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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바와 어큐트론

by 링고

1. 19살의 이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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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년 체코의 프라하에서 18살의 조셉 블로바(1851-1935)가 50센트만 가지고 뉴욕에 도착했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어머니가 잡화점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하는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나 났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보석공방에서 조수로 일하며 일을 배웠다. 뉴욕에 도착한 후 공원 벤치에서 자며 힘들게 지내던 조셉은 시민혁명 후 곤궁했던 미국을 떠나 프라하로 돌아가 가족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미국으로 돌아온 직 후 티파니에서 일자리를 구하게 된다.


티파니가 스위스 제네바에 작은 시계 공방을 만들어 본격적으로 시계를 생산하기 시작한 것이 1861년이고, 당시 가장 발전된 미국의 제조설비를 도입하여 스위스 생산시설을 늘리던 시기가 1874년이었다. 조셉은 이 시기에 티파니에서 보석 세공사로 일했던 것이다.


1875년 티파니를 그만둔 조셉은 미국에 먼저 와 있던 친구로부터 500 달러를 빌려서 맨해튼에 보석 판매와 수리를 하는 상점을 오픈한다. 미국에 온 지 10년째가 되던 1879년에는 미국 시민권을 획득한다. 1883년에는 결혼도 하여 1남 5녀를 키우게 된다. 귀금속을 제조 판매하던 조셉은 어느 정도 자금이 모이자 티파니에서 보았던 시계 제조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1911년 조셉은 J. Bulova & Compnay를 설립하여 보석 제조업에서 시계 제조업으로 변신하게 된다. 이어 조셉은 티파니가 그랬듯이 1912년 스위스 비엔에 무브먼트 제조공장을 설립하여 스위스에서 제조한 무브먼트를 미국에 공급하고, 한편으로는 미국에서 제조한 케이스에 조립하여 다양한 이름으로 판매를 시작했다. 이어 1923년에는 회사의 이름을 'Bulova Watch Company'로 바꾸게 된다.



2. 시계회사 블로바


이 시기에 조셉의 아들 아르데 블로바(1887-1958)가 부사장으로 회사의 경영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조셉이 블로바의 기틀을 만들었다면 블로바를 미국 최대의 시계 회사로 키운 인물이 아들인 아르데였다. 1926년 블로바는 미국에서 처음으로 '현재 몇 시입니다. 블로바'라는 방송 중 시보를 알리는 라디오 광고를 시작했다. 1926년 1차 대전 후 급격히 발전한 비행기의 발전과정을 눈여겨보던 아르데는 뉴욕에서 파리까지 대서양을 논스톱 비행에 성공하는 사람에게 1,000 달러를 지급하겠다는 발표를 하게 된다. 1927년 5월에 린드버그가 33시간의 비행으로 이에 성공하여 블로바에서 약속한 1,000 달러와 기념시계를 수여하자 감사편지를 써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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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착륙 대서양 횡단에 대한 도전은 1919년 뉴욕의 호텔 주인이었던 레이몽 오티그가 상금으로 25,000 달러를 제시하면서 시작되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926년 아르데가 제시한 상금은 린드버그의 성공을 겨냥하여 제시된 적은 금액이었다. 1970년대 모바도의 그린버그가 엄청난 비용을 들여 광고를 시작한 것과 달리 아르데는 최초의 라디오 시보광고 등 적은 비용으로 최대의 광고효과와 이익을 거두었다는 점에서 적은 금액으로 큰 효과를 거두는 광고 방식을 스스로 창안해 내었다는 점일 것이다. 잡지나 신문광고가 보편적이던 시절에 아르데는 라디어와 TV를 활용하고, 언론과 대중의 관심이 집중하는 이벤트에 참여하여 간접광고를 통해 언론을 이용하는 방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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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바는 린드버그로부터 받은 감사편지와 함께 린드버그의 대서양 횡단비행을 기념하는 '론 이글'(Lone Eagle) 시계를 출시하게 된다. 기념시계로는 많은 물량인 5,000개나 제작된 시계로 케이스 백을 열면 강화유리를 통해 무브먼트를 볼 수 있는 구조로 만들어진 최초의 디스플레이 백 손목시계이기도 했다. 1927년에 발매된 5,000개의 시계는 3일 만에 매진되었고, 그 후 5만 개나 팔리면서 당시 소규모 시계회사이던 블로바를 유명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첫 발매 이후 여러 번 디자인을 바꾸어가며 1940년대까지 판매된 블로바의 첫 번째 베스트셀러였다.


