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티파니에서 벌어진 전쟁의 서막
티파니에서는 파텍 필립이나 롤렉스 외에도 다양한 고급 시계들을 팔았고, 매장에 입고된 시계들에 대한 선전도 많이 했다.
파텍 필립이 창업 초창기 뉴욕의 티파니를 방문하여 판매계약을 성사시켜 성공가도를 달리게 되듯이 오데마 피게, 롤렉스 등 고급 시계 브랜드들이 티파니를 통해 미국에 소개되었다. 그중 콩코드(Concord)는 조금 특별한 브랜드였다. 1908년 비엔(Bienne 혹은 Biel)에서 창업한 콩코드는 자기 브랜드를 앞세우는 파텍 필립, 오데마 피게, 롤렉스, 오메가 등과 달리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고급 시계를 디자인하여 판매점에 납품하는 방식으로 성공한 브랜드였다.
카르티에, 반 클립 & 어펠스, 티파니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은 단순한 판매점이 아니라 보석류를 직접 디자인하는 브랜드였으므로 더블 네임보다는 자체 브랜드를 부착한 판매에 더 관심이 있었던 것이다. 콩코드는 보석 판매가 중심이 되는 이런 브랜드들의 취향을 제일 먼저 간파한 회사였다. 그래서 보석으로 장식된 시계를 디자인하여 보석 브랜드들을 찾아다녔다. 자신들이 디자인하고 보석으로 세팅된 시계들을 보여주며 보석 브랜드에서 원하는 디자인으로 시계를 만들어 해당 브랜드의 이름과 마크를 넣어 시계를 납품하는 하청업체를 자청한 브랜드였다. 20세기 말이면 일반 패션 브랜드들에서도 보편화되는 주문자 상표 사업을 20세기 초에 시작한 회사였다.
191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콩코드의 주문자 상표 시계 납품은 카르티에와 티파니의 관심을 끌게 되어 이 시기에 제조된 카르티에와 티파니의 시계들에는 다이얼에는 카르티에와 티파니가 표기되어 있지만 무브먼트에는 'Concord'가 표시된 시계들이 많이 발견된다. 주문자 상표를 사용하는 시계 제조는 시계 역사에서는 매우 오래된 관행의 하나이기도 하다. 1907년 프랑스 파리에서 이루어진 루이 카르티에(Louis Cartier, )와 에드몽 야거(Edmond Jaeger, )의 계약도 이런 전통의 한 샘플이다.
콩코드의 특별한 점은 보석으로 장식된 고가의 시계를 직접 디자인하여 판매 브랜드를 찾아다녔다는 점이다. 판매 브랜드의 입장에서는 기존의 평범한 시계가 아닌 자신들의 취향에 맞는 보석 시계를 고르거나 디자인을 자신들이 제조하는 주얼리의 콘셉트에 맞게 변경해 달라고 요구하여 간단히 제품화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콩코드가 시작한 아이디어를 자체 브랜드로 살려내 보석 시계로 유명해진 것이 20세기 중반의 피아제(Piaget)였다.
피아제는 스위스의 수많은 시계 브랜드들이 위치한 라쇼드퐁에서 1874년 시계 무브먼트 제조로 사업을 시작했지만, 현재와 같은 보석시계의 대명사로 성장하게 된 것은 손자들이 사업을 이어받은 1940년대부터이다. 1943년 자신들의 이름인 Piaget를 상표로 등록하고 1957년에는 2밀리 두께의 수동 무브먼트 9P를 개발하고 1960년에는 2.3밀리의 자동 무브먼트 12P를 개발하게 된다. 이때부터 다른 브랜드들과 차별화되는 얇은 손목시계를 출시하며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만드는 브랜드라는 명성을 얻게 된다. 이후 피아제는 현재까지도 자신들의 DNA나 다름없는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의 명성을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노력을 기울이게 된다.
보석 브랜드로 유명해진 것은 1959년에 제네바에 공방과 매장을 열어 주얼리와 보석으로 장식된 시계들을 본격적으로 제조 판매하면서부터이다. 1964년에는 시계 다이얼을 라피스 라즐리 같은 보석을 통으로 사용하는 시계도 발표하게 된다. 이 무렵부터 피아제는 보석시계는 물론 주얼리도 제조 판매하는 독특한 이력이 시작된 것이다. 주얼리에서 시작하여 시계까지 제조하게 된 카르띠에나 티파니와는 반대의 방향에서 접근한 브랜드이다. 현재는 카르띠에와 함께 리치몬트 소속의 브랜드이다.
