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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지 Jul 29. 2022

다시 펴볼 일 없는 계획표

생각 대청소하기

 계획을 세우는 일을 좋아한다. 틈만 나면 아무거나 빈 종이를 한 장 꺼내어 아무렇게나 칸을 띡띡 나누어 놓고 목표들이나 계획들을 생각 나는 대로 죽죽 적어본다. 몇 번이고 계획을 세우는 모습을 보면 누군가는 내가 상당히 꼼꼼하고 체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텐데, 사실은 오히려 정 반대인 사람이라 그렇다. 꼼꼼한 사람들은 계획을 세우고 나면 그 리스트를 실천하면서 하나하나 체크하고 지워나가던데, 불쌍한 내 계획표는 한번 완성되고 나면 다시 펼쳐지는 일이 없다.


 아니 그럴 거면 왜 계획표를 자꾸 쓰냐고? 사실 나도 그게 우습다. 무언가 마음을 먹은 그 순간에는 분명 잔뜩 마음이 부풀어서 열심히 계획들을 적었는데, 안타깝게도 그 설렘이 가득 담긴 종이는 꼭 며칠 후 어딘가 처박혀 꾸깃해진 채로 발견되곤 했다.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버려진 영수증과 함께, 가방 안에서 화장품이 잔뜩 묻은 채로, 오랜만에 펼쳐본 책에 책갈피 대신, 갑자기 부엌 서랍장 첫 번째 칸에서(아직도 이유를 알 수가 없다). 그리고 그걸 발견할 때마다 나는 내 이마를 딱 때리며 아 맞다! 이렇게 살기로 했었는데! 를 외치고는 혼자 실패한 기분에 쌓여 시무룩해지고는 했다.


 그리고 요즘은 그냥 그런대로 살기로 했다. 심지어 가끔은 애써 빡빡하게 정리한 계획표를 완성하자마자 종이 쓰레기에 톡 넣어버리기도 한다. 나에게 계획표는, 계획을 세우는 그 순간에 의미가 있다.



 어떤 느낌이냐면, 일주일에 한 번씩 대청소를 하는 사람과 한 달에 한 번만 대청소를 하는 사람이 있다고 치면 둘 중 누구의 집이 더 깨끗할까? 단순히 생각하면 당연히 앞 친구의 집이 깨끗할 것 같지만, 사실 그 친구는 평소에 정리정돈과는 거리가 멀고 물건을 쓰고 난 후 제자리에 두지 않아서 일주일에 한 번은 대청소를 '해야만' 하는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렇다! 내 이야기다. 우리 집 청소 상태에 관한 이야기도 물론 맞고, 내 머릿속 상태에 대한 설명이기도 하다.


 내 머릿속은 꽤 산만하고 무질서하다. 할 일들은 늘 엉켜있고, 해야 할 말들은 꼭꼭 숨어버리고, 갑자기 튀어나온 생각들이 여기저기서 춤을 추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 아무렇게나 뻗어나가는 생각들과 여기저기로 새어나가는 관심사들이 꽤 즐거워서 그냥 그러도록 두는 편이다. 엉망으로 어질러진 머릿속 세상은 그것대로 꽤 흥미로우니까. 그래서 그냥 가끔 대청소하듯 종이에 차르르 정리 정돈을 해보는 걸로 만족해야지. 계획표를 몇 번이고 다시 들여다보며 생각들이 제 자리에 잘 있는지 확인하는 건 자신이 없으니까. 그냥 제멋대로 둥둥 떠다니도록 놔두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집 청소는 좀 열심히 해야 할 것 같긴 하지만, 머릿속 세상에서까지는 이대로도 뭐, 괜찮잖아.


 혹시 이 이야기가 산만한 사람의 변명같이 느껴진다면? 딩동댕. 못 하니까 안 하는 걸로 포장하는 것 같다면, 그것도 딩동댕! 하지만 만약 과거의 나처럼 스스로의 산만함에 괴로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스스로에게 하는 잔소리를 멈추고 나처럼 해보라고 진심으로 추천해주고 싶다. 다시 펴볼 일 없는 계획표를 빼곡히 적어보는 것. 그건 그것 만으로도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똑바로 걸어갈 수 있게 해주는 힘이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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