린드버그 시계로 유명해진 1927년은 블로바에게는 매우 중요한 한 해였다. 블로바는 미국 주식시장에 상장되었고, 블로바 캐나다가 설립되었다. 그리고 본사를 티파니의 아성인 뉴욕 5번가 38층 건물로 옮기고 건물의 꼭대기에 천문대를 만든다. 마천루의 옥상에 만들어진 첫 번째 천문대였다. 여기서 측정된 천문 시간은 전기적으로 기록되어 회사의 시계공들이 시간을 맞추는 신호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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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8년에는 시계와 라디오를 결합한 세계 최초의 '라디오 시계'를 판매했으며, 1929년에는 자동차용 시계를 창안하고, 1931년에는 전기 클럭을 제조하여 상점, 윈도, 오피스 빌딩, 기차역과 공항에 사용할 전기식 벽시계와 스탠드 시계를 판매하게 된다. 그리고이 무렵부터 1년에 백만 달러 이상을 광고에 투자하게 된다. 1930년대에서 1950년대까지 블로바의 주력상품은 라디오 시계, 벽시계 등 전기 시계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1932년에는 1만 달러의 상금을 내걸고 새로운 시계의 이름을 지어달라는 소비자 참여형 광고도 시작한다. 1940년에는 인기가 높은 20개의 라디오쇼의 스폰서로 참여한다. 1941년 TV에 상업광고가 허용되자 양키즈와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야구 경기중 공수교대 시간에 현재의 시각을 알려주는 광고를 통해 미국에서 최초로 TV 광고를 시작한 시계 회사였다. 이것이 발전하여 이후 '블로바 타임'으로 유명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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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2차 대전이 시작되자 블로바는 각종 군용 시계, 항공기 장비, 휴즈 등을 만들어 미국 정부에 납품하며 실제 제조 가격에 납품하여 이익을 남기지 않는 방식으로 미국 정부에 적극적으로 기여하게 된다. 이 무렵 아르데 누나의 아들인 해리 헨쉘(1919-2007)이 동부 아이비리그의 브라운 대학을 졸업하고 장교로 2차 대전에 참전하게 된다. 헨쉘은 유럽에서 오마르 브래들리 장군의 참모로 근무하며 미국의 마지막 5성 장군인 브래들리와 인연을 맺게 된다.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인 1935년에 창업자인 조셉 블로바가 죽고, 아르데가 사장으로 취임하였다. 그러나 1920년대부터 회사의 실질적인 운영자는 아르데였다. 2차 대전이 종료된 1945년 아르데는 아버지의 이름으로 '조셉 블로바 시계 학교'를 설립하여 2차 대전에서 부상을 입은 상이군인들에게 시계 기술을 가르치게 된다. 이 학교는 상이군인들이 불편 없이 출입할 수 있도록 자동문과 휠체어가 출입할 수 있는 넓은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 시계학교를 졸업하면 미국 보석 협회가 주선하는 1,500개의 일자리에 취업하도록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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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의 전후로 미국 시계 시장이 크게 요동을 치게 된다. 19세기 전반까지 영국과 스위스에서 수입하는 시계에 의존하던 미국에서 1854년 매사추세츠의 월쌈에 설립된 월쌈(Amerca Watch Company)과 월쌈의 운영자와 기술자들이 1864년 시카고 일리노이 엘진에 설립된 엘진(National Watch Company)이 미국을 대표하는 시계 대기업들이었다. 그리고 1892년 펜실바니아에 고급 시계를 제조하는 해밀턴(Hamilton Watch Company)이 설립된다. 이들 외에도 백화점에 납품하는 일리노이, 햄프든, 뉴헤이븐, 사우스 벤드, 워터베리 같은 중소형 시계회사들이 차례로 등장하여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미국은 스위스보다 많은 시계를 생산하는 나라였다.


