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식이 코앞인 12월의 어느 월요일. 교과서도 거의 다 끝났고, 머리 아픈 수행평가도 다 끝났다. 초등학교에서는 이미 제일 나이가 많은 왕언니 왕오빠가 된 우리 6학년 친구들은 얼른 졸업하고 중학생이 되기만을 기다리고 있다. 남은 수업에는 크게 미련이 없다. 우리 반에서 가장 활력이 넘치는 재욱이는 원래도 월요병이 심한 친구라 매주 월요일이면 각종 소소한 이벤트를 만들어 나랑 찐하게 상담을 주고받곤 했다.
“아 선생님~ 이거 왜 해요? 3반은 지금 인터스텔라 보던데.”
1교시에는 축구공으로 청소도구함 문짝을 박살내고, 2교시에는 영어 선생님의 속을 뒤집어 놓고 돌아온 우리의 재욱이가, 3교시가 시작하자마자 큰소리로 외쳤다. 6반은 나가서 피구 한다던데- 다른 친구가 한마디 거들고 나니 반 전체가 술렁술렁. 한참 통지표를 작성하느라 피로해진 눈을 꾹꾹 누르며 힘겨운 웃음을 짓던 나는, 순간 욱하고 만다.
“그럼 니가 나와서 수업할래? 그렇게 맘대로 할 거면 학교는 왜 오니?"
순식간에 교실의 공기가 얼어붙는다. 당장 가방 싸서 3반으로 갈래, 아니면 집으로 갈래? 날카로운 잔소리가 쏟아지고 아이들은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내가 너무 심했나 싶은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이내 배신감이 몰아친다. 바로 조금 전 쉬는 시간에 너 나랑 잘해보자며 새끼손가락까지 걸었잖아. 내가 너를 얼마나 다독여줬는데! 그런 마음가짐으로 중학생이 될 수 있겠냐고 한참 고래고래 성질을 내다보니 늘 생글생글 웃음이 넘치던 재욱이의 눈에도 서러움이 비친다. 바짝 기가 죽은 재욱이가 자리에 앉는다.
순간 깨닫는다.
긴장된 공기의 교실이 눈에 들어온다.
아, 내가 또 화를 내고 있었구나.
혼을 내야 했는데.
처음 선생님으로 발령받았을 때는 혼내는 것과 화내는 것을 구분하지 못했다. 화가 나면 혼을 냈고, 혼을 내다보면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아이가 얄미운 말을 하거나 못되게 행동하면 나는 상처받고 속상한 내 마음을 다시 그 아이에게 그대로 전달하곤 했다. 다행인 것은 참 훌륭한 선생님이 바로 옆 반에 계셨다는 것이었다. 레벨 1짜리 초보 교사였던 나는 옆 반을 보며 참 많은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는데, 그중 제일 큰 배움은 바로 아이를 혼낼 때의 마음가짐이었다.
초등학교의 선생님들은 대부분 담임선생님을 맡아 전 과목을 가르치기 때문에, 교무실이 아니라 교실에 본인의 자리가 있다. 그래서 보통은 각자 교실에서 업무를 보다가 잠시 여유 시간이 생기면 학년 연구실에 모여 간식으로 떨어진 당을 보충하고 수다를 떨고는 한다. 하루는 연구실의 분위기가 조금 심각했다. 옆 반 선생님께서는 아주 유명한(?) 친구를 한 명 맡아 매일을 끙끙대고 계셨는데, 그 친구가 고의적으로 선생님을 속이고 끝까지 거짓말을 하다가 자기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선생님을 향해 심한 욕을 하고 물건을 집어던진 것이다.
자초지종을 듣고 나는 경악을 하며 선생님을 위로했다. 듣는 내가 다 울화가 치밀고 속이 상해서 당장 그 아이를 불러다 앉혀놓고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 주고고 싶었다. 어른을 깔보는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 화가 나서 겁을 주고 기를 죽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하지만 옆 반 선생님은 조금 달랐다. 선생님께서는 눈물을 닦으시고는 어떤 말을 해주면 좋을까를 고민하셨다. 어떻게 해야 그 친구의 코를 납작하게 해 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해야 아이가 어른에 대한 적대감을 지우고 올바른 소통을 시작할 수 있을지를 고민하셨다. 상처에 잡아먹히고 있던 나는 선생님의 모습에 꽤 큰 충격을 받았었다. 당신의 감정보다 아이를 먼저 생각하실 수 있는 그 힘이 참 거대하게 느껴졌다.
좋은 선생님이 되려면 상처받은 순간에도 내 감정은 지울 수 있어야 한다. 그저 아이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이 아이가 더 좋은 사람으로 성장하려면 어떤 말이 필요한지만을 고민할 수 있는 것. 선생님은 상처를 주고받는 사람이 아니다. 상처를 주는 행동을 바로잡아주는 사람.
쉽게 될 리가 없다. 미움은 너무 흔한 감정이고 내 안에서 그 부분만을 깔끔하게 도려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나는 것, 누군가를 좋거나 싫다고 느끼는 것은 분명 인간적인 감정이지만 선생님에게는 이런 감정들이 참 위험하다. 매 순간 끊임없이 옳고 필요한 방향으로 감정을 붙들어 매야한다. 화난 표정과 목소리를 적절히 사용해서 지도를 하는 것과, 차오른 분노를 그대로 쏟아내는 것은 결과가 분명 다르니까.
내가 잘 해내고 있나 생각하면, 역시 나는 여전히 한참 어리석고 부족하다. 결국 오늘처럼 이렇게 진짜로 화가 난 모습을 너희에게 보이는 날이면 남은 하루는 온통 그 생각으로 괴롭다. 그래도 다시 한 번 이 고민을 꺼내보며 적어도 까먹지는 않도록 다짐하고 다짐해본다. 완벽한 선생님이 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완벽한 선생님을 위해 늘 애쓰는 선생님 정도는 될 수 있을 테니까.
12월. 사실 선생님도 교과서에는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손바닥 모양으로 자른 색지를 벽에 붙여 커다랗게 만든 크리스마스 벽 트리. 마치 너희처럼 알록달록 발랄하게 예쁜 손바닥들을 하나하나 걸어두고는 한참을 쳐다보았다. 방학을 손꼽아 기다리면서도 막상 너희를 보낼 계획을 세우는 것이 내키지 않아 남은 시간이 그저 막연하기만 하다. 30장의 편지를 쓰고 특별한 졸업 선물을 준비하면서, 잊을 수 없는 선생님으로 남기 위한 노력을 하느라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가도, 교실을 정리하고 새 학기 물품을 준비하다 보면 너희를 잊을 준비를 동시에 하는 것 같아 묘한 서러움이 솟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