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세계 대공황 이전의 론진과 오메가
코로나 19 팬데믹으로 경제공황의 전 단계라는 인플레를 경험하는 중이다. 전 세계적인 경제난은 19세기 말 이후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현상이다. 그중 20세기에 알려진 것이 1873년에 시작되어 20년간 진행된 장기불황, 1929년~1933년의 대공황, 1970년대의 오일쇼크 같은 시기이다. 그 사이에 정치적인 격변과 2번의 세계대전도 있었다. 1914~1918년의 1차 세계대전,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촉발된 공산혁명의 확산, 1939~1945년의 2차 세계 대전이다.
20세기 스위스 시계 산업에서 큰 변화가 있었던 시기도 1920년대와 1970년대이다. 세계 1차 대전이 끝나고, 대공황이 진행되던 1920년대 말에서 1930년대 초는 스위스에서는 중소 브랜드들이 경제 불황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루어지던 시기였다.
경제가 어려워지면 고가의 시계 판매는 더 어려워진다. 1930년대까지 고급시계란 회중시계의 크로노미터를 의미했다. 당시 손목시계는 회중시계만큼 정확하지 않았다. 손목시계가 회중시계를 밀어내고 보편적인 시계로 등장한 것도 손목시계들이 회중시계 정도로 정확해진 1940년대였다. 미국에서는 1960년까지 레일로드 크로노미터는 회중시계에만 허용되었다. 1961년의 어큐트론과 1969년의 쿼츠 손목시계의 등장은 고급 시계의 기준선이었던 크로노미터를 의미 없는 역사적 유물로 만든 사건이었다. 어큐트론과 쿼츠는 검증할 필요도 없이 모두 압도적인 크로노미터였기 때문이다.
철도가 보급되면서 철도 승무원, 기술자들이 사용할 레일로드 크로노미터가 등장한 것이 1850년대부터 이며 이에 대한 엄격한 기준이 등장한 것이 1880년대이다. 기차 시간을 맞추기 위해 일반인들에게도 시계가 필요해진 시기도 이 무렵이다. 레일로드 크로노미터의 조건이 일주일 오차 30초였으므로 하루 오차 4-5초 정도였다. 쿼츠 시대 이전에 이 조건을 만족시키는 시계는 고급 시계, 이 조건에 못 미치는 시계는 케이스의 재질에 따라 럭셔리(금은보석) 시계와 보통 시계로 분류되었던 것이다.
오메가는 1890년 크로노미터 회중시계로 명성을 얻어 1902년에야 정확한 시계의 마지막이라는 의미의 'Omega'(알파와 오메가)라는 이름을 브랜드명으로 사용했다. 대부분의 브랜드들이 그렇지만 창업연도인 1848년은 오메가의 실질적인 역사에서 큰 의미는 없는 연도이다.
오메가 보다 먼저 크로노미터 제조 업체로 명성을 얻은 브랜드가 론진이다. 론진은 오메가보다 빠른 1832년에 창업했으며 프란실론(Francillon)이 사업을 이어받은 1867년부터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된다. 덕분에 오메가는 물론 스위스에서 고급 시계를 생산하는 브랜드 중 가장 먼저 스위스제 고급 시계의 명성을 얻게 된다. 제니스는 오메가 보다 늦은 1865년에 창업했고 크로노미터 제조업체로 이름을 얻은 것도 1900년 파리박람회에서 수상을 하면서이다. 그 결과 1930년대까지 론진이 오메가를 앞서갔지만, 1930년대 이후 비슷한 수준이 되었다. 제니스는 1950년대까지는 론진이나 오메가의 직접적인 경쟁상대는 아니었으나 브랜드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천문대 경연에서는 1950년대부터 론진과 오메가를 앞서 나가기 시작했다.