경쟁자들이 증가하고, 19세기 말부터 1930년대 대공황까지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불황이 연 백만 개 이상의 제조시설을 가지고 있던 월쌈과 일리노이에 어려움을 가중시켰다. 이런 사정으로 19세기 말에 창업한 블로바, 그루엔, 벤루스 등은 미국에서 무브먼트를 제조하는 대신에 스위스에서 무브먼트를 수입하여 미국 내에서 만들어진 케이스와 다이얼을 사용하여 시계를 만드는 방식으로 시계를 만들었다.


세계 2차 대전이 진행된 1940년대는 스위스에서는 손목시계용 자동 무브먼트가 개발되던 시기였다. 2차 대전중 시계 제조를 중단하고 군사장비 제조에 동원된 미국 시계 회사들은 2차 대전 후 손목시계가 보편화되고 자동 무브먼트가 개발되던 시기라 변화된 시장에 적응하기 어려워졌다. 2차 대전이 시작되기 전 월쌈이나 엘진 등 미국 회사들에게는 아직 회중시계 제조가 중심이었고 손목시계는 수동으로만 판매하던 시절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 수동 무브먼트 생산을 위해 생산시설도 보수해야 할 시기에 자동 무브먼트까지 새로 개발하는 것은 무리였다. 블로바, 그루엔, 벤루스 등은 스위스에서 무브먼트를 수입하여 시계를 제조했으므로 전시 동안 전쟁물자 개발에 동원되었지만 전쟁이 끝나도 아무런 영향도 받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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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해밀턴과 엘진도 스위스의 회사를 인수하거나 무브먼트를 수입하는 방식으로 접근하게 된다. 그러나 월쌈은 그동안 주인이 여러 번 바뀌면서 그럴 형편이 되지 못했으므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한편, 이 무렵 해밀턴과 엘진은 2차 대전중 발전한 전기기술을 이용하여 전기시계를 개발하는 일에 몰두하게 된다. 2차 대전으로 피해가 적었던 달러가 강세였으므로 강한 달러를 이용하여 스위스의 회사들을 인수하거나(해밀턴의 뷰렌 인수), 스위스 무브먼트를 수입하여(엘진의 ETA 무브먼트 수입) 스위스에서 개발된 자동 무브먼트를 이용하며 시계를 만들면서 전기 시계의 개발로 전쟁 기간 동안 뒤떨어진 스위스 기술을 따라잡는 것이 가능한 것이 바로 전기시계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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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20세기 초 '달러 시계'로 유명했던 인거솔(Ingersoll)을 만들었던 워터베리(Waterbury Clock Company)가 경영에 어려움을 겪자 2차 대전 중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피신했던 노르웨이의 선박재벌 토마스 올슨과 그의 친구인 조아킴 레뮤클이 이를 인수하여 타이멕스(Timex : 타임즈와 크리넥스의 합성어)를 창업하게 된다. 이후 타이맥스는 2차 대전 동안 미군의 군수물자 생산에 집중하여 연합군이 승리하는 데 역할을 한 이후 전쟁이 끝나자 인거솔이 1달러라는 가격으로 대량 판매했던 방식으로 수리가 불가능한 일회용 시계를 만들어 팔게 된다. 이어 쿼츠 혁명이 진행되자 일본의 쿼츠 무브먼트를 사용하여 대중적인 시계를 만들어 팔면서 2차 대전 후 미국의 염가 시계 시장을 장악하게 된다.


