에 능했던 캡트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후 블랑팡의 이야기에서 등장하겠지만 블랑팡은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하지 않았지만 프레드릭 피게는 쿼츠 혁명기와 그 이후에도 이때 캡트와 함께 개발한 쿼츠 무브먼트들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롤렉스 등도 쿼츠 시대의 절정기였던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자동 무브먼트 대신 쿼츠를 사용하거나 쿼츠에 특화된 얇은 귀금속 모델들을 개발하여 쿼츠 혁명기를 보내야 했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 제조를 완전히 포기하지는 않았다. 기계식 시계가 부활한 후 기계식 무브먼트 생산을 완전히 중단하고 쿼츠 무브먼트 개발에 집중한 브랜드와 쿼츠를 외주로 생산하면서도 기계식 무브먼트를 지속적으로 생산해 온 브랜드로 갈리게 되었다. 그리고 이 선택이 1990년대 이후 컬렉터들의 놀이터였던 타임존 등 인터넷 사이트들에서 벌어진 인하우스 무브먼트 논쟁에 따라 2000년대 이후 브랜드의 프레스티지가 결정되었던 것이다. 이 점이 쿼츠 혁명 이전에 롤렉스와 대등하거나 앞서갔던 오메가가 롤렉스에 밀리는 브랜드로 자리매김하게 된 이유이다.
한편 1973년에 첫 발매되었다가 2년 만에 생산을 중단했던 밸쥬 7750은 캡트가 밸쥬를 떠난 지 5년 후인 1983년 기계식 시계에 대한 수요가 되살아나면서 재생산이 시작되어 현재까지 생산되고 있다. 그리고 수동과 자동 무브먼트를 포함하여 모든 크로노그래프 중 가장 많이 팔린 기록을 세우게 된다. 기계식 시계의 부활은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중심으로 진행되었고, 그 당시 스위스를 포함하여 유럽 브랜드들이 사용할 수 있는 크로노그래프 중 대량으로 구매할 수 있는 무브먼트가 캡트가 설계했던 밸쥬 7750이었다.
밸쥬 7750을 사용하지 않았던 하이엔드 브랜드들이 1990년대 이후 자동 크로노그래프로 사용했던 고급 크로노그래프의 대명사 프레드릭 피게 1185 패밀리도 1988년 에드먼드 캡트가 블랑팡을 위해 설계하게 된다.
블랑팡에서 개발하게 되는 최소형 미니츠리피터와 그랜드 컴플리케이션까지 에드먼드 캡트는 이전에는 무브먼트 하나 개발하는 데도 몇 년씩 걸리던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매년 한, 두 가지 이상을 설계하게 된다. 제니스에서 엘프리메로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설계하고 제조하는 데 4년이 걸렸었다. 이 차이는 오로지 컴퓨터 덕분이었다. 시계에서 쿼츠 혁명을 의미하는 IC(집적회로)는 컴퓨터를 통해 기계식 무브먼트 개발을 엄청나게 단축시킨 공로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기계와 전자는 서로 경쟁하고 배척하는 기술로 보이지만 실은 서로 도우며 살아왔던 것이다.
컴퓨터를 통한 설계와 시뮬레이션이 없었다면 스와치에서 2010년 ETA 무브먼트 공급을 중단 계획을 발표한 이후 스와치 그룹을 제외한 대부분의 브랜드들은 다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사이 발전한 컴퓨터를 이용하는 설계와 제조 시스템을 통해 ETA를 대체할 무브먼트들이 2010년 이후 다양하게 등장하여 하이에크(1928-2010)의 마지막 도박도 실패한 것으로 보인다. 스와치 그룹에서 1983년 스위스 시계 업계를 살린 인물로 추앙되는 하이에크는 항상 결정적인 시기마다 중요한 판단에서 실수했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의 실수를 만회한 것은 언제든 에드먼트 캡트같은 숨어 있는 인물들이다.
브랜드 입장에서는 기계식 시계는 설 자리가 없다며 제조설비를 모두 파기해 버린 몇 년 후 느닷없이 기계식 시계가 고급 제품으로 재등장하던 시절 IWC, 오메가, 태그 호이어, 브라이틀링 등 스위스 크로노그래프 브랜드들이 즉시 크로노그래프는 물론 이에 기반한 컴플리케이션 시계들을 제조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무브먼트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먼트 캡트가 쿼츠 무브먼트를 설계해야 했던 밸쥬 7750이 중단된 시기인 1975년에서 1982년까지의 기간이 쿼츠 혁명 시기 중 기계식 시계에게는 가장 어두운 시기였던 것이다. 쿼츠 혁명을 이야기하면서 캡트의 인생유전을 빼놓을 수 없는 이유다.
