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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와치

by 링고

1. 스와치 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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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에 진행된 쿼츠 혁명은 스위스 시계 산업의 생존을 위협하게 된다. 1970년까지 전세계 손목시계 시장의 85%를 차지하던 스위스는 1980년에는 22%의 점유율을 보이게 된다. 1983년에는 15%까지 하락한 상태였다.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로 대표되는 일본의 대형 시계 브랜드들이 1970년부터 1983년까지 쿼츠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하며 스위스를 밀어내고 미국 시장을 시작으로 전세계를 석권하게 된다. 스위스도 그 시기에 전기 시계, 튜닝포크, 쿼츠 무브먼트며 LCD 액정 시계 등 새롭게 등장하는 전자기술들을 개발하며 일본 기업들과 경쟁했다.


2차 대전말인 1944년 브레톤 우드 협정에 의해 금본위제를 택한 미국 달러에 대해 각 나라의 환율을 고정시키는 협정이 체결된다. 협정에 참여한 나라들은 외환시장에 개입하여 환율을 유지해야 했다. 이를 위해 IMF와 IBRD도 설립되었다. 1945년 스위스 프랑은 달러의 4.5배에 고정되었다. 그러나 1971년 리차드 닉슨이 인플레이션으로 금값이 폭등하자 본위제를 중단하면서 문제가 생긴다. 닉슨 쇼크로 불리우는 이 결정에 의해 달러에 대해 고정되었던 스위스 프랑이 폭등하게 된다. 1975년에는 2.5배로 상승했고, 1978년에는 1.5배까지 상승해 버린 것이다. 단기간에 300%나 폭등해 버린 것이다.


쿼츠 혁명이 본격적으로 진행던 1975년 이후 달러대비 스위스 프랑의 가치가 2배에서 3배로 지속적으로 폭등하면서 스위스의 쿼츠 시계들은 일본제 시계들에 대해 더 이상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공장에서 대량생산이 가능한 쿼츠와 달리 부품들의 조립이 필수적인 노동집약적인 기계식 시계들은 쿼츠에 비해 부정확하면서 가격은 비싸져서 버려 쿼츠 시계에 대해 가격 경쟁력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다. 반면에 일본의 엔화는 일본 경제관료들에 의해 달러에 연동되어 안정세를 유지하고 있었다. 스위스의 모든 시계들의 가격은 일본보다 3배 이상 비쌀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오일쇼크로 인한 인플레로 고급 시계에 대한 수요도 감소하여 스위스 시계 산업을 고사직전으로 몰아갔다.


1980년대초에 100 달러 미만의 시계가 시장의 97%를 차지하게 되었고 스위스 시계들은 평균 350 달러가 넘는 시계들이었다. 이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1978년 어네스트 톰케(1939-)가 ETA SA의 사장으로 영입된다. 톰케는 외과 의사의 아들로 태어나 ETA SA의 공장에서 견습사원으로 일하다가 1961년 대학에 진학하여 화학을 전공한다. 이후 영국의 제약 회사인 비챔(Beecham)의 스위스 연구소에서 연구에 종사하며 경영과 마케팅을 공부한다.된다. 이어 스웨덴의 제약 그룹인 예테보리(Gothenburg)에서 근무하며 마케팅의 책임자가 되었다. ETA SA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던 톰케는 위기에 몰린 ETA SA의 사장으로 선임되자 에보슈 업계의 라이벌인 A. Schild SA와 통합하고, Ebauches SA의 다른 공장들을 모두 통합하여 에보슈 SA의 사장이자 ASUAG의 이사회 멤버로 승진하게 된다.


swat1.png 하에에크와 톰케


한편, 니콜라스 하이에크(1928-2010)는 치과의사였던 아버지 밑에서 레바논의 베이루트에서 태어나 프랑스의 리옹 대학에서 수학, 물리학과 화학을 공부했다. 1950년 베이루트에서 스위스 기업가의 딸과 결혼하여 스위스로 이주한다. 장인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자 공장을 관리하면서 경영을 배우게 된다. 1963년 35살에 컨설팅 회사인 '하이에크 엔지니어링'를 설립하여 스위스의 시계 업체들을 포함하여 유럽 대기업들을 성공적으로 회생시켜며 명성을 얻었다. 1979년 당시 30개국의 300개 이상의 회사가 그의 고객이었다. 1981년 SSIH와 ASUAG에 많은 자금을 빌려주었던 스위스 은행들이 하이에크에게 컨설팅을 의뢰하게 되었다.