블로바는 해밀턴과 엘진이 집중하는 전기 손목시계 개발에 관심을 가지면서 한편으로는 타이멕스가 장악한 염가 시계 시장에 진출하기 위해 1959년 일본의 시티즌으로부터 무브먼트를 납품받아 카라벨르(Caravelle)를 만들게 된다.


그러나 그 사이 1952년에 개발이 발표된 해밀턴, 엘진-LIP 연합의 전기시계가 출시되고, 너무 서둘러 발표되느라 성능에 문제가 있었던 전기시계들을 밀어내고 저렴한 쿼츠 기술이 개발되기 전까지 블로바에 전성기를 가져다준 어큐트론의 발매로 해밀턴은 전성기를 누리게 된다.



3. 해밀턴의 벤츄라와 블로바의 어큐트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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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전기시계 개발을 발표했던 해밀턴은 1957년 첫 번째 무브먼트인 해밀턴 500에 대한 수리 매뉴얼도 제대로 만들지 못한 상태에서 호텔에 기자들을 모아 세계 최초의 전기 시계의 판매를 발표하게 된다. 수백 명의 기자들이 이에 대한 기사를 썼고, 벤츄라로 대표되는 해밀턴의 전기시계가 등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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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 직후인 1946년 미국의 해밀턴과 엘진, 프랑스의 LIP와 독일의 융한스에서 이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고, 기존의 기계식 무브먼트의 구성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태엽 대신에 수은전지를 사용하여 밸런스에 전기적인 자극을 가하여 밸런스를 진동시키는 방식이었다. 그 결과 기계식 시계(2~5 헤르츠)와 비슷한 2.5 헤르츠로 진동했다. 즉, 배터리를 사용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기계식 시계보다 아무런 장점도 없었다.


엘진과 LIP에서도 1952년 전기시계의 개발을 발표했으면서도 이런저런 문제로 공식 출시는 지연되고 있었다. 그러나 경쟁자들을 의식한 해밀턴에서 1957년 서둘러 발표한 것이었다. 이 시계들은 발표되자마자 대부분 고장이 나서 판매점과 서비스센터로 되돌아왔으나 수리 매뉴얼조차 없던 탓에 수리조차 불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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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미국 최고의 가수였던 엘비스가 영화에 출연하며 이 시계를 사용했고, 공연 중에서 이 독특하게 생긴 시계를 착용하면서 현재까지도 '엘비스의 시계'로 유명한 것이 벤츄라와 후속 모델인 페이서(Pacer)이다. 제너럴 모터스의 자동차들을 디자인한 리처드 하비브의 독특한 디자인 때문에 엘비스가 사용하면서 유명해져 출시 당시에는 베스트셀러였다. 그러나 품질문제로 팔리지 않자 해밀턴은 투자비를 회수하기 위해 일본 리코(Ricoh)의 상표를 통해 일본에 판매하려다 실패하게 된다.


해밀턴에서 잦은 고장을 해결하기 위해 1961년에 개발한 것이 해밀턴 505 무브먼트이다. 그리고 이 무렵에는 수리 매뉴얼도 만들어졌고 고장도 적었지만 출시 후 몇 개월도 못되어 고장 난 다는 악명이 자자했던 해밀턴의 전기 시계는 소비자들의 외면을 받게 된다. 1963년까지 총 11,000개를 판매하는 데 그쳤다.


해밀턴의 악명으로 인해 해밀턴과 비슷한 시기에 전기시계를 개발했으나 발표가 뒤졌던 미국의 엘진과 프랑스의 LIP에 의해 발표된 전기시계들도 큰 인기를 끌지 못한 채 사라지게 된다.