쿼츠 무브먼트 설계를 마무리한 에드먼트 캡트에게 향후 블랑팡에서 사용할 작고 슬림한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 설계를 요구하게 되고 이에 따라 캡트는 이후 블랑팡이 발매하게 되는 자동 크로노그래프 FP 1185, 수동투루비용인 FP 23, 소형 리피터 FP 33과 크로노그래프와 투루비용 기능을 갖춘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인 FP 2383 등을 차례로 설계하게 된다.
2. 풍운아 쟝 클로드 비버와 문페이스 캘린더의 유행
캡트보다 3살 어린 쟝 클로드 비버(1949~)는 1949년 룩셈부르크에서 태어났으나 1959년 부모를 따라 스위스 발레 드 쥬 지역의 로잔으로 이주하게 된다. 1975년 로잔대학의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자크 피게의 소개로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게 된다. 발레 드 쥬 출신의 캡트와 마찬가지로 비버 역시 발레 드 쥬 출신답게 대기업보다는 작은 기업에서 일하기를 원했고 발레 드 쥬를 떠나기 싫었다고 한다. 오데마 피게는 르 쿨트르와 함께 발레 드 쥬 지역에서 성장한 회사였다.
오데마 피게에 입사 면접을 치를 때 당시 오데마 피게의 사장이었던 게오르게스 골레이(1921-1987)는 1년간 봉급의 절반을 받으며 인턴으로 근무하는 것을 조건으로 비버에게 유럽 세일즈를 맡기게 된다. 골레이는 비버에게 인턴으로 근무하는 시계기술자들과 함께 지내며 1년간 시계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배우고 오데마 피게의 역사를 공부한 후 어떻게 프로모션을 할 것인지를 생각하라고 주문했다고 한다. 그래서 비버는 1년간 회사 내의 시계기술자들과 매일 만나며 시계기술자들의 사고방식을 배우며 한편으로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 브랜드의 역사부터 철저히 공부하여 고객에게 제품을 소개해야 한다는 것을 배우게 된다.
오데마 피게는 1972년 로얄 오크를 출시하였지만 이태리 외에서는 큰 인기가 없었다. 그 입사한 1975년은 오데마 피게에서도 쿼츠 시계도 만들고 다양한 브라슬렛 일체형의 금시계를 만들며 쿼츠 혁명과 함께 찾아온 스위스 프랑의 환율으로 인한 어려움을 버티고 있던 시기였다. 얇은 시계 전쟁에서 설명했듯이 쿼츠 혁명이 진행되는 동안 기계식 시계들이 살아남기 위해 처음 시도한 일은 얇은 시계를 만드는 일이었고, 여기서 밀리자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LCD가 대세가 된 쿼츠 시계에는 없었던 문페이스와 캘린더를 도입하는 등 다이얼이 화려한 시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 슬림와치들과 함께 컴플리케이션 중 문페이스 캘린더 모델과 퍼페츄얼 캘린더 등이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크로노스위스 등 여러 브랜드에서 출시되는 이유이다. 쿼츠 시계와 차별화된 기계식 시계로 문페이스 캘린더와 투루비용이 스위스에서 쿼츠에 대해 경쟁력을 가진 테마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IWC의 커트 클라우스(Kurt Klauss)에 따르면 1975년 바젤 페어에서 쿼츠 시계들과 함께 문페이스 캘린더 회중시계를 선보였더니 제조 가능한 수량이 전부 팔려버렸다고 한다. 이후 IWC에서 1981년 밸쥬 88을 이용한 문페이스 캘린더 크로노그래프를 발매하게 되고, 1985년 다빈치의 퍼페츄얼 캘린더 모델을 발표하게 된 것이다.
1980년대 초 호이어의 독일 서비스 센터 책임자였던 게르트 루디거 랑(Gerd-Rudiger Lang)은 호이어가 도산할 무렵 호이어에서 해고되어 독일 뮌헨에서 '크로노스위스(Chronoswiss)'를 창업한다. 크로노스위스도 쿼츠 혁명기에 창업하여 기계식 시계의 인기를 되살린 브랜드로 유명하다. 게르트 루디거 랑이 자신의 집에서 크로노스위스의 이름으로 처음 만들어 자신의 상점에서 판매하기 시작한 시계들도 밸쥬 7750을 기반으로 한 문페이스와 캘린더의 다이얼을 가진 시계였다. 이외에도 1980년대 초중반에 다양한 브랜드에서 문페이스와 캘린더 다이얼을 가진 시계들이 등장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70년대 중반 이후 얇은 시계 전쟁이 진행되면서 한편으로 4개의 섭다이얼에 문페이스를 조합한 화려한 다이얼의 시계들이 타임온리의 쿼츠, LCD 시계와 차별화하기 위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오데마 피게는 1978년 로열 오크에 사용된 가장 얇은 자동 무브먼트인 칼리버 2120(두께 2. 밀리의 풀로터 자동)에 퍼페츄얼 캘린더 기능을 추가한 퍼페츄얼 캘린더 모델을 출시하게 된다. 이 무렵 고급 기술인력들의 해고를 막기 위한 노력이기도 했다. 비버가 오데마 피게에서 근무하던 1975년에서 1979년 사이 진행된 가장 큰 프로젝트였다.