19세기 중엽에 시작된 각종 박람회는 새로 등장한 브랜드들이 자신들의 시계를 홍보하고 경쟁업체들의 발전 상황을 지켜보는 중요한 기회였다. 론진의 회중시계 케이스 백에 표기된 그랑프리 마크들은 당시 론진의 위상을 보여주는 상징들이다. 1913년 미국 뉴욕 타임즈에서 뉴욕 시민들에게 꼭 가지고 싶은 시계 브랜드를 질문했을 때 92%가 론진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정확성은 기본이고 대륙을 오가는 비행에 특화된 시계가 필요했던 린드버그와 미국 공군에서 1920년대에 자기 나라의 크로노미터 제조 업체인 월쌈과 해밀턴을 제쳐두고 론진에게 비행사용 시계 개발을 의뢰한다. 이 당시 론진이 개발한 린드버그와 윔스 시계는 당시 론진이 가지고 있던 기술력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
군용 시계로 유명한 오메가, IWC, 야거 르쿨트르, 제니스를 포함하여 군용 시계를 만들어온 브랜드들은 모두 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된 1939년 이후 비행사용 시계를 공급했다. 론진은 이들을 10년 이상 앞서 가고 있었던 것이다.
1983년 스와치 그룹에 통합되고 오메가의 하위 브랜드로 설정됨으로써 론진의 이런 역사는 빈티지 컬렉터들 외에는 관심이 없는 역사가 되어버렸다. 하지만 경쟁자를 찾을 수 없는 린드버그 시계와 수많은 미투 시계를 만든 윔즈(Weems), 유일하게 인하우스 무브먼트(13.33Z, 13ZN, 13CH)를 사용한 손목시계 크로노그래프에서 그 시절 론진의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손목시계 시대의 유일한 인하스(in-house: 브랜드 자체 제작)무브먼트였다. 1950년대 이전의 론진 무브먼트는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과 비교하면 조금 밀리지만 오메가, 제니스 등 동급 브랜드들과는 다른 피니싱(부품의 모서리들을 제거하는 마무리 작업)을 보여준다.
파텍 필립이 에보슈로 구입하여 자체 기술력을 총동원하여 수정한 밸쥬 13-300과 레마니아 2310만이 비교될 수 있는 품질의 크로노그래프인 것이다. 론진에서 생산하고 자체 브랜드로만 발매한 시계이므로 생산 수량도 적어서 빈티지 시장에서 론진이 유일하게 제대접을 받는 시계이며 그 시절 론진의 기술력을 보여주는 시계이다. 크로노그래프 전문 기업인 레마니아를 통합한 오메가와 1950년대까지 스위스 최고의 시계 경쟁을 할 수 있었던 론진의 당시 저력을 확인할 수 있는 시계이다. 크로노그래프 외에도 1960년대까지의 무브먼트들을 비교해 보면 론진보다 우수한 무브먼트는 파텍 필립과 르 쿨트르(바쉐론 콘스탄틴과 오데마 피게의 무브먼트)에서나 발견되는 것이다.
2. SSIH
고급시계는 만드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를 선전하고 전 세계적인 판매망을 만드는 것이 자국 시장이 작고 경쟁업체들이 난립한 스위스 업체들의 숙명이었다. 이에 비하면 수출을 염두에 두지 않고 보호무역을 통해 자국 내의 판매만 늘리면 되는 미국이나 일본은 시계 사업을 하기에 편한 나라였다.
1920년대 오랫동안 계속된 장기불황과 1차 세계 대전의 영향으로 스위스 시계 업체들의 대부분이 이익 크게 감소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고객들이 가난해 지자 오메가나 론진처럼 고급 시계를 만드는 회사들이 더 힘들었다. 1901년 850만 개의 시계를 제조하던 스위스는 1913년 1,400만 개로 생산량이 증가하지만, 1921년에는 790만 개로 반토막이 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메가는 1923년 가장 강력한 경쟁업체인 론진과의 통합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자신과 비슷한 수준의 시계를 만드는 론진과의 통합은 아무런 시너지 효과도 없었다. 결국 오메가는 1925년 티솟과 협상을 시작하여 1930년 티솟의 사장인 폴 티솟에게 오메가의 경영을 맡기는 조건으로 지주회사를 만들어 통합하게 된다. SSIH의 출발이며 오메가가 세계 최고의 시계로 등극하는 전성시대가 열린 것이다.
오메가는 고급 시계의 제조에 집중하고, 티솟은 그보다 저가의 시계들을 판매하며 무브먼트 제조를 부분적으로 통합하여 생산단가를 줄이고, 오메가와 티솟이 별도로 확보해 온 판매망을 통합하는 것이었다. 회사의 경영을 티솟의 사장이던 폴 티솟에게 일임하고 오메가는 제품 개발에 몰두하게 된다.