완벽한 준비를 거쳐 1960년에 발표된 블로바의 어큐트론은 해밀턴의 실패 뒤에 등장하여 전기시계보다 더 정확하고 고장도 없다는 이유로 10년 이상 최고급 시계의 대명사로 블로바를 지탱해주는 최고의 상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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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큐트론은 전기 시계가 발표된 지 3년 후 1969년의 쿼츠 시계에 9년 앞서 등장한 전자시계이다. 해밀턴처럼 배터리를 사용하지만 튜닝 포크를 진동시키기 위해 처음으로 트랜지스터가 사용되었으므로 전기시계가 아닌 전자시계였다. 배터리로 밸런스를 진동시키는 전기시계의 진동수에 비해 트랜지스터로 음차를 진동시켜 2.5 헤르츠의 진동수를 가져 전기시계보다 정확한 하루 오차 2초 이내로 기계식이나 전기식 시계들과 비교할 수 없는 정확성을 가진 시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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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계는 스위스 바젤 출신의 막스 헷젤(1921-2004)에 의해 탄생하게 된다. 1921년 바젤에서 태어난 헷젤은 어려서부터 자전거 라이트, 발전기는 물론 라디오와 전화기는 물론 렌즈를 갈아 망원경까지 만들 정도로 손재주 뛰어난 소년이었다. 취리히의 기술대학을 졸업하고 1950년에 전기 엔지니어로 비엔에 있던 블로바에 취업하게 된다.


블로바는 1919년에 스위스의 비엔에 공장을 설립하여 무브먼트를 제조하고 있었다. 블로바는 공장 설립 이후 미국의 최신 기계들을 도입하여 부품들의 호환성을 높이고, 생산비를 절감하기 위해 자동화를 연구했다. 막스 헷젤은 블로바의 생산시설 자동화를 위해 영입한 전기기술자였다. 그러나 1952년 해밀턴에서 전기시계 개발에 대한 발표가 있자, 블로바 비엔 공장에서는 전기기술자인 막스 헷젤에게 전기시계를 개발할 것을 주문하게 된다.


그러나 해밀턴, 엘진과 LIP에서 개발하는 전기시계가 기계식 시계의 밸런스를 그대로 사용하는 구조이므로 기계식 시계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다고 판단한 막스 헷젤은 자신이 대학 졸업 후 연구했던 튜닝 포크(Tunning Fork : 메트로늄처럼 일정한 진동을 전기적으로 발생시키는 장치)를 사용한단 다면 기계식 시계와 전기시계보다 훨씬 정확한 시계를 제조할 수 있다는 보고서를 제출하게 된다.


당시 블로바의 사장이었던 아르데 블로바는 당시 미국에서 개발된 새로운 트랜지스터들을 보내주며 헷젤이 제안한 튜닝 포크 시계를 개발할 것을 지시하게 된다. 새로 개발된 트랜지스터와 소형 튜닝 포크를 결합하여 튜닝 포크 방식의 무브먼트를 개발한 막스 헷젤은 시계의 기본 구조에 대해 1953년 6월에 특허출원을 하게 된다. 그리고 튜닝 포크 시계의 프로토 타입을 개발한 것이 1954년 11월이었다.


1954년 비엔의 공장을 방문했던 부사장 헨쉘은 막스 헷젤의 손목에서 성능을 확인 중이었던 프로토 타입을 받아 뉴욕으로 돌아오게 된다. 그 사이 막스 헷젤은 7개의 프로토 타입을 추가로 만들어 테스트 중이었으나 회사의 정책이 변경되어 튜닝 포크 손목시계 개발은 전기 시계 제조에 익숙했던 미국의 연구소로 이전되게 된다. 이런 과정을 거쳐 1959년까지 미국의 전기 기술팀에서 100개의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문제점을 점검하게 된다. 그러나 미국의 개발팀에서 만든 프로토 타입은 막스 헷젤이 만든 프로토 타입에 비해 성능이 형편없었다.