쿼츠 혁명기 스위스 시계 업 종사자의 변화를 보면 1970년 약 9만 명이 일했으나 1987년에는 약 3만 명으로 17년간 1/3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이후 2000년에 들어서면서 다시 완만한 증가세를 보이다가 2005년부터 급격히 증가하며 2015년 다시 약 6만 명이 일하게 된다. 1950년의 수준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한편, 1년간의 인턴과정을 마친 비버는 유럽을 돌아다니며 오데마 피게 세일즈를 진행하며 사장인 골레이에게 기계식 시계 신제품에 대한 제안서를 여러 번 내지만 비버의 제안들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회사 사정이 나아져 새로운 제품을 출시하려면 14년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라는 답변만 들었다고 한다. 당시 소규모 회사였던 오데마 피게로서는 1972년에 개발한 로열 오크의 판매량이 서서히 증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롭게 기획한 퍼페츄얼 캘린더에 집중하고 있던 터라 새로운 컨셉의 신제품을 추가로 발매하는 것은 회사의 재정상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20대의 나이로 도전적이었던 비버로서는 자신이 40대나 되어야 새로운 세일즈가 가능하다는 대답에 실망하여 4년 후인 1979년 오데마 피게를 떠나 대기업인 오메가의 세일즈 매니저로 입사하게 된다. 오메가에서 그에게 주어진 업무는 오메가의 금시계 판매를 높이기 위한 제품과 마케팅을 개발하는 것이었다.
오메가는 황동 혹은 스텐레스 스틸에 금도금(골드 캡 포함)을 한 시계를 너무 많이 팔았던 과거로 인해 금시계를 만들어도 금도금 시계로 보이는 문제에 직면하고 있었다. 1980년대는 매년 성능이 향상되고 기능이 다양해진 새로운 모델들이 등장하는 쿼츠 시계들의 전성기였고, 기계식 시계들은 경쟁력을 거의 상실한 상태였다. 이때 비버가 출시한 시계가 오메가의 쿼츠 금시계인 'De Ville'이었다. 시간을 맞출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크라운을 제거한 시계였다. 그러나 1981년 오메가에 입사한 지 2년도 되지 않아 비버에게 위기가 닥친다.
당시 SSHI와 ASUAG를 통합하는 자문역할을 맡았다가 스와치의 대주주가 된 니콜라스 하이에크에 의해 스위스 시계산업을 쿼츠 시계를 중심으로 재편하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하이에크의 이 결정에 따라 오메가와 론진의 오랜 역사를 가진 기계식 무브먼트들의 생산이 중단되고 제조 설비들도 폐기되게 된다.
시계 제조나 판매에는 문외한이었던 하이에크의 독단적인 결정에 불만을 느낀 당시 오메가의 사장 프리츠 아만이 사직하고 하이에크가 임명한 새로운 사장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아만 사단으로 분류되던 비버는 사장과 함께 사직하고 회사를 떠나게 된다.
한편, 1961년 SSIH에 통합된 빌러레(Villeret)의 레이빌(Rayville)은 제한-자크 블랑팡이 1735년에 창업한 브랜드였으나 1932년 설립자 가문의 후계자가 사업을 포기하면서 '레이빌'로 회사 이름을 변경하게 된다. 그러나 그 후에도 '블랑팡'이라는 브랜드를 계속 사용하면서 '레이빌의 블랑팡'이라는 조금 복잡한 명칭이 생기게 되었다.
블랑팡은 1920년대 영국의 시계 기술자 존 하워드가 발명한 자동 무브먼트를 제품화하여 세계 최초로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했지만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고가의 시계를 제조 판매한 역사는 없었다. 1930년대 이후 틈새시장이었던 여성용의 작은 무브먼트를 만들어 그루엔, 엘진, 해밀턴 등 미국 회사들에 납품하며 레이디버드(Ladybird)라는 모델명으로 판매하던 여성 시계 전문 브랜드였다.