1932년 스톱워치 제조업체이자 크로노그래프 에보슈 업체였던 레마니아가 합류하게 되며, 1932년 로스 엔젤리스 올림픽의 공식 계측 업체(official timekeeper)로 선정된다. 올림픽의 공식 계측 업체가 선정된 첫 번째 올림픽이었다. 1920년에서 1928년까지 올림픽 공식 계측 업체는 없었으나 스톱워치 전문 업체였던 호이어(Heuer)가 개발한 '마이크로그래프'라는 스톱워치가 사용되었다. 1932년 이후 오메가는 올림픽 공식 계측을 전담하여 기술의 오메가라는 역사도 만들게 된다.
또한, 이때 레마니아가 SSIH에 합류함으로써 1969년 문와치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기도 하다. 1942년 레마니아는 당시 가장 작은 수동 크로노그래프인 레마니아 2310(직경 27밀리)을 개발하게 되고 오메가에서 1957년에 개발한 씨마스터 케이스에 사용되어 오메가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Moonwatch'가 만들어진 것이다.
SSIH로 통합된 후 1938년 오메가의 상징적인 수동 무브먼트인 30밀리 칼리버(1963년까지 300만 개 생산)가 개발된다. 이 무브먼트로 오메가는 수많은 천문대 경연에 참여하여 론진, 제니스 등과 경쟁하여 높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또한, 1941년 오메가 최초의 손목시계 크로노미터로 판매되고, 2차 대전과 그 이후 영국군에만 11만 개가 군용 시계로 납품되는 등 개발 이후 25년간 오메가의 빵과 버터와 같은 무브먼트였다. 1952년에는 자동 크로노미터 콘스텔레이션(Constellation)이 등장하게 된다. 자동 무브먼트의 전성기인 1950년대와 1960년대의 오메가를 상징하는 시계이다.
오메가의 콘스텔레이션은 1966년 스위스에서 COSC가 설립되기 이전 B.O.로 불리던 스위스의 공인 검정 기관에 제조 번호순으로 10만 개의 무브먼트를 제출하여 하나의 탈락도 없이 모두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았다. 오메가의 자동 크로노미터를 대표하는 시계이다. 시계의 케이스 백에는 오메가가 천문대 크로노미터 경연에서 탁월한 역사를 만들어왔다는 것을 상징하는 천문대 문양도 각인했다.
이 무렵 오메가는 롤렉스를 경쟁상대로 의식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1927년부터 1950년까지 롤렉스가 마케팅 목적으로 거의 혼자 참여하던 B. O. 크로노미터 인증에 본격적으로 참여한 것이 콘스텔레이션을 발매하면서부터이다. 이후 어큐트론 시계 발매에 집중하기 직전인 1971년까지 20년간 오메가는 롤렉스의 인증 기록을 넘어서게 된다. 후발주자였지만 급격히 성장하던 롤렉스의 마케팅 방식에 동참하여 마음만 먹으면 무한대의 인증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셈이다. 론진과 제니스는 기술력을 겨루는 올림픽과 비슷한 천문대 경연에는 적극적으로 참여하면서도 제조원가만 높이는 크로노미터 인증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오메가는 1957년에는 롤렉스와 경쟁할 미래를 예측이라도 한 듯 오메가 트릴로지로 불리는 '씨마스터', '스피드마스터', '레일마스터'를 발표했다. 이 시계들이 중요한 것은 스테인리스 케이스와 브라슬렛으로 상징되는 스포츠 모델들의 주요 대상이었던 다이버 시계, 내자성 시계, 크로노그래프에 대해 통일성 있는 모델들을 발표하여 이 분야에서 독보적인 성장을 보이던 롤렉스와 경쟁할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이다. 1957년 트릴로지 발표 이후에도 오메가는 1960년대를 통해 롤렉스의 섭마리너와 비교될 씨마스터의 후속 모델들을 1967년까지 지속적으로 발표하게 된다. 또한 레마니아에서 개발된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들을 사용하여 스피드마스터를 포함하여 브라슬렛을 장착한 스포츠 크로노그래프 시계들도 다양하게 출시하게 된다. 레마니아와의 통합이 가져온 오메가만의 강점이기도 했다.