자신이 개발한 아이디어의 제품화에서 소외되어 좌절감을 느끼던 막스 헷젤은 1959년 3월에 미국의 본사로 초빙되었으나 미국에서 개발한 프로토 타입들을 수리하고 진단하는 작은 일만 맡게 된다. 결국 막스 헷젤에 의해 무브먼트에 사용된 오일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문제를 해결하고 양산 준비에 들어가게 된다. 첫 번째 어큐트론 무브먼트인 블로바 214가 완성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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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958년 아르데 블로바가 죽자 조카인 해리 헨쉘(1919-2007)이 사장이 되면서, 자신이 모시던 미국 합참의장 출신의 오마르 브래들리(1893-1981)를 이사회 회장으로 영입하게 된다. 오마르 브래들리를 통해 미국 정부와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진 블로바는 양산 준비가 마무리된 어큐트론의 트로토타입들을 NASA에 제공하여 당시 진행 중이던 인공위성과 우주개발에 제공하게 된다.


Installing_Explorer_VII.jpg 인공위성 익스플로러 7


1959년 인공위성인 익스플로러 VI와 VII에 장착되어 지구 괘도를 도는 등 어큐트론은 시장에 공개되기도 전부터 NASA에서 사용되었다. 이후에도 어큐트론은 미국 우주개발계획인 익스플로러, 머큐리, 제미니, 아제나와 아폴로 계획까지 지속적으로 사용되게 된다.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가 아폴로에 사용되어 달에 처음 착륙한 '문와치'라면 어큐트론은 프로토 타입이던 시절부터 미국의 모든 우주계획에 참여해 온 '스페이스 와치'인 것이다.


1960년 10월 25일 블로바의 신임 회장이자 은퇴한 합창의장인 오마르 브래들리가 공식적으로 어큐트론의 발매를 발표하게 된다. 미완성인 상태에서 출시되었던 전기시계와 달리 1961년부터 판매를 시작한 어큐트론은 완성도가 높아 출시되자마자 미국 시장에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어큐트론(Accutron)은 블로바에서 선전용으로 만든 문구인 'Accuracy through Electronics'에서 정확성의 Accu와 전자의 Tron을 합성하여 만든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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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닝 포크의 초당 360 헤르츠의 진동수가 가청 주파수여서 귀에 대고 들으면 이 시계에서 '붕'하는 미세한 소리가 났으므로 기계식 무브먼트나 전기 시계와는 다른 개성을 가진 그야말로 신비로운 시계였다. 더구나 기계식 무브먼트나 전기식 무브먼트와 달리 밸런스휠을 사용하지 않는 구조였으므로 충격에 강했고 기계식 시계의 2-5 헤르츠, 전기식 시계의 2.5 헤르츠 보다 훨씬 빠른 360 헤르츠로 진동하는 구조였으므로 기계식 시계나 전기식 시계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정확성을 유지했던 것이다.


어큐트론 모델 중 가장 유명한 모델이 '스페이스 뷰'(Space View)라는 모델이다. 이 모델이 공식적으로 출시되게 된 에피소드가 매우 흥미롭다. 튜닝포크를 사용하는 전자식 시계라는 점을 보여주기 위해 판매점의 쇼윈도에 진열할 목적으로 다이얼 대신에 유리에 어큐트론의 이름과 시간과 분을 표시하는 마크를 표기한 진열품을 만들어 진열했다.


그러나 처음 보는 독특한 무브먼트가 유리를 통해 보이는 진열제품을 구입하고 싶어 하는 소비자들로 인해 판매 제품보다는 진열제품이 판매되는 기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진열제품과 같은 유리를 사용하고 정상적인 다이얼과 투명 유리를 부속품으로 제공하는 '스페이스 뷰'라는 이름을 가진 모델이 출시 직후 발매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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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에 바젤 페어에 전시되고 미국에서 시판된 어큐트론은 블로바의 역사상 최고의 베스트셀러였다. 1963년까지 10만 개가 판매되고, 1965년에는 35만 개가 판매되었으며, 1977년 생산이 중단될 때까지 총 550만 개나 판매되었다.