2. 콩코드와 게달리오 그린버그
20세기 시계 업계에 등장했던 독특한 인물인 게달리오 그린버그(1931-2009)는 1970년 콩코드(Condord)를 인수하면서 티파니 전쟁의 주인공이 된다. 게달리오 그린버그는 미국에 정착한 후 미국식 이름인 게리(Gerry)로 알려지게 되지만 쿠바 출신의 시계 판매상이다.
그린버그의 사업적 재능은 어려서부터 시작되었다. 그린버그의 아버지는 러시아출신으로 러시아혁명으로 살기 어려워진 러시아를 떠나 파키스탄에 도착하여 결혼했으나 열대지방에서의 삶에 적응하지 못했다. 1930년 쿠바를 거쳐 미국으로 가려고 했다. 미국의 비자발급이 늦어지자 쿠바에 머물다가 1944년 하바나로 옮겨 쥬얼리 가게를 열게 된다.
그가 15살이었을 때 알람 클럭을 찾는 사람과 만나 얼떨결에 판매 약속을 하게 되었다. 아버지 가게에서 보긴 했지만 가격표까지는 기억하지 못했던 것이다. 게달리오는 아버지의 가게에서 하나를 가져다가 그에게 약속한 가격에 팔았다. 정확한 가격도 모르고 약속을 하고 그 금액에 파느라 실제로는 손해를 보았지만 그는 그 경험을 통해 판매자의 정직함과 말의 책임에 대해 배웠다고 한다. 그리고 그 거래를 시작으로 어린 나이에 알람 클럭을 판매하는 비즈니스를 시작했다. 첫 번째 거래에서 손해를 보았지만 결국 그는 알람 클럭 판매로 손해 본 이상의 돈을 벌기 시작한다. 어린 나이에 실수를 하고 나서야 그는 자신이 타고난 사업가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린버그는 하바나 대학을 다니면서 아버지의 가게에서 일하며 알람 클럭 장사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에는 아버지의 쥬얼리숍에 오메가 시계를 공급하던 파비앙 바이스와 친해지며 손목시계 사업을 시작하게 된다. 당시 쿠바는 미국 관광객들이 많았고, 관광객들이 놀러왔다가 시계를 구입하는 일이 많았다. 파비앙 바이스는 오메가에 이어 피아제를 공급했다. 그러나 그린버그가 바이스와 함께 쿠바에서 오메가와 피아제 판매에 열중하던 시절 쿠바 혁명(1953-1959)이 시작되었다. 그린버그는 피델 카스트로 정부의 멤버로부터 자본주의자로 의심을 받고 위협을 받는 상황이 되자 바이스와 함께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의 마이애미로 탈출하게 된다.
1960년 그는 29살의 나이로 아내와 2명의 아들을 데리고 미국 땅에 도착했다. 미국 정착 초기에 이런저런 어려움을 겪었지만 그는 파비앙과 그의 아들인 호세의 투자를 받아 스위스로 갔다. 오메가는 미국 내에 판매조직이 있었다. 그러나 피아제는 아직 미국에 제대로 소개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는 피아제의 해외판매 담장자였던 카밀 필레와 협상하여 미국과 푸에토리코에 대한 독점판매권을 얻게 된다. 그리고 가방 하나에 피아제 시계를 가득 넣어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1961년 '피아제 시계 회사'를 설립하여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했다. 티파니와의 인연은 그가 제네바에서 가져온 피아제 시계를 납품하면서 시작되었다. 티파니 외에도 반 클립 앤 어펠스, 네이만 마르쿠스 등에도 피아제 시계를 납품했다.
그는 이 무렵 저널리스트인 반스 패커드(Vance Packard)가 쓴 '사회적 신분을 추구하는 사람들(The Status Seeker)'를 읽으며 실용적인 미국인들에게 '신분의 상징'으로 고급 시계를 판매한다면 성공할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다고 한다. 이후 그는 미국에서 대학 졸업 선물 정도로 인식되던 시계를 부자들이 골드 와치를 손목에 두르는 것이 '신분의 상징'으로 여기도록 인식을 전환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뉴욕타임스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다.
그린버그는 여자들의 전유물로 여겨지던 귀금속을 남자들에게 시계라는 형식을 통해 '신분의 상징'이자 '성공의 상징'이 되도록 마케팅을 펼쳐나간 인물이다. 마케팅이야 말로 20세기에 대량생산 가능해진 공산품을 럭셔리 제품(천문학적인 가격으로 경매가 이루어지는 예술품)으로 둔갑시키는 마법이자 혁명이었던 것이다.