1950년대 이후 론진이 오메가와 롤렉스에 뒤쳐지게 된 이유는 스포츠 모델에 대한 무관심과 그에 따른 개성 없는 마케팅이었다. 론진의 역사에 없는 것이 1950년대 롤렉스 섭마리너와 오메가 씨마스터 300으로 상징되는 브라슬렛 다이버 시계의 역사이다. 오메가는 1961년 다이버 시계에서 롤렉스, 오메가와 비견될만한 역사를 가진 블랑팡을 제조하던 빌러레(Villeret)의 레이빌(Rayville)을 인수하게 된다. 오메가는 1957년 브라슬렛이 장착된 씨마스터 300을 발표하고 지속적으로 씨마스터 300을 개량하는 중이었으므로 아무런 시너지 효과도 없는 시계였다. 그 결과 블랑팡의 피프티 페이톰스(Fifty Fathoms)는 사장되어 버렸다.
피프티 페이톰스의 페이톰(fatom)은 6피트의 깊이를 의미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50 페이톰스는 300 피트 즉, 91.4 미터의 잠수 깊이를 의미하는 말이다. 이 시계는 롤렉스와 오메가 보다 빠른 1952년 개발되어 미국 해군과 독일 해군에도 납품되었던 군용 다이버의 전설적인 시계이다. 1961년 블랑팡이 오메가가 아닌 론진으로 인수되어 개성적인 디자인을 가진 피프티 페이톰스를 통해 다이버 시계에 진출했더라면 론진의 역사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지만 1970년대까지 오메가나 롤렉스에 뒤지지 않는 최상급의 무브먼트를 만들면서도 론진을 상징할 만한 디자인은 만들지 못했던 론진에 대한 아쉬움이 그런 상상을 하게 한다.
롤렉스는 창업 초기부터 오이스터로 상징되는 방수 기능과 이를 이용한 마케팅에서 월등한 능력을 보여주며, 제품 디자인에서는 가장 보수적인 길을 택하여 결국 스위스 고급 시계의 최종 승자가 된 것이다. 1950년대 이후 론진의 빈티지 시계들을 보면 크로노미터에 대한 관심은 여전하지만 손목시계의 주요 테마였던 방수 기능보다는 슬림하고 정확한 정장용 시계에 몰두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 시기에 론진의 광고들은 스포츠를 테마로 할 때에도 강건해 보이는 케이스와 스테인리스 브라슬렛이 아닌 슬림한 가죽 시계인 '엘레강스'에 집중되어 있다.
그런 역사로부터 론진은 극한의 스포츠 시계(tool watch) 개발에 몰두한 롤렉스나 오메가가 아닌 슬림하고 정확한 시계를 제조하던 파텍 필립이나 바쉐론 콘스탄틴과 경쟁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나 일 년에 수십만 개의 시계를 제조하면서 클래식한 디자인의 시계들만 계속 발표한 것이다. 당시 유행이 시작되던 스포츠 모델에 대한 론진의 무관심이 경쟁상대인 오메가, 롤렉스와의 경쟁에서 뒤처진 가장 궁극적인 이유일 것이다.
론진 이후 비행 시계로 유명해진 브라이틀링을 보아도 론진이 린드버그와 윔스를 개발한 이후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를 활용하여 비행에 특화된 더 다양한 모델을 개발했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1970년대 쿼츠 개발에 집중하면서 론진이 마지막까지 도전한 것은 정확하고 얇은 시계(VHP)였다. 창업 초기부터 경쟁자가 없을 정도의 무브먼트를 만들어 왔던 역사 때문인지, 론진의 관심은 정확성과 슬림함에 집중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좋은 시계니까 소비자들이 알아서 고르겠지... 이런 생각이었을까?