어큐트론의 발매를 시작한 1961년에서 1970년대 초까지 블로바는 어큐트론으로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회사로 성장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시기에 스위스와 일본에서 어큐트론의 정확성과 안정성을 뛰어넘을 쿼츠 기술이 개발되고 있었으나 성공에 도취한 신임 사장 헨쉘은 삼촌인 아르데와 같은 사업 감각도 사업적 열정도 없었다. 어큐트론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어 쿼츠 개발에 투자할 여유 자금을 가진 스위스와 일본에 비해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지만 새로운 기술개발에 아무런 투자도 하지 않은 채 곧바로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4. 블로바의 몰락


한편, 자신이 발명한 어큐트론에도 불구하고 블로바에서 푸대접을 받던 막스 헷젤은 1963년 블로바를 사직하고 에보슈 S. A.로 옮기게 된다. 그리고 자신이 계속 근무했으면 블로바에서 개발했을 어큐트론의 후속 무브먼트들을 에보슈 S. A.에서 개발하게 된다. 그러나 기본적인 원리는 동일했으므로 블로바에서 자신이 신청했던 특허권을 침해하게 되자 1968년 에보슈 S. A.는 블로바로부터 특허 사용권을 얻어, 막스 헷젤이 새롭게 발전시킨 어큐트론을 '스위소닉(Swissonic)이라는 이름으로 발매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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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2년에는 어큐트론을 이용한 크로노그래프도 개발하게 된다. 막스 헷젤이 개발한 스위스제 어큐트론은 에보슈 S.A.에서 '모사바(Mosaba)'라는 명칭으로 판매되어 오메가, 론진, 티솟, IWC, 보메 마르시에 등에서 완제품 시계를 발매하게 된다. 이로써 블로바에 밀렸던 스위스는 쿼츠 기술을 개발하는 동안 막스 헷젤이 개발한 고급한 구조의 모바사 어큐트론을 통해 블로바에 대한 경쟁력을 회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아르데에 이어 블로바의 사장이 된 헨쉘은 대학시절 육상선수로도 이름을 날렸고, 명문대학 출신에 전쟁영웅이자 미국 최대의 시계 업체 사장으로서 사회활동에 열중했다. 그러나 아르데와 같은 사업적 감각이나 회사를 키우려는 열정은 없었다. 그 결과 막스 헷젤은 어큐트론이 발매된 후 블로바를 떠나 스위스의 에보슈 S.A에서 이를 발전시키게 되고, 어큐트론의 승리에 도취된 헨쉘은 스위스와 일본에서 본격적으로 연구 중이던 쿼츠 무브먼트나 시계 개발에는 관심이 없었다.


1969년 세이코가 쿼츠 시계를 발표한 후에도 대량생산에 어려움을 겪던 쿼츠 기술이 급격히 발전한 것이 1974년부터이다. 헨쉘은 1976년 어큐트론에 쿼츠 진동자를 추가한 복잡한 어큐쿼츠를 발표한 것 외에 쿼츠 무브먼트는 개발하지 않았다. 그 결과 디자탈 방식의 저렴한 쿼츠 시계들이 등장하자 어큐트론의 인기가 급격히 하락하며 1980년 어큐트론의 제조가 중단되었다. 또한 블로바의 주력제품이 된 어큐쿼츠는 어큐트론의 구조에 쿼츠 진동자를 추가하여 무브먼트가 복잡해짐으로써 제조단가만 올라가 가격경쟁력을 잃어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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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큐트론으로 엄청난 이익을 얻었던 헨쉘은 이 자금을 기술개발에 사용하기보다는 사회활동에 투자하여 명성을 얻고, 경마를 즐기고, 정치계를 기웃거리는 일에 몰두했던 것이다. 헨쉘은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을 지지하며 대통령 선거에 참여하는 등 정치에 오랫동안 관심을 가졌다. 경마에 흥미를 느껴 플로리다에 거대한 목장을 구입하여 여러 마리의 명마를 키우기도 했다. 전기시계에서 실패한 해밀턴이 1970년 LED 방식의 최초의 쿼츠 시계 '펄사(Pulsar)'를 발표했을 때에도 디지털 시계를 일시적인 유행으로 보며 무시했고, 쿼츠 개발에는 전혀 참여하지 않았다.