니콜라스 하이에크(1929-2010)는 1963년 컨설팅 회사인 '하이에크 엔지니어링'를 설립하여 유럽 대기업들을 성공적으로 회생시켜며 명성을 얻었다. 1979년 SSIH와 ASUAG에 많은 자금을 빌려주었던 스위스 은행이 하이에크에게 컨설팅을 의뢰하게 된다. 최초의 컨설팅 의뢰는 SSIH와 ASUAG를 일본 기업에게 판매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하이에크는 매각 대신에 회생을 권고하게 된다.


SSIH는 1930년 오메가와 티솟이 경제공황을 견디기 위해 통합되어 등장한 대형 시계 그룹으로 1932년에는 크로노그래프 전문 업체인 레마니아가 통합되었다. ASUAG는 1931년 스위스에서 난립했다가 도산의 의기에 처한 에보슈 업체들을 통합하여 생겨난 에보슈 생산 통합기업이었다. 이후 도산의 위기에 처한 브랜드들을 통합하여 Eterna, Rado, Mido, Certina, Oris, Cyma, Hamilton, Roamer, Helvetia 등이 소속되며 1971년말에는 경영에 어려움을 느낀 론진이 통합된다. SSIH는 물론 ASUAG는 그룹임에도 불구하고 소속 회사들은 그룹의 도움을 받으면서도 별도의 회사처럼 운영되고 있었다.


'ASUAG는 100개 이상의 회사들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어떤 회사는 크고 어떤 회사는 작고 일부는 현대적이고 일부는 아주 구식이었다. 그런데 이 회사들 대부분이 자체 R&D 부문과 조립라인을 가지고 마케팅도 별로도 하고 있었다. 미친 일이었다.' (하이에크의 인터뷰 중)


하이에크는 적자가 심한 SSIH와 이익을 내고 있었지만 복잡한 조직의 ASUAG를 통합하는 것만이 위기를 벗어나는 일이라는 '하이에크 보고서(Hayek Study)'를 작성게 된다. 하이에크 보고서에 따라 스위스 은행들은 1983년 두 조직을 통합하여 SMH(Société de microélectronique et d'horlogerie) 그룹을 설립하고, 하이에크를 SMH그룹 이사회 회장으로 선임한다. SMH의 성장가능성이 매력을 느낀 하이에크는 1985년에는 투자그룹을 만들어 은행으로부터 SMH그룹의 지분 51%를 매입하여 대주주가 된다.


하이에크가 SSIH와 ASUAG의 통합을 추진하는 동안 ETA SA의 사장이었던 톰케는 1978년 미국인으로 콩코드의 사장이었던 그린버그의 제안에 따라 일본의 세이코와 경쟁하며 가장 얇은 쿼츠 시계인 데릴리움을 개발하게 되다. 데릴리움은 5천달러 수준의 고가의 시계였다. 톰케는 이 설계에서 얻은 기술을 응용하여 100개 이상의 부품으로 이루어지던 쿼츠 시계를 51개의 부품으로 줄일 수 있게 된다. 이를 통해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저렴한 플라스틱 패션 시계 스와치(대중용 데릴리움 : Delirium Vulgare)를 개발하여 1982년에 출시하게 된다.


FirstVersions_Swatch_1983.png 1983 Swatch 시계


ETA와 에보슈 SA의 통합에 이어 공장을 자동화하여 대량 생산방식으로 일본과 경쟁할 수 있는 금액인 50 스위스 프랑 미만의 스와치가 제조되었다. 1983년까지 1백만개가 생산되었고, 1990년까지 1억개가 판매되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톰케는 1984년부터 1991년까지 SMH의 사장으로 근무하다가 1985년 스와치의 회장이 된 하이에크와의 갈등으로 스와치 그룹에서 하차하게 된다. 톰케가 주도하여 만든 스와치 시계의 성공으로 1984년까지 적자였던 SMH의 이익은 1989년 20억 스위스 프랑으로 증가하여 위기를 벗어나게 되었다. Swatch라는 이름은 하이에크가 제안한 'Second Watch'의 줄임말이다. 스와치는 시계 부품 제조 업체인 ETA SA에서 제조, 마케팅과 판매를 전담하는 ETA의 시계다. SMH그룹은 1998년 'Swatch Group'으로 명칭을 바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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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스와치에서 예술가들과 콜래버로 한정판(Swatch Art Special)을 판매한 적이 있다. 프랑스의 크리스티앙 차피롱(Kiki Picasso, 1956~)이 디자인하여 140개 한정판으로 판매된 키키 피카소 스와치는 1989년 이태리 밀란에서 열린 소더비 경매에서 45,000 달러에 경매되어 가장 비싼 스와치의 기록을 남기고 있다. 스와치도 잘만 고르면 투자가치가 있는 시계이다.