1965년 사업이 순조롭게 진행되자 바이스 가족이 가지고 있던 지분을 구입하고, 다른 제품도 판매할 수 있도록 회사명을 북미시계회사(North American Watch Company)로 바꾸게 된다. 그리고 그가 본격적으로 꿈을 실현할 기회도 빠르게 다가왔다. 누군가는 파산을 피할 수 없는 어려운 시기가 어떤 사람에게는 성공할 찬스가 된다는 것을 몸으로 직접 보여준 인물이 바로 그린버그였다. 스위스 브랜드들이 하나 둘 파산하던 시절에 파산한 스위스 브랜드들을 인수하여 성공스토리를 만들어나간 첫 번째 인물이 바로 쿠바 출신의 그린버그인 것이다.
뉴욕 외에 미국 전역에 판매망을 가지고 싶었던 그린버그는 1969년에 제니스와 통합된 모바도에 관심을 가졌다. 모바도는 미국 전역에 판매망을 가진 회사였다. 모바도의 뮤지엄 시계도 당시 판매량은 신통치 않았지만 그에게는 잠재력을 가진 시계로 보였다. 사업여건상 제니스에 통합되었지만 모바도는 창업자 가족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영되고 있었으므로 1969년에 모바도를 인수하는 것은 실패하게 된다.
그린버그는 1970년 콩코드가 파산하자 이를 인수하여 콩코드의 사업을 이어받게 된다. 피아제 딜러에 불과했던 그린버그는 이를 계기로 미국에서 시계 사업을 시작한 지 9년 만에 스위스와 미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시계 브랜드의 사장이 되었다. 한편, 코룸은 1972년 '코인 시계'라는 미국의 20달러 금화(더블 이글)를 사용하여 이전의 코인 시계와는 차별화된 실제로 사용되던 금화로 만든 시계를 처음으로 발매한다. 코룸은 1955년 스위스 라쇼드퐁에서 처음 시작된 신생 브랜드였다.
골드와 얇은 것이 럭셔리로 성공하는 기본 규칙이라고 생각했던 그린버그는 코룸의 시계가 성공할 것이라고 판단하고 즉시 스위스로 달려가 코룸의 북미 판매를 전담하게 된다. 그의 예상처럼 코룸의 금화(Gold Coin) 시계는 레이건 대통령이 애용하고, 알 파치노가 '스카페이스'에 출연하며 착용할 정도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게 된다. 그린버그는 피아제에 이어 코룸의 성공으로 엄청난 이익을 볼 수 있었다. 그는 이런 성공을 통해 '슬림한 골드 시계'를 기획하는 일에 전념하게 된다.
3. 진 라슬과 가장 얇은 시계
이제 그린버그가 스위스와 일본 메이커들 간에 전쟁을 붙인 이야기로 들어갈 때이다. 그린버그의 첫 번째 성공 스토리도 이 전쟁과 함께 시작된 것이다.
1969년 크리스마스 일본에서 세이코가 아스트론이라는 100개 한정판의 쿼츠 시계를 판매하면서 시계사의 연표에는 1969년 12월 25일이 쿼츠 혁명이 시작된 날로 기록되어 있다. 1970년 4월 바젤 페어에서는 1962년부터 스위스 시계 산업계의 16개 회사가 참여하여 공동으로 개발하느라 세이코보다 발표가 늦어졌던 스위스의 첫 손목시계용 쿼츠 무브먼트인 '베타 21'을 사용한 손목시계들이 파텍 필립, 롤렉스, 오메가 등 16개 브랜드에서 동시에 발표되었다.
1970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으로 쿼츠 손목시계들이 등장한 것이다. 그러나 세이코의 100개 한정판과 스위스의 베타 21 시계가 6,000개로 제한하여 제조된 것처럼 초창기의 쿼츠 시계는 기계식 시계보다 두껍고 제조도 어려웠다. 세이코의 아스트론은 당시 도요타의 자동차 한 대 가격이었다. 그 결과 1970년대 초까지 쿼츠 손목시계가 기계식 손목시계를 대체하는 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였다.
이런 이유로 스위스에서 쿼츠 무브먼트 개발이 지체되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에서는 세이코에 이어 시티즌도 쿼츠 시계 개발에 집중하며 고가인 쿼츠 시계에 대한 실용화가 진행되어 스위스는 쿼츠 무브먼트 개발에서는 일본에 완전히 밀려버리는 상황이 전개되고 있었다. 일본은 쿼츠 시계의 제조 단가를 줄이고 정확성을 향상시키는 연구에 매진했다.