1961년 SSIH에 통합된 후에도 '블랑팡'은 오메가와 티솟의 약점이었던 여성용 소형 무브먼트와 보석 시계를 생산하며 1970년에는 연 20만 개를 생산할 정도로 여자용 보석 시계 전문 브랜드로 성장한다. 그러나 쿼츠 시계가 전성기에 들어선 1975년 바젤 페어 참석을 마지막으로 생산과 판매를 중단하며 동면에 들어가게 된다.
1952년에 미국, 독일, 프랑스 해군에 납품되어 프로패셔널 다이버 와치의 효시로 불리는 피프티 페이톰스는 각국의 해군에서 원하는 스펙에 따라 제조되어 납품된 군용 시계였고 당시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큰 인기가 없었기 때문에 SSIH 시대에는 사라진 역사였다. 피프트 페이톰스가 블랑팡의 대표 모델로 재등장하게 된 것은 기계식 시계가 완전히 부활한 후 큰 시계 유행에 따라 다이버 시계가 소비자들의 인기를 끌던 2007년이다.
블랑팡의 생산이 중단된 시기에 오메가에 근무하던 비버는 1735년이 설립되어 스위스에서도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블랑팡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하이에크의 강압적인 회사 운영으로 오메가를 그만두고 새로운 출발을 준비를 하던 비버는 블랑팡의 상표를 구입하여 쿼츠 시대에 역행하는 소규모의 하이엔드 기계식 시계 회사를 창업할 생각으로 자크 피게와 상의하게 된다. 오데마 피게에서 근무하던 당시 진행되던 퍼페츄얼 캘린더 개발을 지켜보았던 것이 오데마 피게 급의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를 지향하는 블랑팡을 시작하게 된 이유가 되었을 것이다.
프레드릭 피게에서 무브먼트를 제조하여 1735년에 설립된 오랜 역사를 가진 블랑팡의 브랜드로 최고가의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판매하는 사업을 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이었다. 컴플리케이션과 슬림 무브먼트가 오랜 가업이었던 피게가 흥미를 보이자 21,500 스위스 프랑을 지급하고 블랑팡 브랜드만 구입하게 된다. 그리고 프레드릭 피게의 공장에서 가까운 발레 드 쥬의 루이 엘리제 피게의 농장에 회사를 차린다. 비버 전설의 시작이다.
3. 하이엔드 블랑팡의 등장
비버의 인터뷰에 따르면 비버 자신도 그 무렵 명확히 인식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이 자크 피게와 함께 블랑팡을 창업한 1983년에 기계식 시계가 부활하고 있다는 변화들이 느껴졌다고 한다. 당시 만네스만에서 인수한 르 쿨트르와 IWC의 사장이었던 귄터 블륌라인이 기계식 시계 부흥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오이스터 쿼츠를 개발했던 롤렉스에서 기계식 시계 생산을 중단한 적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Since 1735 Blancpain has never made a quartz watch and never will.'
'1735년부터 블랑팡은 쿼츠 시계를 만든 적도 없고 앞으로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
라는 모토에 따라 자크 피게는 블랑팡을 오로지 기계식 시계만 만드는 회사로 창업했다. 당시 30대의 나이로 젊은 사장이었던 비버의 패기와 미래에 대한 믿음이 가져온 도전이었다. 하지만 그가 동업한 프레드릭 피게 역시 기계식 무브먼트의 생산을 중단하고 쿼츠 무브먼트를 생산하던 시절이었다.
그래서 생산이 중단된 프레드릭 피게의 슬림 무브먼트 대신 푸조의 슬림한 수동 무브먼트인 푸조 7001(두께 2.5 밀리)에 문페이스와 캘런더를 추가한 시계를 만들어 1984년 바젤 페어에 등장하게 된다. 그가 오데마 피게에서 근무하던 시절 쿼츠와 경쟁하기 위해 개발된 것은 퍼페츄얼 캘린더였다는 것을 고려하면 비버 역시 문페이스와 캘린더 기능을 가진 시계가 성공할 수 있다는 판단을 한 것으로 보인다.
트리플 캘린더 문페이스는 스위스에서 194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롤렉스를 포함하여 대부분의 브랜드에서 제조 판매했던 시계로 오랫동안 유행하다가 사라졌던 스타일의 시계였다. 그러나 1970년대 말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 쿼츠와 경쟁하기 위해 여러 브랜드에서 재출시되던 시계였으므로 특별한 컨셉의 제품도 아니었다. 블랑팡의 제품 중 제품 번호 63과 64로 시작하는 시계들이 ETA(푸조) 7001을 사용하는 시계들이다. 충분한 준비 없이 시작된 창업이었으므로 초창기에는 제품도 없이 카탈로그만으로 바젤 페어에 참가하여 눈총을 받기도 했다. 향후 개발할 시계들을 미리 주문받는 방식이었다.