2. MoonS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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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3월 스와치는 스와치 그룹의 주력 브랜드 오메가의 문와치로 유명한 '스피드마스터'의 디자인을 가져온 '문스와치'의 11개 모델을 발표했다. 부도상태였던 오메가를 살린 시계인 플라스틱 스와치에 오메가의 가장 유명한 시계의 콜라보 모델이다.


기존의 스와치 시계와는 달리 스와치 전문매장에서만 판매한다는 발표가 있었고 발매 첫날 런던의 스와치 매장은 몰려든 인파로 인해 경찰이 개입하여 판매를 중단할 정도로 난리법석이었다. 파텍 필립의 티파니 한정판과 달리 문스와치는 지속적으로 판매될 시계였으나 기대 밖의 인기로 인해 수요에 비해 공급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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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가격(리테일가) 260 달러로 발매된 이 시계는 곧 인터넷 장터를 통해 1000달러 이상의 가격으로 재판매되기 시작했다. 물량이 부족해지자 발표된 지 얼마 되지도 않은 문스와치의 짝퉁들까지 무수히 등장했다.


스와치에서 이 시계를 계획하게 된 것은 2020년대 들어서면서 스와치의 판매량이 급격이 줄어들었기 때문이었다. 1980년대에 스위스 시계 산업을 살렸다는 평가를 받는 스와치는 2000년대 들어 하향세를 겪고 있었던 것이다.


문스와치는 오메가의 가장 유명한 시계의 디자인을 플라스틱의 시계로 재해석한 오메가와 스와치의 컬래버레이션에 해당하는 시계인 것이다. 스와치의 평범한 디자인에 등을 돌렸던 소비자들이 역사적인 시계의 디자인을 도입하자 다시 관심을 보인 것이다. 스와치에서는 이 시계를 1년에 50만 개 정도 제조하여 판매할 계획이므로 비싼 가격으로 재판매하는 시계를 구입하지 말고 기다려 달라는 메시지를 반복하여 발표하고 있다.


문스와치의 성공에 자극을 받은 스와치는 다음 모델로 오메가 '씨마스터' 혹은 블랑팡의 '피프티 오션'을 계획하고 있으며, 오데마 피게와 파텍 필립의 허락을 얻는다면 로열 오크와 노틸러스의 스와치 콜레보레이션 시계도 발매하고 싶다는 계획을 밝히고 있다. 문스와치가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의 판매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에 따라 '로열 오크 스와치' 같은 오랜 역사를 가진 오리지널 디자인의 스와치 시계의 등장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스와치 그룹에 소속된 브레게, 블랑팡, 오메가, 론진, 티솟과 해밀턴의 역사에도 유명한 모델들이 적지 않으므로 하이엔드 시계를 모티브로 하는 스와치 컬레보레이션 시계는 향후 몇 년간 지속적으로 등장할 것으로 보인다.


3. 오메가의 문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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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의 문와치로 불리는 스피드마스터는 1957년에 발표된 트릴로지(trilogy: 3부작)으로 불리는 씨마스터 300, 레일마스터와 케이스 디자인을 공유하는 수동 크로노그래프 시계로 NASA에 의해 우주인의 개인장비로 선택되어 아폴로 11호가 달착륙을 했을 때 버즈 올드린이 달에 인류의 첫 족적을 남길 때 함께한 시계로 유명해졌다. 그 이후 스피드마스터는 자동 크로노그래프와 쿼츠 모델들까지 다양하게 등장했으나 문와치는 수동 크로노그래프를 사용하는 '스피드마스터 프로페셔널' 모델로 현재까지 발매되고 있는 오메가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시계이다.