한편, 쿼츠 무브먼트를 실용화하는 데 필수적인 IC칩이 미국에서 개발되었기 때문에 2차 대전 이후 시계 제조의 불모지나 다음 없던 미국에서 기존의 아날로그 방식이 아닌 디지털 방식인 LED와 LCD 시계가 '텍사스 인스트루먼트'와 '페어차일드' 등 전자회사를 중심으로 출시되어 쿼츠 시계의 새로운 강자로 재등장하게 된다.
1970년대 중반은 쿼츠 시계가 기계식 시계를 완전히 밀어내고 주력 상품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일본에서는 전력 소모가 많아 시간을 볼 때마다 버튼을 눌러야 했던 LED 대신에 낮시간에 가독성은 떨어지지만 배터리 소모가 적은 LCD에 집중하여 시계를 개발해 나갔다. LCD 시계의 등장은 일본에서 탁상용 전자계산기로 성공한 카시오가 1974년 LCD 시계를 발표하며 시계 생산에 뛰어들어 일본 내 쿼츠 시계는 3파전으로 진행되면서 새로운 기술 개발은 점차 더 빨리 지게 되었다.
1976년 시티즌은 쿼츠 배터리의 문제를 영구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시계 다이얼에 집광판을 설치하여 태양전지를 사용하는 '에코 드라이브(Eco-Drive) 시계까지 개발했다. 쿼츠 무브먼트가 개발된 후 10년도 안 되는 단기간에 기계식 시계에서는 스위스에 한참 뒤져있던 일본이 쿼츠 시대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가장 앞서가는 나라가 되어 미국에서 스위스 시계를 밀어내며 일본제 시계의 점유율을 넓혀 나갔다. 1971년 미국시장의 40%를 차지하던 스위스 시계는 세이코 등 일본 시계들의 진출과 마케팅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자 1976년에는 20%로 반토막이 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쿼츠 시대에 기계식 시계가 살아남는 방법을 보여주기라도 하듯이 1976년 스위스의 진 라슬(Jean Lassale)이라는 상표로 피아제의 얇은 시계 기록을 경신하는 시계가 등장하게 된다. 진 라슬은 1976년에 설립되어 그해 4월의 바젤 페어에서 이 시계와 함께 처음 등장한 브랜드였다.
이 시계에 사용된 무브먼트는 1970년 피에르 마티스라는 라쇼드퐁의 시계기술자가 발명한 무브먼트였다. 세계에서 가장 얇은 무브먼트를 만들겠다는 목적으로 볼베어링을 이용하며 하나의 플레이트에 부품들을 직접 조립하는 방식으로 수동 무브먼트인 칼리버 1200은 두께 1.2 밀리에 불과했고, 같이 개발된 자동 무브먼트인 칼리버 2000은 2.08 밀리에 불과했다. 덕분에 완성품 시계의 두께가 5밀리도 안 되는 얇은 시계가 만들어지게 되었다.
진 라슬이 개발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수동과 자동 시계는 1976년 바젤 페어를 시작으로 제네바 살롱의 그랑프리와 금메달을 수상하는 등 선풍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1977년에는 뉴욕의 엑스포 77에 출품되어 금메달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 시계 하나로 막 창업한 소규모 공방 수준의 회사이다 보니 이 무브먼트를 대량으로 제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1978년에는 당시 오메가와 티솟 등이 소속된 스위스에서 가장 큰 회사인 SSIH와 접촉하여 무브먼트 전문 제조 기업인 레마니아에서 이를 제조하고, 오메가에서 이 무브먼트를 다른 브랜드에도 판매하도록 하는 계약을 맺게 된다. 하지만 이 계약을 체결함과 거의 동시에 진 라슬이 파산하게 된다.
그 결과 이 무브먼트의 설계와 특허는 레마니아로 넘어가고, 진 라슬의 브랜드는 일본의 세이코가 구입하게 되어진 라슬은 등장 후 3년 만에 공중분해된다. 얇은 시계를 만드는 것이 회사의 존립기반이었던 피아제는 그 후 레마니아와 계약을 맺어 이 무브먼트의 독점적인 사용권을 획득하게 된다. 이후 피아제가 리치몬트에 인수될 때까지 독점적으로 사용하게 되면서 피아제의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의 명성은 기계식 시계에서는 그대로 유지된다.
4. 콩코드의 데릴리움과 그린버그의 마케팅
진 라슬의 등장을 보며 일본의 세이코와 시티즌 사이에 정확한 쿼츠와 디지털 시계를 넘어 쿼츠 시계를 얇게 만드는 경쟁이 시작되었다. 세이코가 진 라슬의 전부로 여겨졌던 특허며 제조권을 모두 포기하고 브랜드를 구입했던 이유일 것이다. 슬림한 시계는 세이코가 기계식 시계를 만들던 시절에 결코 스위스를 이겨보지 못한 유일한 분야였던 것이다.