제니스는 론진이나 오메가에 비하면 후발주자였고 천문대 경연을 통해 이들과 본격적으로 경쟁하게 된 것도 1950년대였다. 그러나 제니스는 창업 초기 롤모델이었던 론진을 모델 삼아 정장용의 크로노미터 시계 제조와 판매에 집중했다. 그 결과 이미 그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오메가는 물론 론진을 앞설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1901년 가장 늦게 창업한 롤렉스가 공식 인증을 선전하는 크로노미터 다이얼, 탁월한 방수 기능을 가진 케이스와 브라슬렛을 특징으로 하는 스포츠 모델을 기반으로 급격히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론진이나 제니스의 기대와 달리 소비자들의 관심이 스포츠 모델로 쏠리기 시작한 1960년대 이후에는 롤렉스 vs 오메가의 구도가 정착되어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는 것이다.
제니스는 다른 브랜드들이 어큐트론 이후 쿼츠 개발에 집중하던 시절 자동 크로노그래프 개발에 몰두하여 1969년 쿼츠 혁명이 시작되던 그 해에 호이어-브라이틀링-해밀턴 연합, 일본의 세이코와 함께 세계 최초의 자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개발하게 된다. '엘 프리메로'(스페인어로 '처음'을 의미)로 불리는 현재 제니스를 대표하는 무브먼트이자 시계의 이름이다. 50년 이상 론진, 오메가와 크로노미터로 경쟁하던 이미지와는 달리 회사가 도산할 무렵 만들어 몇 년 후 생산이 중단되었던 무브먼트가 현재까지 제니스의 상징으로 남게 된 것은 쿼츠 혁명이 가져온 의외의 결말이다.
쿼츠 시대 이후 제니스의 운명은 모바도를 인수한 그린버그의 이야기에서 간략히 언급한 것처럼 1971년 미국 라디오 제조 회사인 '제니스 라디오'에 인수되었다가 1978년 스위스의 딕시라는 무브먼트 제조 설비 회사로 매각되었다. 그리고, 1999년 LVMH 그룹으로 넘어가 현재 LVMH 그룹에서 태그 호이어와 함께 시계 분야의 주력 기업이 되어 있다. 다만 역사적으로는 태그 호이어의 전신인 호이어보다는 생산량이 많은 오메가와 론진급의 대기업이었지만 현재 LVMH의 간판 브랜드는 태그 호이어이다. 제니스에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 상징적인 모델이 없는 탓이다.
손목시계의 시대는 회중시계의 시대와 달리 무브먼트보다는 시계의 디자인이 더 중요한 시대였다. 호이어는 비록 스톱워치에 특화된 소규모 회사였지만 마지막 주인이었던 잭 호이어가 1960년대에 아우타비아, 카레라, 몬자, 카마로 등 롤렉스의 섭마리너나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와 경쟁할 만한 매력적인 디자인을 만들었던 것이 LVMH의 간판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 이유이다. 자동차 레이스용 크로노그래프의 전설인 'Heur'의 역사와 마지막 주인이었던 잭 호이어에 대한 이야기는 LVMH에 대한 이야기에서 조금 자세히 다룰 예정이다.
3. 쿼츠 혁명기 스위스 브랜드들의 전략
블로바의 역사에서 설명되었지만 1961년 어큐트론이 발매되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1963년 에보슈 S. A.에서 어큐트론의 발명자인 막스 헷젤을 영입하고 블로바와 라이선스를 체결하여 어큐트론을 고급화한 모사바(Mosaba) 무브먼트를 출시하게 된다. 또한 어큐트론의 크로노그래프 버전도 개발하여 1972년에 처음으로 출시된다. 에보슈 S. A.에서 개발된 모사바 무브먼트들은 어큐트론의 '롤스 로이스'로 불릴 정도로 블로바의 어큐트론보다 발전된 모듈 방식의 세련된 무브먼트였다. 급성장한 블로바와 오랜 역사를 가진 스위스 기술력의 차이를 보여주는 한 단면이기도 하다.
로열티 지급 등으로 무브먼트 가격이 높았으므로, 오메가, 론진, 제니스, IWC, 보메 마르시에 등 당시 스위스의 고급 시계를 만드는 일부 메이커에서 이를 구입하여 튜닝포크 시계를 발표하게 된다. 하지만 고가의 시계를 판매하는 대표적인 브랜드들인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오데마 피게, 롤렉스에서 모사바 무브먼트를 구입하여 시계를 제조했다는 기록은 없다. 피아제는 모사바 무브먼트가 슬림하지 않은 탓이었는지(가장 얇은 것이 4.8 밀리) 자체 브랜드로 발표하는 대신 1964년에 인수한 보메 마르시에의 브랜드로 제조 판매했다. 쿼츠 시대에 살아남은 브랜드들은 이 시기부터 전기, 전자 기술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하나의 샘플이다.