1974년 아르데의 후임으로 취임했던 브래들리 사장이 은퇴하자 헨쉘은 사장에 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가 취임한 이듬해인 1975년 블로바는 막대한 손실을 기록했다. 이후, 블로바는 미국과 홍콩의 여러 회사들 M&A의 타깃이 되었다. 이에 대한 책임을 지고 헨쉘은 1976년 사장직을 사임하고 회장으로 물러나게 된다. 그러나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 블로바는 1979년 투자회사인 로우스 코포레이션(Loews Corporation)으로 넘어가게 된다.


회사에서 물러난 헨쉘은 '조셉 블로바 시계 학교'만은 어떻게든 유지해 보려고 노력하지만, 아르데가 1945년 아버지 조셉의 이름으로 세웠던 시계학교도 2000년에 결국 문을 닫게 된다.


헨쉘은 2007년 신장과 심장병의 복합적인 원인으로 뉴욕의 자택에서 88세로 사망했다. 로우스 코포레이션은 그 후 약 30여 년 동안 블로바를 운영했다. 그러나 극장이나 건물을 구입하여 리모델링하여 재판매하면서 이익을 얻는 방식의 사업에만 익숙했던 로우스 코포레이션에서의 블로바는 더 이상 경쟁력이 있는 시계회사가 아니었다. 로우스 코포레이션은 새로운 기술개발보다는 제조가 중단되었던 어큐트론의 재생산 등으로 블로바의 명성을 이용하여 당장의 이익을 얻는데 집중했다. 이어 블로바의 자산들을 하나 둘 팔아 투자금을 회수한 1990년대 이후 홍콩의 회사들에 블로바 상표의 라이선스를 제공하여 돈을 벌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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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선스를 체결한 홍콩에서 롤렉스와 가장 비슷한 디자인의 시계를 블로바의 상표로 제조 판매하면서 블로바는 미국 최고의 시계회사에서 롤렉스 짝퉁이나 다름없는 홍콩제 시계를 판매하는 저급한 이미지로 전락하게 된다. 블로바의 마지막 사장 헨쉘이 사망한 이듬해인 2008년 일본의 시티즌이 로우스로부터 블로바를 인수하여 일본 시티즌 소속의 브랜드가 되었다.


로우스에 인수되어 30여 년이 지나는 사이 아르데 블로바가 탁월한 사업 감각과 엄청난 광고비를 투자하여 몇십 년에 걸쳐 만들었던 미국 최고의 시계회사였던 이미지는 모두 사라져 버렸다. 2008년 이후 시티즌은 블로바 어큐트론의 이미지를 활용한 새로운 시계들을 주기적으로 발표하고 있다. 그러나 15년이 지난 지금도 1960년대 어큐트론을 발매하며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회사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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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바가 만든 어큐트론은 스위스의 고급 시계들만 판매하던 티파니에서도 판매되었다. 시계 역사 300년 동안의 가장 중요한 발전이라는 설명과 함께... 조셉 블로바가 미국으로 이민온 직후 가난한 시절에 근무하는 동안 자신이 설립한 회사가 만든 시계가 파텍 필립과 나란히 진열되어 팔리는 일은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티파니에서 만든 14K 솔리드 골드 머니 클립과 결합되어 IBM 등 미국 대기업 임원으로 근무하다 퇴직하는 임원급 퇴직자들에게 선물로 증정되었던 티파니의 고급스런 어큐트론 머니 클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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