일본에서 만년 이인자에 머물렀던 시티즌이 쿼츠로 진 라슬을 넘어서는 얇은 시계를 개발하여 1978년에 무브먼트 0.98 밀리에 시계 두께 4.1 밀리의 'Exceed'라는 가장 얇은 쿼츠 시계를 발표했다. 시티즌한테 뒤지는 것만은 참을 수 없었던 세이코는 1978년 시티즌의 발표에 뒤이어 즉각 총 두께 2.5 밀리의 쿼츠 시계를 발표한다. 그러자 티파니는 1978년 11월 뉴욕타임스에 새로운 기록을 세운 이 시계를 7명에게 판매한다는 광고를 내게 된다.
그린버그는 피아제와 콩코드를 비롯하여 스위스 시계의 우월성을 믿어 의심치 않던 사업가였다. 그는 일본의 적극적인 쿼츠 개발을 지켜보면서 기계식 시계와 쿼츠 시계 사이에서 우물쭈물하는 스위스 브랜드들의 대응에 답답함을 느끼며 스위스의 무브먼트 개발회사인 ETA를 방문하게 된다. 당시 스위스는 자금력이 충분한 롤렉스 같은 일부 회사를 제외하고는 ETA를 중심으로 쿼츠 무브먼트가 개발되고 있었다. 그린버그는 이 상태로는 일본에게 미국 시장을 완전히 빼앗기게 될 거라며 각성을 촉구하며 일본과 쿼츠 기술로 정면 승부할 것을 제안한다. 그리고 세이코보다 얇은 시계를 만들어준다면 그 시계를 미국 시장에서 독점적으로 판매하는 대가로 200만 달러를 지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로써 1976년 쿼츠로는 도달이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진 라슬의 1.2 밀리의 무브먼트에서 시작된 얇은 시계에 대한 도전이 세계에서 가장 얇은 쿼츠 시계를 만드는 쿼츠 개발 전쟁으로 변경되어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1979년 10월 ETA에서 시계 케이스에 무브먼트를 조립하는 대신 시계 다이얼의 뒷면을 무브먼트 기판으로 사용하여 세이코보다 얇은 시계가 만들어졌다. 그린버그가 ETA가 체결한 계약에 따라 미국에서는 유일하게 콩코드에서 데릴리움(Derilium)이라는 이름으로 독점적으로 발매된 이 시계는 무브먼트가 아닌 시계의 전체 두께가 1.98밀리였다. 그리고 데릴리움 2, 3, 4로 차례로 발표된 데릴리움의 마지막 버전인 데릴리움 4의 두께는 0.98밀리에 불과했다. 손목에 차고 힘이라도 과하게 주면 망가지는 수준의 얇기였다. 세이코와 시티즌도 이쯤에서 경쟁을 접게 된다. 이로써 쿼츠 기술에서는 일본에 뒤떨어진 것으로 보였던 스위스의 쿼츠 시계는 적어도 얇은 시계 제조에서는 일본을 앞서게 되었던 것이다.
그린버그와 계약대로 이 시계는 미국 시장에서는 콩코드의 데릴리움으로 발표되었지만, 유럽 등 다른 시장에서는 론진, 에터나 등의 쿼츠 시계로 발매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을 제외한 다른 시장에서는 엄청난 가격 때문에 이 시계들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다. 그래서 현재까지도 이 시계는 '콩코드의 데릴리움'으로 기억되고 있다.
데릴리움을 통해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만든 그린버그는 새롭게 등장한 쿼츠 기술이 미래의 대세가 될 것으로 생각하여 'Concord Quartz'라는 마케팅을 통해 최고급 쿼츠 시계를 제조하는 '쿼츠 시계의 피아제'로 거듭나게 된다. 또한 데릴리움의 출시와 함께 이전의 다른 브랜드들의 선전과는 차별화된 마케팅 전략을 도입한다.
시계 판매를 위해 지미 코너스, 비외른 보리, 조 몬태나 등 유명 운동선수들과 계약을 맺고 신문과 잡지는 물론 텔레비전 광고까지 엄청난 마케팅비를 투자했다. 데릴리움 시리즈를 차례로 발표한 1982년대에는 1년 광고비로만 1,400만 달러라는 금액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런 엄청난 마케팅을 통해 미국 시장에서 단기간에 카르띠에와 티파니의 이름 뒤에 숨어 있던 '콩코드'를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를 만드는 최고급 브랜드로 유명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보석으로 장식된 콩코드 데릴리움의 최고급 모델은 6만 달러였다. 가장 저렴한 데릴리움 스틸 모델이 당시 롤렉스 데이트저스트와 같은 400 달러였다고 한다.