가장 다양한 모델을 발매한 것이 오메가였다. 콘스텔레이션, 씨마스터, 드빌, 제네바 모델과 함께 스피드소닉이라는 크로노그래프 제품까지 오메가의 모든 모델군에 f300 제품들을 출시하게 된다. 오메가가 스위스의 브랜드 중 새로운 기술의 등장에 가장 적극적으로 대응한 브랜드였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또한, 오메가가 f300 모델군에서 보여주듯이 디자인을 다양화하기 위해 같은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모델들에 판매 제품군의 이름을 전부 동원하는 습관은 1990년대 이후 롤렉스와 경쟁하는 데 단점으로 작용하게 된다.
스위스에서 쿼츠 기술은 이중으로 개발되었다. 파텍 필립, 롤렉스, 오메가, 론진, 제니스 등 스위스 16개 기업이 자금을 투자하여 CEH(전자시계센터)라는 기관을 설립했다. 이 기관을 중심으로 무브먼트 전문 업체인 에보슈 S. A.와 공동개발을 진행하며, 한편으로는 공동으로 개발된 기술을 바탕으로 각 브랜드에서 별도의 개발실을 설치하여 독자적인 쿼츠 무브먼트를 개발하는 방식이었다. 수십 개의 업체들이 난립하여 살아남기 위해 무한 경쟁을 해왔던 역사가 남긴 스위스의 전통이다. 결국은 하나로 합쳐져 서열화될 회사들의 창렬한 마지막 경쟁이었다. 기계식 무브먼트와 달리 쿼츠 무브먼트는 대량 생산에 적합한 무브먼트라는 인식이 부족했던 탓이다.
CEH를 통해 개발된 쿼츠 무브먼트가 베타(BETA)로 불리는 쿼츠 무브먼트로 다양한 버전으로 프로토 타입을 만들며 개발되다가 베타 21이 최종 선정되어 1970년 바젤페어에서 파텍 필립, 롤렉스, 오메가, 론진 등이 이 무브먼트로 제조한 쿼츠 시계를 발표했다. 1969년 크리스마스에 세이코에서 전격적으로 발매하기 전 스위스의 주요 브랜드들도 이미 쿼츠 시계를 개발한 상태였던 것이다. 일본 기업이 바젤 페어 참석이 허용되지 않던 시절이고 론진 등에서 스위스의 쿼츠 무브먼트 개발 상황에 대해 언론에 미리 공개한 상태라 세이코에서 그 전년도 크리스마스에 발표한 것으로 보인다. 그 결과로 시계 역사에서 최초의 쿼츠 손목시계는 1969년 발매된 세이코의 아스트론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지점에서 스위스 브랜드들의 운명이 양 방향으로 갈리게 된다.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와 같이 규모가 작은 소규모 브랜드는 스위스 최대 기업인 에보슈 S.A.에서 개발되는 상황을 지켜보는 것 외에 별 다른 대응 방법이 없었다. 대신 몇 년 내에 쿼츠 기술로는 만들기 어려워 보이는 컴플리케이션 시계를 발매하거나 스켈레톤 형식의 시계를 발표하여 쿼츠 시계와 다른 기계식 시계의 내부구조를 예술적으로 보여주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스위스 최고급 브랜드에서 엄청난 수작업이 필요한 스켈레톤 시계들이 발매된 것이 1970년대의 특징이다.
그리고 쿼츠가 경쟁적으로 개발되던 1970년대에 처음으로 브라슬렛 일체형의 스테인리스 스틸제의 스포츠 시계인 로열 오크(오데마 피게)와 노틸러스(파텍 필립)을 발표하여 오랫동안 제조를 꺼리던 스테인리스 시계들을 제품군에 포함시켰다. 또한 스포츠 모델에 도리어 자신들이 제조하는 무브먼트 중 가장 슬림한 자동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슈퍼 하이엔드 제품의 시계는 롤렉스나 오메가의 다이버 시계들과는 달리 슬림하고 케이스 백도 평평하여 착용감이 우수하다는 점을 비싼 가격의 이유로 제시했다.