moon3.jpg 오메가의 1957 트릴로지


1962년 NASA에서 우주계획에 따라 우주비행사들에게 개인장비로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지급하기로 결정하고 근처의 시계방을 뒤져서 시판 중인 크로노그래프 시계를 고르게 된다. 롤렉스, 오메가, 론진(위트나우어) 등 당시의 대표적인 크로노그래프 시계들을 구입하여 성능 실험에 착수한다. NASA의 우주비행사들에게 필요한 시계는 급가속이 이루어지는 우주선을 타고 우주로 나가야 하므로 고열과 높은 압력을 동반하는 가속 과정을 거치는 동안 고장 나지 않고 파괴되지 않으며 정확하게 작동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최종적으로 이에 수반된 11가지의 테스트에서 유일하게 통과한 시계는 오메가의 Speedmaster뿐이었다. 그 후로 이 시계는 단순한 시계를 넘어 NASA의 공식 장비 목록에 추가된다. 테스트 중이던 1962년 10월의 머큐리계획(1인 탑승)에도 우주비행사 월리 쉬라가 스피드마스터를 착용했었다고 한다.


NASA의 테스트 책임자였던 제임스 라간(James Ragan)은 스피드마스터의 중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 시계는 백업장치이다. 만일 우주비행사가 지상과의 교신이 중단되거나 달 표면에서 디지털 타이머의 기능이 중단된 경우에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 손목에 차고 있는 오메가 시계인 것이다.'


그리고 미국의 우주계획인 머큐리계획이 거의 마무리된 1965년부터 제미니(2인 탑승) 계획과 아폴로(3인 탑승) 계획의 우주비행사들에게 필수장비로 지급되어 우주로 나가게 되고, 1969년 7월 인류가 최초로 달을 밟게 되던 날 그 우주 비행사들의 팔목에 감겨있었던 것이다. 닐 암스트롱은 달 착륙선의 디지털 타이밍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자 그의 시계를 나중을 대비하여 우주선 내에 남겨두었고, 19분 후에 달 표면을 밟은 버즈 올드린은 오메가 스피드마스터를 팔목에 차고 있었다. 그래서 올드린이 착용한 스피드마스터가 달에서 착용한 최초의 시계가 되었다. 유감스럽게도 올드린이 착용한 그 시계는 그가 임무를 마친 몇 달 후 분실되었고, 아직까지 돌아오지 않았다. 폴 뉴먼의 데이토나와 비견될 시계는 이렇게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오메가에서는 이 시계의 이름에 Professional이라는 문구를 추가하게 되며, '문와치'라는 별명이 생기게 되었다. 그리고 톰 행크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진 1970년 아폴로 13호의 귀환 시 모든 계기판이 고장 나자 스피드마스터에 의지하여 지구로 귀환하여 NASA로부터 감사패(스누피 어워드)를 받은 역사도 가지고 있는 시계이다.


1968년 오메가는 레마니아에서 칼리버 2310을 캠 방식으로 개량한 칼리버 1846(오메가 칼리버 861)로 변경하게 된다. 그리고 현재까지 오메가 스피드마스터 프로페셔널은 1968년에 개량된 수동 크로노그래프로 제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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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의 문와치가 레마나아에서 제조한 칼리버 2310을 사용했고, 이 무브먼트는 파텍 필립, 바쉐론 콘스탄틴, 브레게 등에도 공급되어 고급 크로노그래프를 만들 때 사용된 베이스 무브먼트였다는 역사와 함께 수동 크로노그래프의 명기로 유명해졌다.


2019년 오메가는 빈티지 시장에서 10만 달러의 가격을 호가하는 오메가 321을 사용하는 빈티지에 착안하여 오메가 칼리버 321을 재생산하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오메가의 다른 시계들과 달리 1년에 1,000~2,000개로 제한하여 생산하면서 고가의 금시계로만 제조하다가 2020년 NASA에 채택된 오리지널 스피드마스터의 같은 디자인의 스테인리스 스틸제 '스피드마스터 칼리버 321'을 발매했다. 사용된 무브먼트까지 고려하면 이 시계야 말로 1962년 NASA에서 우주비행사용 크로노그래프 시계로 채택된 오리지널 모델에 가장 가까운 시계이다. 오메가 칼리버 861을 사용하는 스피드마스터 프로페셔널의 리테일 가격이 5,000 달러(스텐레스 스틸 기준) 임에 비해 칼리버 321을 사용하는 스피드마스터는 15,000 달러의 리테일가를 가진 오메가에서 가장 비싼 시계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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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메가의 문와치에 대해서는 여러 권의 시계 책이 등장할 정도로 손목시계의 역사에서 오랜 인기를 누리는 몇 안 되는 시계 중 하나이다. 이와 경쟁할만한 시계가 롤렉스의 섭마리너이다. 섭마리너는 방수시계로 유명해진 롤렉스에서 잠수부들을 위해 개발한 시계로 COMEX 등 해양탐사기업들과 관련된 시계이다. 오메가의 문와치와 함께 컬렉터들이 가장 많이 수집하는 프로페셔널 빈티지 모델의 양대산맥과도 같은 시계이다.