그러나 마케팅에 엄청난 비용이 들어가는 것에 비해 최고급 시계의 판매만으로 충분한 이익을 유지하기 어려워진 그린버그는 판매량을 늘릴 방법을 고심하게 되었다. 한편, 1972년 쿼츠 개발 경쟁에서 뒤처져 있던 '제니스-모바도-몬디아 그룹'이 도산하면서 미국의 라디오와 테레비전 제조 업체인 '제니스 라디오'로 넘어가게 된다. 그리고 쿼츠 시계를 만들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제니스-모바도-몬디아에게 기계식 시계 제조는 집어치우고 쿼츠 시계를 만들라며 닦달하다 포기한 제니스 라디오가 제니스-모바도-몬디아를 1978년에 매각하게 된다. 이때 제니스가 사라지는 것을 우려하던 스위스의 시계 공구 전문 업체인 딕시(Dixi)가 컨서시움을 구성하여 인수하게 된다.
오래전부터 모바도에 관심이 있었던 그린버그는 1980년부터 딕시와 협상을 시작하여 1983년 자신의 꿈을 실현해줄 새로운 브랜드로 모바도를 분리하여 인수하게 된다. 그리고 최상급 시계인 콩코드의 이미지를 유지하면서 모바도를 통해 중고급 시계 시장에 진출하게 된 것이다. 또한 미국에 진출한 오랜 역사를 통해 미국 전역에 갖추어진 모바도의 판매망을 이용하여 뉴욕 중심의 사업에서 미국 전체로 판매망을 확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린버그는 1970년대 피아제, 코룸과 콩코드라는 하이엔드 시장에서 시작하여, 1983년 모바도를 통해 중고급 시장에 진입하고, 이어 1995년에는 ESQ라는 염가의 시계 브랜드를 출시하는 과정을 통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방식으로 사업을 확장하게 된다.
모바도의 인수는 단순히 중고급시장 진입과 판매망 확중을 넘어 그린버그를 소규모 시계 업체 사장에서 세계적인 시계그룹으로 거듭나는 과정의 시작이기도 했다. 콩코드의 역사에서는 찾을 수 없는 엄청난 잠재력을 지난 진주같은 아이콘이 모바도에 숨어 있었고 이를 찾아내 성공시킨 것이 그린버그인 것이다. 그린버그는 경쟁자들에게는 없는 아이템을 발굴하는 능력과 자신의 믿음을 마케팅을 통해 성공시킬 배짱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5. 모바도와 뮤지엄
그가 인수한 모바도에는 1960년에 처음 출시되었지만 그가 인수할 때까지 큰 인기를 끌지 못했던 '뮤지엄'이라는 시계가 있었다. 그린버그는 호윗과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지만 뮤지엄 디자인에 엄청난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고 한다. 1983년 모바도 인수에 성공한 후 '뮤지엄 시계'를 모바도의 대표 시계로 재발매하며 특유의 물량공세식 마케팅을 펼치게 된다. 그리고 그린버그의 이 도전은 데릴리움 이상의 대성공을 거두게 된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바로 피아제와 콩코드로 시작되었지만 1996년 그룹의 이름으로 채택된 '모바도 그룹'이며 지금은 그의 아들이 사장이 되어 운영 중이다.
모바도 그룹은 1970년 콩코드, 1983년 모바도, 1995년 에스콰이어(ESQ)로 하이엔드로부터 미들섹션으로 이어 로우 섹션 시계로 확장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성공스토리의 가장 화려한 시기는 모바도의 뮤지엄 시계로부터 출발하게 된다.
15세기 휴대용 시계가 등장한 이후 수백 년간 12개의 숫자(로마 혹은 아라비아 숫자)를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1920년대에 회중시계가 손목시계로 변하면서 1932년에 발표된 '파텍 필립의 칼라트라바'로부터 숫자 대신에 1시부터 11시까지는 막대 하나, 12시는 막대 2개로 단순화한 다이얼이 유행하게 된 것이 손목시계에 등장하여 유행한 시계 다이얼의 새롭고 세련된 형태였다.
디자인 초기부터 바우하우스의 디자인 철학에 큰 영향을 받았던 호윗은 시계 다이얼에서 꼭 필요한 것만 남기고 모두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 디자인에 도달했다고 한다. 뮤지엄의 다이얼은 12시에 둥근 점 하나 남긴 것이 전부인 것이다. 억지스럽게 이마저 뺀 시계들이 출시되기도 했지만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그런 일들로 인해 모바도 뮤지엄의 다이얼은 더 이상 단순화할 수 없는 다이얼 디자인의 최소치로 남게 되었다.