롤렉스는 자금력은 충분했지만 베타 21 모델을 발표한 후 자체 개발실에서 소형화하면서 정확성에 중점을 두어 얇은 무브먼트 생산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롤렉스의 고급 모델인 데이트 저스트와 데이-데이트에 들어가는 크기면 충분했던 것이다. 롤렉스는 오이스터 퍼페츄얼의 다양한 모델 중 이 최고급의 모델로만 쿼츠 시계를 제조했다. 더구나 그 사이 기계식 시계의 판매량이 크게 줄지도 않았으므로 1977년에야 오이스터 쿼츠를 처음 판매하게 된다. 쿼츠 기술에 익숙하지 않은 서비스 센터의 수리 문제까지 고려하여 매년 생산하는 50만 개 이상의 제품 중 수 천 개 정도의 쿼츠 시계만 발매하는 방식으로 소비자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또한 기계식 시계들과 혼동되지 않도록 기존의 데이트 저스트나 데이-데이트 모델과 구분할 수 있도록 브라슬렛 일체식의 쿼츠 시계 디자인을 새롭게 도입했다.
결국 2000년대 초까지 롤렉스의 쿼츠 시계를 찾는 소비자들이 많지 않았고 롤렉스는 더 이상 제조 수량을 늘리지도 않았다. 다른 브랜드들이 몰두하는 슬림한 시계에 대비하여 첼리니 라인을 신설하며 2 밀리대의 수동 무브먼트를 개발하여 첼리니 라인에만 사용했다. 대신 1945년 이후 정착된 롤렉스 오이스터 페페츄얼의 기본 디자인을 바꾸지 않고 무브먼트의 성능을 지속적으로 개선하며 쿼츠를 이길 수는 없더라도 기계식 시계로 달성할 수 있는 정확성을 향상하기 위한 노력을 지속했다.
오메가는 어큐트론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것처럼 쿼츠 기술이 개발되자 이를 극한으로 발전시켜 마린 크로노미터 모델을 개발하고, LED와 LCD는 물론 시장에 등장하는 모든 종류의 쿼츠 시계들을 전부 만드는 방식으로 대응했다. 일본의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는 물론 미국의 해밀턴과도 정면 대결을 선택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개발된 LED와 LCD 경쟁에서 일본은 전력 소모가 큰 LED는 포기하고 LCD에 집중했으나, 오메가는 두 가지 시계를 다 만들었다. 그 결과 1970년대와 1980년대 중반에 발매된 오메가의 시계들에는 어큐트론과 모든 종류의 쿼츠 시계들이 다 존재한다. 그리고 새로운 유행에 따라 전통적인 디자인을 모두 버리고 쿼츠 시대에 유행하는 새로운 디자인들을 대부분 채택했다. 그 결과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의 시계는 물론 미국 해밀턴의 펄사와 디자인마저 비슷해진 오메가의 시계들에서 오메가의 가격에 걸맞은 프레스티지를 찾기 어려워졌던 것이 문제였다.
론진도 오메가와 비슷한 과정을 거친다. 독립기업으로 버티다가 1972년 에보슈 S.A.가 소속된 ASUAG에 통합된 후 론진 역시 오메가처럼 기계식 무브먼트 개발 대신에 쿼츠 기술 개발에 올인하게 된다. 오메가처럼 LED, LCD 쿼츠도 발매했다. 그러나 론진은 오메가와 달리 정확하면서 얇은 쿼츠 무브먼트 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이렇게 하여 개발된 것이 론진의 VHP(very high precision)이라는 세이코의 그랜드 세이코에 필적할 수준의 쿼츠 무브먼트였다.
크로노미터가 쓸모가 없어진 쿼츠 혁명기를 거치면서 론진과 제니스는 몰락하고 롤렉스는 오메가를 완전히 앞서게 된다. 쿼츠 혁명 이후 정확성이 자랑인 크로노미터 무브먼트는 홍콩제 시계보다 못한 것이었으므로 소비자들에게 시계 케이스와 브라슬렛의 디자인과 완성도가 시계 선택의 가장 중요한 요인으로 바뀌어 버렸던 것이다.