1984년 바젤 페어에서 스텐레스의 프로토타입만 만들어 등장한 이후 블랑팡은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등 기존 하이엔드와 달리 솔리드 골드 케이스 외에도 스텐레스 스틸 제품과 콤비(스틸과 골드) 제품들을 통해 가격 경쟁력을 가진 시계들을 발매하게 된다. 파텍 필립이나 오데마 피게와 같은 가격대로 경쟁하기에는 케이스는 물론 다이얼 등의 품질에서도 상당한 차이가 있었으므로 스틸 모델로 가격경쟁력을 확보해야 했던 것이다.
스와치 그룹에 인수된 1991년 이후에도 블랑팡의 대부분의 제품은 스틸 모델로도 판매되고 있다. 비버가 오메가에 근무하던 시절 오메가 브랜드의 금시계 판매에 어려움을 겪었던 것처럼 소자본으로 출발했던 블랑팡의 한계였다. 이로 인해 1990년대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는 물론 1994년에 등장한 '랑에 운트 조네'에 비해서도 프레스티지에서 밀리게 되자, 스와치 그룹은 1999년 다시 브레게를 인수하게 되는 것이다.
이후 블랑팡은 푸조(ETA) 7001을 파텍 필립급으로 피니싱한 크로노미터 7002라는 엔트리 모델을 몇 년간 지속적으로 발매한다. 초고가의 컴플리케이션 판매량을 급격히 늘리기 어려웠으므로 생산비가 낮은 ETA 기반의 타임온리(시- 분 혹은 시-분-초의 시간만 표시하는 시계)의 상대적으로 저렴한 스틸 모델의 판매가 지속적으로 필요했던 것이다.
이렇게 해서 블랑팡의 엔트리 모델이자 유일하게 ETA를 사용한 크로노미터 7002가 별 다른 마케팅도 없이 판매되었으나, 비버가 창업한 이후 등장한 블랑팡의 시계들 중 컬렉터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시계가 되었다. 그리고 2000년대 이후 ETA(Peseux) 7001을 가장 아름답게 피니싱한 무브먼트로 유명해지게 되었다. ETA도 고급스럽게 피니싱한다면 하이엔드 브랜드의 무브먼트가 될 수 있다는 역사적인 샘플로 남아 있다. 파텍 필립과 바쉐론 콘스탄틴을 능가하는 완벽한 피니싱으로 역대 최고가의 타임온리 수동 시계(심플리시티)가 대표작이 된 필립 듀포의 롤 모델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창업 이후 지속적으로 자금 압박을 받던 비버는 골드 제품을 주문받을 경우 판매대금의 일부를 선금으로 받아야 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자동차에서 슬리핑백 속에 들어가 잠을 자기도 했다고 한다.
1985년부터는 프레드릭 피게가 재생산한 슬림 무브먼트와 캡트가 개발한 무브먼트들을 사용할 수 있게 된다. 문페이스 캘린더 모델은 그 후 자동 모델로 변경되며 캡트가 개발한 슬림 자동 무브먼트(칼리버 95)를 사용하여 자동 모델로 판매된다. 또한 피게의 슬림 무브먼트들의 재생산되면서 블랑팡은 피게 21을 사용하는 울트라 슬림 수동 모델, 피게 70을 사용하는 울트라 슬림 자동 모델도 판매되며 본격적인 블랑팡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인 1986년에는 자동 퍼페츄얼 캘린더 모델을 발표하고, 1988년에는 당시 가장 작은 수동 미니츠리피터(두께 3.3 밀리)와 자동 미니츠리피터(두께 4.85 밀리)를 발표했다. 1989년에는 퍼페츄얼 캘린더와 미니츠리미터를 결합한 자동 시계를 발표하여 단기간에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이 오랜 역사를 통해 판매해 온 다양한 컴플리케이션들을 일 년에 한, 두까지씩 발표하게 된다. 그리고 이에 동반하여 본격적인 쿼츠 시대에 '쿼츠 시계는 만들지 않는다'는 도전적인 마케팅도 시작되면서 블랑팡은 파텍 필립과 바쉐론 콘스탄틴에 비교되는 하이엔드 브랜드의 이미지를 만들어 나가게 된다. 블랑팡은 노포들에서 제조해 온 기존의 컴플리케이션들을 투루비용 모델만 제외하고는 모두 자동 무브먼트로 실현하면서도 가장 슬림한 시계를 제조했다.