이 시계는 시계 브랜드의 의뢰를 받아 손목시계의 디자인으로 개발된 다이얼이 아니다. 도리어 이를 처음 디자인하여 수많은 시계회사들에게 상품화를 의뢰했던 나단 조지 호윗(Nathan George Horwitt, 1898-1990)은 실패만 맛보며 자신의 자금으로 3개의 샘플을 만들게 된다. 결국 호윗이 디자인한 지 13년 후에야 모바도가 상품화 제의를 받아들여 판매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
나단 조지 호윗은 유대인으로 러시아에서 태어나 3살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가 뉴욕대학을 졸업한 후 뉴욕의 'Art Student League'에서 미술교육을 받았다. 프리랜서 산업디자이너로 활동하며 '베타 의자(Betha Chair)', '테두리 없는 유리 액자' 등을 디자인했고 테두리 없는 유리 액자가 200만 개나 팔리며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 그의 이름은 모바도 뮤지엄 시계의 디자이너로 기억되고 있다.
호윗은 디자이너를 꿈꾸었지만 제약회사의 광고 카피라이터로 1920년대를 보낸 후 1930년 'Design Engeers Inc.'라는 회사를 차려 혼자서 탁상시계, 라디오, 램프, 냉장고 등을 디자인했다. 그리고 매샤츄세츠 레녹스에서 400 에이커의 농장을 구입하여 마지막 40년간은 농사를 지으며 살았다.
뮤지엄 시계를 디자인하기 전인 1939년에 다이얼의 중앙에 시간을 표시하고 외각을 회전하는 원형 구멍에 분이 표시되는 싸이클록스(Cyclox)라는 탁상용 시계를 디자인했었다. 1947년 뮤지엄 다이얼의 디자인을 완성한 후 호윗은 제네바를 방문하여 바쉐론 콘스탄틴에 자신이 디자인한 시계를 제조 판매할 것을 제안했다가 거절당한다. 제품화가 지연되자 1956년에는 미국 특허청에 의장등록을 신청했으나 디자인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없다며 거절당했다가 2년 후에 간신히 등록을 마친다.
1958년 당시 미국의 바쉐론 콘스탄틴과 르 쿨트르의 연합법인이었던 '바쉐론 콘스탄틴-르 쿨트르'에 의뢰하여 화이트골드 금시계로 3개의 프로토타입을 제조하게 된다. 다이얼은 블랙 에나멜 다이얼에 12시에 금색 혹은 은색의 점 하나를 표시하고, 시계바늘도 은색이었다.
호윗은 자신의 다이얼 디자인이 슬림하고 단순한 원형 테두리를 가진 플랫한 시계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당시에 슬림한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그런 시계를 가장 잘 만드는 곳이 바쉐론 콘스탄틴이었다. 1947년 바쉐론 콘스탄틴을 방문했다가 상품화 제의가 거절을 당한 후 그는 시중에 판매되는 시계 중 얇고 단순한 디자인을 가진 론진 시계를 구입하여 자신이 디자인한 다이얼로 교체한 샘플을 직접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조악한 마감탓에 자신의 획기적인 디자인을 납득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결국 자신이 희망하던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주문 제작한 3개의 고급한 샘플들을 제시하며 1958년에서 1960년 사이 스위스와 미국의 여러 회사들과 다시 제품화 협상하게 된다. 그러나, 디자인이 너무 과감하고 미래적이라는 이유로 모두 거부되었다. 결국 13년간의 힘든 과정을 거쳐 1960년에서야 미국의 모바도에서 출시하기로 하여 오랜 기다림 끝에 제품화에는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자신이 주문제작한 1번 시계를 뉴욕현대미술관(MoMA)에 기증하여 1960년부터 전시되고 있다. 2번 시계는 나중에 브루클린 미술관에 기증하여 1985년부터 전시되고 있다. 현재도 두 곳에 진열되어 있다. 뉴욕 현대미술관에는 손목시계 외에 같은 디자인의 벽시계도 전시되어 있으며, 벽시계는 미국의 하워드 밀러 클럭 회사(Howard Miller Clock Co.)에서 제조된 것이며 그린버그가 인수하기 전 모바도에서 출시한 손목시계 외에는 하워드에서 만든 벽시계와 탁상용 시계가 미술관에서 기념품으로 판매되었을 뿐이다.