한편, 쿼츠 혁명기로 불리는 1974년에서 1984년 사이 롤렉스는 쿼츠 시계를 준비하면서도 99% 이상 기계식 시계 제조에 집중한 반면 오메가는 기계식 시계 생산을 완전히 포기하고 손목시계로 '마린 크로노미터'(시계가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크로노미터) 시계까지 제조할 정도로 쿼츠 기술 개발에 집중했다. 론진도 VHP 쿼츠를 개발하며 100년간이나 만들어온 기계식 무브먼트의 생산을 완전히 중단해 버렸던 것이다. 이 10년간의 선택이 그 이후의 운명을 결정해버렸다.
1980년대 중반 이후 쿼츠 시계는 스와치, 카시오, 타이멕스로 대표되듯이 가장 저렴한 제품이 되어 버렸고, 파텍 필립과 롤렉스로 대표되는 기계식 시계가 고급시계의 상징으로 부활해버렸던 것이다. 시대에 순종한 브랜드는 몰락하고 시대에 역행한 브랜드는 되살아난 역사의 아이러니이다.
1980년대 말 이후 오메가와 론진은 기계식 시계가 부활하자 자신들이 소속된 스와치 그룹의 ETA에서 제조하는 스위스 브랜드들의 공동 무브먼트인 ETA 2892와 밸쥬 7750을 사용하여 티솟이나 해밀턴과 내부 구성은 동일하고 케이스와 다이얼 디자인만 다른 시계를 제조할 수밖에 없었다. 론진은 오랫동안 기계식 시계보다는 쿼츠 무브먼트로 슬림한 시계를 주력 제품으로 만들며 '엘레강스'를 강조하는 오메가의 하위 브랜드로 정착되었다. 1990년대에 인터넷 사이트들을 중심으로 인하우스 무브먼트 논쟁이 불타오르던 시절 ETA를 사용하는 오메가는 인하우스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롤렉스와 비교하여 열등한 브랜드가 되어 있었다.
론진은 빈티지 제품에 대해서만 일부 언급될 뿐 현행품에 대해서 관심을 갖는 시계 마니아들은 없었다. 리치몬트에 통합되기 전의 '미네르바(Minerva)'의 '피타고라스(Pythagore)'라는 수동 시계가 1990년대 이후 마니아들의 시계로 불리며 인기를 끌던 시절이 있었다. 당시의 론진 보다는 비싼 시계였다. 그러나 미네르바의 피타고라스의 무브먼트는 론진이 1960년대 이전에 제조했던 그 어떤 수동 무브먼트보다 열등한 무브먼트였다.
1950년대 이후 시대의 흐름을 여러 번에 걸쳐 잘 못 읽었던 스위스 무브먼트의 명가 론진이 빈티지 컬렉터들에게 남긴 보물들인 셈이다. 수많은 인하우스 무브먼트들이 등장하는 2020년대에도 이 정도로 잘 만들어진 무브먼트를 구경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수많은 빈티지 컬렉터들이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생산된 빈티지들을 좋아하는 이유다.
4. 스와치 시대의 개막
1983년 오메가와 티솟의 SSIH와 론진과 ETA가 소속된 ASUAG가 통합되어 스와치 그룹이 출범하게 된다. 동시에 1970년대 말 데릴리움의 개발에서 얻은 무브먼트와 시계 케이스를 통합하여 부품을 단순화하는 기술을 바탕으로 일제와 홍콩제 시계들와 경쟁할 50 스위스 프랑 미만의 플라스틱 스와치가 발매되었다. 그리고 단기간에 수 백만개를 판매한 스와치의 흥행으로 번 돈으로 스와치 그룹의 소속 브랜드들은 오메가, 론진, 티솟과 해밀턴의 순서로 고급, 중급, 보급형 시계들로 서열화되었다.
1990년대 초 기계식 시계가 부활하자, 스와치 그룹의 회장인 니콜라스 하이엑크는 블랑팡과 브레게를 구입하여 스와치 브랜드 서열의 최상위에 놓게 된다. 다음 이야기는 SSIH에 통합되며 쿼츠 혁명기에 사라졌다가 기계식 시계 부활의 선봉장이 되었던 블랑팡에 대한 이야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