1988년과 1989년에 발표한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블랑팡의 가장 유명한 모델이다. 당시로서 가장 슬림한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버티컬 클러치 방식)인 칼리버 1185와 스플릿 세컨드 칼리버 1186이 개발되었던 것이다. 블랑팡 이전에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 같은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에서 자동 크로노그래프를 발표한 적이 없었다. 프레드릭 피게에서 이 시기에 개발한 크로노그래프들은 1990년대 이후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등에 공급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25년 이후 울트라 씬 슬림 무브먼트만을 제조하던 프레드릭 피게는 블랑팡의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위해 퍼페츄얼 캘린더, 미니츠 리피터, 투루비용과 이들을 조합한 다양한 컴플리케이션을 제조할 수 있는 슈퍼 하이엔드 무브먼트 제조 업체로 성장했던 것이다.
1991년 블랑팡은 손목시계로는 처음으로 이 모든 컴플리케이션을 통합한 1735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발표한다. 당시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도 도전한 적이 없는 가장 복잡한 손목시계 컴플리케이션이었다. 같은 해에, 블랑팡은 그동안 개발해 온 6가지 손목시계를 '6 마스터피스'라는 이름으로 플레티늄 모델 99 세트의 한정판으로 발표한다. 회중시계 시대부터 오랫동안 인정되어 온 컴플리케이션의 기준에 따른다면 블랑팡 최초의 모델이기도 한 풀 캘린더 문페이스 모델은 캘린더 모델의 일종으로 컴플리케이션이라 부르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퍼페츄얼 캘린더, 스플릿세컨드 크로노그래프, 투루비용과 미니츠 리피터의 4가지가 단독으로 컴플리케이션으로 인정되는 기능이다.
크로노그래프는 자동 시계만큼 보편화된 기술이어서 컴플리케이션으로 인정되지 않지만 퍼페츄얼 캘린더와 결합하여 자동 퍼페츄얼 캘린더에 이어 가장 보편적인 컴플리케이션으로 발매되고 있다. 이때 블랑팡이 6 마스터피스에 포함시킨 울트라슬림은 컴플리케이션에 못지않게 스위스가 창조해낸 제조와 조립이 어려운 기술의 하나이다. 다만 기계식 시계들이 부활한 이후 40 밀리 이상의 큰 시계들이 유행하게 되면서 슬림한 시계에 대한 평가가 낮아져 현대에는 그 가치가 거의 평가되지 않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기적으로 얇은 무브먼트 개발 경쟁이 지속되는 것은 큰 시계 유행이 끝나면 결국 브랜드 간의 기술력의 차이는 얇은 무브먼트를 만드는 능력으로 평가되어 온 것이 오랜 시계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빠른 속도로 컴플리케이션의 명가들을 추격하면서 욕심이 과했던 것인 지 이 무렵 자크 피게가 블랑팡과 별도로 운영하던 무브먼트 제조 업체인 프레드릭 피게가 자금난에 봉착하게 된다. 자크로서는 블랑팡에만 공급해서는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들의 개발비조차 회수할 수 없었다. 그래서 캡트가 개발한 새로운 무브먼트들을 다른 브랜드들에도 판매해야 했으나, 1980년대 말까지도 고급 무브먼트에 대한 수요는 크게 증가하지 않았던 것이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기계식 시계를 재생산하기 시작한 IWC, 브라이틀링, 호이어 등의 고급 시계 브랜드들도 저렴한 ETA 2824와 2892, 밸쥬 7750을 선호했던 것이다. 1985년에 엘 프리메로를 재생산한 제니스도 1988년부터 롤렉스에 소량 공급한 것이 전부였다.
매년 한, 두 가지의 무브먼트를 개발했던 자크 피게는 무브먼트 개발과 생산설비를 구입하느라 은행에서 빌린 막대한 금액에 대한 이자조차 지급하기 어려워졌다. 결국 블랑팡의 지분과 함께 무브먼트 제조업체인 프레드릭 피게를 1991년에 매물로 내놓게 된다. 비버는 피게의 자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당시 블랑팡이 스와치 그룹에 6,000만 스위스 프랑에 매각됐다는 기사와 함께 비버와 자크 피게가 창업 10년 만에 엄청난 돈을 번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후 두 사람의 행적을 보면 은행빚을 정리하고 나서 비버와 자크 피게에게 남은 금액은 얼마 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패기로 시작한 약 10년간의 악전고투는 1990년에는 연간 6,000 개를 판매하여 1,200만 스위스 프랑의 매출을 올렸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사이 은행 빚만 늘어났던 것이다.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개발한 고가의 컴플리케이션 판매 비중이 적었던 것으로 보인다. 비버는 여러 인터뷰에서 이 시절을 일관되게 '실패'였다고 말하고 있다.