이 디자인으로 고가의 시계를 만들어서는 성공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모바도는 당시 미국의 완성품 수입 시계에 대한 높은 관세장벽을 피하기 위해 스위스 본사에서 무브먼트만 들여와 미국 내에서 다이얼과 케이스를 만들어 소량 제조하여 판매하였다. 호윗이 평평한 디자인을 선호했기 때문에 전량 수동 무브먼트로만 제조되었다. 시계 판매가 부진하자 호윗이 모바도가 선전 비용을 너무 아낀다며 불만을 털어놓자 1962년 호윗의 시계가 뉴욕현대미술관에 진열되어 있다는 이유로 '뮤지엄'이라는 이름을 붙여 잡지를 통해 선전하게 된다.
이때 마케팅을 위해 선정된 이름이 '뮤지엄 와치'였고 이 시계의 이름으로 남게 되었다. 결국 그린버그가 이 시계의 성공을 확신하기 전까지 미국 시장에서 모바도의 손목시계 모델의 하나로 지속적으로 판매되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진 못했다.
그린버그는 1983년 모바도를 인수하고 대표 모델로 뮤지엄 시계를 선택한 후, 천문학적인 금액을 광고에 투자하여 뮤지엄 다이얼을 모바도의 아이콘으로 만들어 나갔다. 1987년에는 '모바도 뮤지엄 디자인 국제 회사'를 설립하여 벽시계, 탁상용 시계, 문구, 악세서리, 가방, 쥬얼리와 피혁 제품까지 만들어 모바도 상점은 물론 백화점에도 납품했다. 1988년에는 뉴욕에 모바도의 전제품을 판매하는 전용 상점도 문을 열었다. 그리고 모바도를 계기로 'Wings'라는 고급 피혁 제품을 생산하던 회사까지 인수하여 시계에서 패션 제품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판매 제품의 다변화도 시도하게 된다.
1990년대는 미국을 벗어나 아시아, 라틴 아메리카와 유럽에도 진출하며, 1995년에는 제품의 가격대를 낮추기 위해 'Esquire'라는 염가 브랜드를 출시했고 이후 'ESQ'로 간략화 하게 된다. 1993년에는 투자를 늘리기 위해 주식을 공개하게 되며, 1996년에는 그룹의 이름을 '북미시계회사'에서 '모바도 그룹'로 변경하며 계속해서 성장중이다.
현재까지도 모바도 그룹의 시계들은 대부분 쿼츠 시계이다. 스위스 브랜드들이 기계식 시계와 쿼츠 시계의 선택의 기로에서 우왕좌왕하며 일본의 세이코, 시티즌, 카시오에게 미국 시장을 빼았기던 시절 그린버그는 스스로 데릴리움을 기획하여 스위스제 쿼츠 시계를 일본 시계들과 차별화시켜 최고급 시계로 만들었다. 이어 숨어 있던 보석이었던 '호윗의 뮤지엄 디자인'을 회사를 대표하는 아이콘으로 성장시켜 쥬얼리와 패션 제품으로 영역을 확장하며 미국시장을 지배했던 것이다.
그린버그가 파산한 스위스 브랜드인 콩코드와 모바도를 통해 성장을 거듭하는 사이 스위스의 시계 브랜드들은 대부분 파산하여 스와치 그룹으로 통합되었다. 1978년 그린버그가 ETA에 제안했던 '세계에서 가장 얇은 쿼츠 시계' 기술로 그린버그는 최고가의 시계인 데릴리움을 만들었지만, ETA는 1983년 그때 개발한 기술로 일본과 홍콩에서 제조되는 플라스틱제품들과 경쟁하기 위해 가장 저렴한 스와치(Swatch)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
그린버그에게 천문학적인 성공을 가져다 준 뮤지엄의 제품화를 거절했던 바쉐론 콘스탄틴은 1987년 쿼츠 시대가 끝나갈 무렵 파산하여 중동의 투자그룹에게 넘어갔다가 1996년 리치몬트에 인수되게 된다. 1988년에는 그린버그가 미국으로 이주한 후 북미지역 독점판매권을 얻어 이후 콩코드를 인수할 자금을 마련해 주었던 피아제도 리치몬트에 인수되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절망하는 사람이 있다면 도리어 기회를 만나는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린버그가 성공하는 동안 경쟁자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쿼츠 혁명이 진행되면서 그 혁명의 주역들이었던 스위스, 미국과 일본의 대기업들이 모두 스와치 방식의 가장 저렴한 시계만이 살 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린버그는 경쟁자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움직였다. 그들이 염가의 제품만이 살 길이라고 느낄 때 고가의 제품을 팔았고, 그들이 고가의 제품에 집중하자 저렴한 제품을 팔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