4. 수동 크로노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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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텍 필립의 '퍼페츄얼 캘린더 크로노그래프', 롤렉스의 '데이토나 폴 뉴먼' 모델과 함께 빈티지 시장에서 가장 높은 인기를 유지하며 고가로 거래되는 시계가 1957년에서 1968년까지 생산된 레마니아의 칼리버 2310(오메가 칼리버 321)을 사용한 스피드마스터이다. 이 3가지 모델 모두 수동 크로노그래프라는 것이 특징이다.


19세기의 회중시계 시절부터 크로노그래프는 주력상품이 될 수 없는 시계였다. 경마에서 시작된 스톱워치는 시간을 보는 일반 시계와는 별로도 제조된 시계였고, 이를 일반 시계와 겸용하도록 만들어진 것이 크로노그래프이다. 경마나 스포츠 등의 계측에 필요한 크로노그래프는 일반인들에게는 큰 쓸모가 없었으므로 미국 같은 실용적인 시계를 만드는 나라에서는 거의 제조하지 않았고, 스위스 브랜드들에서도 제품 라인의 극히 일부로 제조되던 시계였다.


당연히 일반적인 시계와 달리 제조량이 극히 적었고, 이것이 1980년대 중반 기계식 시계들의 생산이 중단되면서 이태리에서 유행하게 된 시계 빈티지 거래가 인기를 끌면서 고가의 빈티지가 된 주요 원인이 되었다. 파텍 필립과 롤렉스는 빈티지 시장이 생기자마자 가장 인기 있는 브랜드였다. 오메가는 현행품에서는 언제나 롤렉스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였지만, 빈티지시장에서는 롤렉스에 한참 밀리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문와치의 전설을 가진 레마니아 2310을 사용하는 스피드마스터만은 파텍 필립이나 롤렉스에 필적할 정도로 예외적인 인기를 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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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위스 브랜드 중 크로노그래프가 주요 제품이었던 브랜드로 호이어와 브라이틀링이 있다. 이 브랜드들은 스위스의 대기업들인 롤렉스, 오메가, 론진, 제니스, GP 등과 비교하면 크로노그래프를 주력상품으로 하는 소규모 브랜드였지만, 1980년대 빈티지 시장에서 크로노그래프가 인기를 끌면서 1990년대에 롤렉스, 오메가 등과 경쟁할 수 있는 대형 브랜드로 성장하게 된다. 그 결과 호이어는 루이뷔통에 인수되었고, 브라이틀링은 미국의 사업가에게 인수되어 현재까지 독립된 브랜드로 성장을 거듭하고 있는 것이다.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에 비교할 만한 롤렉스의 크로노그래프 시계는 1955년 오이스터 케이스에 수동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를 사용한 '코스모그래프'를 처음 발매하고, 1963년(시계 디자인) 혹은 1965년(데이토나의 명칭)에 처음 등장한 데이토나는 문와치와 같은 역사는 없지만 파텍 필립과 함께 빈티지 시장의 총아인 롤렉스에서 제조된 크로노그래프라는 이유로 문와치에 못지않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중 폴 뉴먼 다이얼로 불리는 데이토나는 독특한 다이얼 디자인과 유명 배우이면서 카레이서였던 폴 뉴먼의 명성과 함께 빈티지 시장에서 가장 고가로 팔리는 크로노그래프가 되었다.


1970년 이전에 제조된 스위스의 크로노그래프 시계들이 모두 수동 크로노그래프였던 이유는 당시는 아직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개발되기 전이었기 때문이다. 자동 크로노그래프는 일반 자동 시계들과 달리 1969년에야 제니스, 호이어, 세이코에 의해 처음으로 시판되었던 것이다. 일본의 세이코가 최초의 쿼츠 시계인 아스트론을 발표한 해이다. 이 때문에 제니스와 호이어에서 개발된 자동 무브먼트는 몇 년 후 제조를 중단과 함께 이를 개발한 회사들이 투자비도 회수하지 못하고 몰락하는 이유가 되기도 했다.