1991년 기계식 시계의 인기가 고가의 슈퍼 하이엔드를 중심으로 회복되는 것을 확인한 스와치의 하이에크는 스와치 그룹에는 없는 르 쿨트르급의 고급 에보슈를 제조하는 프레드릭 피게와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의 필요성을 느끼던 시절이었다. 비버의 지휘 하에 매년 새로운 컴플리케이션 모델을 발표하며 슈퍼 하이엔드 브랜드로 성장한 블랑팡을 오메가 위의 상위 브랜드로 위치시켜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바쉐론 콘스탄틴 등과 경쟁할 수 있겠다는 판단이 블랑팡도 함께 인수한 이유였다.
1981년 SSIH를 통합하여 스와치 그룹을 만든 하이에크는 쓸모없어 보이는 레마니아를 중동의 인베스트코에 팔아버렸다. 인베스트코는 브레게를 인수한 후 브레게의 시계 제조에 어려움을 겪던 상황이었으므로 레마니아와 같은 소규모 컴플리케이션 공장이 필요했다. 브레게와 레마니아를 1999년에 재구입하게 되는 상황과 1980년대 초 오메가와 론진의 무브먼트 제조설비를 모두 파기했던 상황 등 하이에크의 여러 판단들을 종합해 보면 하이에크는 기계식 시계가 1980년대에 완전히 소멸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프레드릭 피게의 자금난 외에도 비버 또한 10년간 세계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회사 업무에 몰두하느라 아내로부터 이혼을 통보받고 개인적으로 힘든 시간이었다고 한다. 블랑팡을 매각하기로 한 후 아내에게 회사를 팔아버렸으니 이혼하지 말자고 애원했으나 아내는 그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며 결국 떠나 버렸다. 결국 블랑팡을 매각한 직후부터 후회를 거듭하던 비버는 몇 주만에 하이에크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블랑팡에서 다시 일하게 해달라고 부탁한다. 하이에크는 그의 좌절감을 이해한다며 블랑팡의 사장과 함께 오메가를 다시 부흥시키는 일을 맡에 달라고 하여 그는 블랑팡의 사장 겸 오메가의 마케팅 담당 사장을 겸직하여 복귀하게 된다.
비버가 오메가를 떠나 블랑팡을 창업하여 동분서주하는 동안 하이에크의 지휘 하에 1983년에 발매된 플라스틱 스와치 시계의 성공으로 위기를 벋어나 안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그러나 기계식 시계의 부활로 브랜드의 고급화가 필요해진 상황에서 비버의 경험은 스와치 그룹에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 덕분에 비버는 스와치 그룹에 합류하면서 이사회 멤버가 되어 스와치 그룹의 전반적인 운영에 관여하는 등 파워맨으로 변신하게 된다. 블랑팡으로 쓰라린 실패를 맛보았지만 이후 비버는 맡는 일마다 성공을 거두며 실패를 모르는 '전설적인 사장'의 명성을 얻게 된다.
첫 만남은 악연이었지만 비버는 이때부터 하이에크의 오른팔이 되어 저녁 늦은 시간이나 새벽 등 아무 때고 하이에크에게 전화할 정도로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1975년 오데마 피게에 입사했던 때로부터 블랑팡의 도산까지 15년간 실패만 거듭하던 비버는 오메가의 부흥을 지휘하는 한편 스와치 그룹의 일본, 한국, 싱가포르 등 동남아의 판매를 전담하며 오메가의 사장을 맡은 직후인 1993년에 개방되어 신흥 시장으로 떠오른 중국에 가장 먼저 입성하여 성공을 거두게 된다.
오메가에 근무하는 동안 비버는 1970년대와 1980년대의 20년간 쿼츠에 집중하며 너무나 많은 신모델을 쏟아낸 탓에 엉망이 되어 버린 오메가의 모델들을 정리하고 오메가를 다시금 롤렉스와 경쟁할 수 있도록 마케팅에 집중하게 된다. 비버를 통해 오메가의 '문와치'에 대한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007의 새 영화가 준비된다는 소식을 듣고는 007 시계로 씨마스터를 협찬하면서 200만 달러를 투자하여 007 영화의 모든 행사에 공식적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와 함께 제임스 본드가 오메가를 착용한 다양한 사진들 확보하여 씨마스터를 007 시계로 선전하게 된다. 그 외에도 여성 모델로 신디크로포드를, 스피스마스터의 모델로 마이클 슈마허를 영입하여 마이클 슈마허 특별판을 판매하기도 했다. 이를 통해 오메가의 씨마스터와 스피드마스터가 오메가의 대표 상품이 되어 롤렉스와 경쟁하는 현재와 같은 위치로 부활했던 것이다.
