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나는 몇 살이지? 오십몇 쯤 되겠는데? 뭐, 괜찮아 선생님은 분명 귀여운 아줌마가 될 거니까. 그때쯤 되면 너희도 나도 지갑이 빵빵할 테지만 그래도 우리 같이 떡볶이를 먹으러 가자. 대신 치즈를 왕창 뿌리고 소시지랑 베이컨도 잔뜩 넣고 피카츄도 한 열개쯤 튀겨달라고 하자. 그리고 내가 사주려고 하면 너희가 내 앞을 막으면서 멋지게 계산을 하는 거지. 나는 그럼 머쓱하게 코를 쓱 만지면서 아이고 다 컸네, 하고 웃을게.
그리고 같이 졸업앨범을 보는 거야. 잊고 지냈던 이름들을 하나하나 짚어보면서 이런 일도 있었고 저런 일도 있었지- 하고 웃다가. 내가 다들 어떻게들 지냈냐고 물어보면 너희가 쌓아온 이야기들을 차근차근 들려줄래? 벌써 기대된다. 너만의 이야기 안에서 너무 찬란한 주인공으로 거듭난 네 모습을 보면서, 어느새 나보다 더 멋진 길을 걸어낸 너를 보면서, 얼마나 대견할까? 쌤은 벌써 울 것 같은 기분이야.
솔직히 사실 조금 무섭기도 해. 네가 아프면 어떡하지. 분명히 아플 텐데. 네가 아픈 이야기들을 담담히 풀어놓으면, 그때 나는 네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
아무리 선한 마음으로 세상을 대하려 해도 누군가의 악의에 부딪혀 세상이 미워지는 날들이 있을 텐데. 알 수 없는 불안함과 초조함이 네게 들러붙어 평생 사라지지 않을 것 같은 기분도 찾아올 텐데. 하루 종일 울어도 떨쳐지지 않는 부정적인 마음들이 너를 야금야금 잡아먹어 잠 못 드는 밤들이, 네게도 있을 텐데. 무심하고 모진 말들 속에서 어느 순간 너 자신을 미워하고 있는 너를 발견하거나, 사랑하는 사람이 아파하는 모습을 그저 지켜보며 무력한 스스로를 탓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이 올 텐데.
내가 꼭 더 멋진 어른이 되어야겠다. 그래서 삶의 한 때를 앓고 있는 네게 힘이 쭉 빠지는 그런 말 대신 너를 꼭 안아줄 수 있는 말들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 악의를 가진 사람들은 원래 어디에나 있기 마련이라는 그런 말 대신, 네 선한 마음에 끌린 선한 사람들로 곧 네 세상이 가득 차게 될 거라고. 어차피 다들 욕심과 박탈감 따위에 잡아먹히며 살게 된다는 한탄 대신, 네가 얼마나 많은 멋진 것들을 가지고 있는지 자꾸자꾸 이야기하며 네가 널 사랑할 수 있도록. 산다는 건 어쩌면 어쩔 수 없음의 연속이라는 흔한 투정 대신, 그 속에서 우리가 주고받는 이 마음들이 그렇기에 더 찬란하지 않냐고. 그런 말들을 해줄 수 있으면 좋겠어.
내가 세상을 그렇게 믿어야 네게 그렇게 말해 줄 수 있을 테니까. 나는 더, 더 많이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
반짝이고 찬란한 순간은 갈수록 점점 찾기 힘들어지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모두가 모든 불행을 안고 살아내고 있는 것 같다고. 우리가 도착할 수 있는 낙원은 결국 없는 걸까. 사실 미래의 고민들은 늘 의외의 장면에서 태어나고, 현재의 고민들은 의외로 결국 별 것 아닐 때가 많잖아. 과거의 내가 무겁게 지고 있던 고민들이나 신중히 고른 선택지들을 돌아볼 때면, 늘 부끄러움에 잠겨버리곤 하거든.
물론 네가 아프지 않았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우리가 아파하는 시간들이 의미가 없다는 건 아니야. 저 멀리 밀어두고 모른 척한다거나, 무작정 도망치라고 하고 싶지는 않아. 몰아치는 고민 속에서 힘주어 똑바로 걸어보는 경험은, 분명히 우리가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도록 해주는 힘을 줄 테니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 들어봤지? 다들 알고 있는 말이겠지만, 실패를 진짜로 사랑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들은 많지 않아.
그러니까 아픈 날이면 꼭 선생님을 찾아와. 물론 수학 시간에 틀린 문제를 가져온 너에게 멋지게 정답을 알려주던 어제처럼, 삶이라는 문제의 정답을 콕 집어 알려줄 수는 없을 테지만. 그래도 우리가 좋은 어른이 되어 있다면 분명 우리는 서로를 안아주는 이야기들을 주고받을 수 있을 거야. 진심은 항상 가장 강하니까. 그 안에 담긴 진심들이 한번 더 힘을 낼 수 있게 해 주리라고 믿어. 선생님의 선생님이 선생님을 안아줬던 그날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