1988년 롤렉스는 기계식 시계에 대한 수요가 되살아나자 1969년 제니스에서 개발한 엘프리메로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자동 크로노그래프 데이토나를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밸쥬 72 계열의 수동 무브먼트를 사용하는 데이토나의 생산은 중단되었다. 그리고, 기계식 시계가 완전히 부활하고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자사 무브먼트 논쟁이 심각해지자 2000년 바젤 페어에서 자체 개발한 자동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4130을 사용하는 데이토나로 교체했다. 이로써 유일하게 외부에서 제작된 무브먼트를 사용하던 롤렉스는 모든 시계의 무브먼트들을 전량 자체 제작하는 회사가 되었다.



5. 다이버 와치


cc8.png 롤렉스의 섭마리너와 오메가 Ploprof 600


미국의 해밀턴과 엘진이 전기시계를 개발하고, 블로바에서 어큐트론을 개발하던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스위스는 손목시계 역사에서 가장 매력적인 시계들을 개발하던 시기였다. 빈티지 컬렉터들이 가장 선호하는 빈티지 시계들이 바로 1950년대와 1960년대에 생산된 스위스 시계들이다. 강력한 경쟁자였던 미국의 시계 메이커들이 2차 대전을 전후하여 손목시계용 자동 무브먼트를 개발한 스위스와 경쟁할 수 없는 상태로 몰락해 버렸다.


미국에서 스위스의 자동 무브먼트들을 수입하여 정장용 시계 제조에 몰두하는 동안 스위스에서는 롤렉스, 오메가, 블랑팡을 중심으로 2차 대전 중 해군용 시계로 사용된 다이버 시계들을 발전시키고 있었다. 미군에서도 엘진 등이 제조한 다이버 시계를 사용했으나 스위스에서 개발된 다이버 시계들에 비하면 디자인에서 매우 뒤떨어지는 모델들이었다.


크로노그래프, 다이버 시계 및 COSC 크로노미터는 스위스 시계가 세계 시장을 석권하던 시기에 발표되어 스위스를 고급시계의 대명사로 만드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계들이다.



6. COSC 크로노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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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손목시계가 등장한 후 무브먼트가 작아짐에 따라 회중시계에 비해 매우 부정확해졌다. 롤렉스, 오메가, 론진, 제니스, 지라르드 페레고 등을 중심으로 손목시계의 정확성을 회중시계 정도로 향상하기 위한 노력들과 함께 자동 무브먼트의 개발이 진행되었다. 그 결과 1950년대와 1960년대 스위스의 시계들은 하루 오차 5초 정도의 스위스 COSC 크로노미터 인증을 받은 자동 시계들을 대량 생산해 내게 된다. 롤렉스의 대부분의 시계들과 오메가의 콘스텔레이션, 론진의 컨퀘스트와 플랙쉽 같은 시계들이었다.


일본은 1966년에야 비로소 스위스와 경쟁할 수준의 그랜드 세이코의 자동 무브먼트(62GS)를 개발하는 데 성공했고, 미국은 2차 대전 이후 손목시계 무브먼트 개발을 거의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서 1960년 전까지 미국에서는 회중시계가 정확한 시계의 대명사인 '레일로드 크로노미터'(철도원들이 사용하는 정확한 시계)로 채용되었다. 이미 손목시계가 대중화되고 더 이상 조끼도 입지 않은 상황에서 해밀턴 같은 미국 업체들의 생산능력에 맞추어 계속해서 회중시계만 레일로드 크로노미터로 인정하는 것에 대해 소비자들의 불만이 이어지자 엘진의 'B. W. Raymond'가 1960년에 수동 손목시계 모델로 처음으로 레일로드 크로노미터로 인증되었다. 그리고 1962년에 블로바의 어큐트론이 2번째로 손목시계 크로노미터로 인증되어 사용되게 된다.


쿼츠 혁명이 시작되기 전인 1950년대에서 1960년대의 20년간 스위스는 자동 손목시계 크로노미터를 유일하게 대량으로 생산해 내는 유일한 나라였던 것이다. 이 무렵 고급시계 시장의 90%를 스위스가 차지하게 된다. 1961년에 발매된 블로바의 어큐트론만이 스위스 COSC 자동 시계들과 경쟁할 수 있는 유일한 시계였다. 일본이 기계식 무브먼트 개발에 손을 떼고 쿼츠 시계 개발에 집중하게 된 이유이기도 했다.


세이코는 1981년 부도 상태였던 오메가를 인수하려다 실패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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