비버의 성공신화는 오메가로부터 시작되었다. 20대의 비버가 신제품 개발을 제안하자 오데마 피게의 사장이었던 골레이가 했던 말이 예언이 되어 그는 오데마 피게에 입사한 지 14년이 지난 후에야 제품 개발과 마케팅의 귀재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비버가 블랑팡을 하이엔드 브랜드로 정착시키던 1987년 골레이는 기계식 시계의 부활과 그가 개발을 결정했던 로열 오크가 오데마 피게의 대표 시계로 정착되는 것을 지켜보지 못한 체 서거하게 된다.
한편 1992년 스와치에서 블랑팡을 인수하자, 쟈크 피게는 프레드릭 피게를 운영하며 스와치 그룹에 남았지만 에드먼트 캡트는 중동의 인베스트코가 스와치로부터 구입한 누벨 레마니아(레마니아에서 '새로운 레마니아'로 이름을 변경)의 기술 책임자로 자리를 옮기게 된다. 캡트는 스와치 같은 대기업과는 체질적으로 맞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캡드는 누벨 레미나아에서 여성용의 소형 자동 무브먼트인 레마니아 7875와 소형 자동 크로노그래프 1050을 설계하고, 이 무브먼트들이 브레게의 무브먼트로 사용되며 브레게의 부활을 돕게 된다.
1999년 자크 피게가 스와치 그룹에서 은퇴하면서 캡트에게 프레드릭 피게의 기술 책임자로 올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1999년 12월 누벨 레마니아가 브레게와 함께 다시금 스와치 그룹에 인수되면서 말년의 캡트는 스와치 그룹에 남아 프레드릭 피게와 레마니아의 기술감독을 겸직하게 된다. 캡트는 밸쥬 7750을 설계한 후 1979년 스와치 소속의 대기업인 ETA를 떠나 발레 드쥬에 머물며 몇 년간 슬림한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다가 1983년 이후 블랑팡과 브레게의 컴플리케이션 무브먼트를 설계했다. 그가 설계한 모든 무브먼트들은 결국 그가 이리저리 피해 다녔던 스와치 그룹 하이엔드 브랜드의 역사를 만드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되었던 것이다.
스와치 그룹에서 브레게와 누벨 레마니아를 인수하던 1999년 비버는 오메가의 성공을 위해 전 세계를 돌아다니는 강행군을 거듭하다가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다. 그리고 2001년 레지오넬라 병에 걸려 완전히 탈진하여 52세로 스와치 그룹에서 사직하고 프리에이전트가 된다. 그리고, 3년 후인 2004년에 쿼츠 혁명기인 1980년에 창업한 소규모 시계업체였던 와블로(Hublot)의 창업자인 카를로 크록코를 만나 와블로의 사장으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한편, 1975년 비버가 로잔대학을 졸업하고 시계업계에 입문하면서 오데마 피게에 입사한 전년도인 1974년 오데마 피게에서 8년간 시계 기술자로 근무하던 다니엘 로스(1942~)가 파리의 보석상인 쇼메에 스카우트되어 브레게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쇼메가 1987년 도산하면서 중동의 인베스트코에 인수되었던 브레게와 누벨 레마니아를 스와치 그룹에서 1999년에 인수한 직후 비버는 10년간 근무했던 스와치 그룹을 떠나게 되었다. 하이에크는 브레게를 인수한 후 말년까지 브레게의 사장을 맡아 브레게의 성장에 집중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큰 시계 그룹인 스와치 그룹의 브레게-블랑팡-오메가-론진-티솟-해밀턴으로 이어지는 스와치 브랜드의 수직 서열화가 완성되었다.
스와치 그룹에서 은퇴한 후 와블로의 하이엔드화에 성공하며 성공신화의 마지막 장을 화려하게 장식한 비버는 2008년 와블로가 MVMH에 인수되면서 MVMH의 시계 부분 총괄사장이 되어 태그 호이어와 제니스의 브랜드 이미지 정립에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다가 2018년 69세로 은퇴하게 된다.
쿼츠 혁명기에 오데마 피게에 입사하며 등장했던 1970년대 히피 출신의 비버는 1975년부터 2018년까지 43년에 걸쳐 활동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던 인물이다. 오메가를 떠나 블랑팡을 창업하며 슈퍼 하이엔드만이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는 길이라고 보았던 비버의 예상처럼 21세기는 하이엔드 중심의 시장으로 개편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