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어내는 일에 대하여
요 며칠 열심히 뮤직비디오를 만들고 있다. 처음으로 프리미어 프로 사용법도 배웠다. 이미지를 편집하는 대표 프로그램이 포토샵이라면 프리미어 프로는 영상 편집의 기본 중의 기본 프로그램. 유튜버가 된 지 3년 만에 드디어 본격적인 영상 편집의 세계로 발을 들였다.
아이러니하게도 유튜브를 가벼운 마음으로 하기로 마음먹고 나니 오히려 배움이 두렵지 않다. 3년 전 휴대폰으로 대충 찍어 올렸던 영상으로 얼렁뚱땅 유튜브를 시작하게 된 후, 약간의 부담감 속에서 나는 영상을 내가 직접 편집하기보다는 전문가에게 맡기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특히 단순 커버 영상에서 벗어나 음원을 발매하고 공식 유통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게 되면서부터는 더더욱 감독님들께 모든 작업을 믿고 맡겨왔다.
그리고 지금. 1년 정도를 쉬어가는 동안 유튜브는 다시 나의 소박한 일기장이 되었다. 어깨너머로 보고 배운 것들로 내 놀이터를 마음대로 꾸며 볼 때가 된 것이다. 첫 곡으로 '잘 지내'라는 곡을 만들고 1년 동안 어떻게 지냈는지 안부를 전하는 뮤직비디오를 만들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친구에게 프리미어 프로 기초 수업을 반짝 듣고 새 프로젝트에 노래를 먼저 얹었다. 자 이제 여기에 어떤 영상을 입혀볼까.
재미있게도 영상을 편집하는 일은 대체로 무언가를 덜어내는 과정이었다. 1년 간의 안부를 담아내기 위해서 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은 1년 치 사진첩을 쭉 다시 보는 것이었는데, 그냥 한번 쭉 훑어보기만 했는데도 몇 시간이 걸렸다. 나는 평소 사진이나 영상을 즐겨 찍지 않는 사람인데도 1년이라는 시간은 사진첩에 재미있는 순간들을 가득 쟁여두기 충분했다. 이 때도 좋았고, 이 때도 행복했는데. 다 담으면 한 시간은 훌쩍 넘겠는걸? 내 노래는 고작 3분밖에 안되는데. 그러니까, 문제는 무엇을 골라 담을까가 아니라 대체 무엇을 뺄 수 있을까부터 시작이었다.
덜어내고 덜어내도 마음에 드는 것들이 너무 많다. 이것도 좋고 저것도 좋고, 좋은 것들을 말하는 건 너무 쉬운데. 그 중 버릴 것들을 고르는 일은 뭐든지 어렵기만 하다. 덕분에 '잘 지내'의 뮤직비디오는 말 걸듯이 편안하게 흐르는 노래와는 다르게 아주 호흡이 빠르고 많은 글과 사진이 빽빽하게 정신없이 지나가는 영상이 되어버렸다. 나는 왜 뭐가 맨날 아깝고 아쉬울까.
정교사를 그만 두었다는 말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쉽지 않느냐고 묻는다. 후회하지 않으세요? 하는 질문을 천 번은 받은 것 같다. 공무원이 최고라고 치는 요즘 시대에. 피 터지게 공부해서 합격한 임용고시는 또 어떻고. 그러면 나는 활짝 웃으면서, 후회는요! 너무 행복해요. 저는 이러이러한 꿈이 있는걸요, 라고 답한다.
거짓말. 걱정해주시는 분들께 죄송하지만 반쯤은 거짓말이다. 그냥 저렇게 주문을 외우며 걸어가야 내가 고른 선택지가 정답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외치는 기분. 하지만 솔직히 어떤 결정을 해도 후회하지 않았을까? 내 삶에서 무엇을 버리고 덜어낼지를 골라야하는 순간이었으니까. 분명 무얼 골라도 아쉬웠겠지.
초라해져 가는 통장 잔고를 확인할 때나 불투명한 미래 계획을 이야기 할 때는 밀물과 썰물 처럼 후회와 아쉬움이 내 마음에 들어찼다가 쓸려나갔다가를 반복한다. 다만 그럴 때에도 결국 고민의 끝은 같은 결론이다. 그 안정감을 버리지 않으려면 다른걸 버려야 했겠지. 만약 그랬으면 지금 밀물 썰물은 무슨 피눈물을 흘리고 있을 거야.
감독님들과 뮤비 촬영을 할 때면 늘 들었던 말이 있다.
"이렇게도 찍고 저렇게도 찍고 다 찍읍시다. 컷은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이제야 감독님들이 그 수많은 컷들 중 좋은 컷들을 고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쓰셨을까가 상상이 된다. 나야 몇주 후 뚝딱 만들어진 결과물만 확인하면 그만이지만, 최고의 장면만 남기기 위해 감독님은 모든 스태프분들의 고생을 녹여 완성한 소중한 컷들 중 대부분의 컷들을 과감하게 버려야만 했을 것이다.
뒤집어 생각하면 대부분이 버려질 것을 알고도 그 많은 컷들을 찍었다는 이야기다. 내가 만드는 뮤직비디오들은 대부분 촬영 규모가 정말 작은 편이다. 그런데도 요 3분짜리 영상을 위해 촬영 시간은 10시간은 기본으로 넘어간다. 단 1퍼센트만 살아남는 이 혹독한 현장에서 '아 이건 찍어도 안쓸 것 같은데' 하는 생각이 아니라 '쓸 수도 있으니까 무조건 잘 찍어놓자!'하고 생각할 수 있는 힘이 참 대단하지 않은가.
사실 더 좋은 걸 버릴 수록 남아있는 것들은 더욱 빛나는 것들이라는 소리다. 버려지는 것에서 눈을 돌려 가지고 가는 것들을 바라볼 수 있다면, 후회라는 단어에 그렇게 힘을 뺄 필요도 없다. 눈 딱 감고 삭제한 컷들이 당장은 아른거릴지 몰라도 덕분에 더 멋지게 완성된 영상을 보다 보면 어느새 잊어버리고 마는 걸.
하면 좋은 것들이 너무 많다. '하루에 10분만 투자하세요!' 영어 10분, 스트레칭 10분, 피부 관리 10분, 혈액 순환을 위한 마사지 10분. 독서도 10분, 일기도 10분, 가계부도 10분. 이렇게 몽땅 투자하다 보면 사실 하루에 몇 시간 쯤은 건강한 습관 형성에 써야할 테다. 하나하나 살펴보면 도무지 버릴 수 없는 건강한 것들인데다가 심지어 10분 밖에 안 걸린다. 그런데 그렇다고 매일 매일 이렇게 규칙적이고 건강하게 살 자신은 없는 걸.
되어야 하는 좋은 사람의 기준도 너무 많다. 일 잘하고 능력있고, 돈도 잘 모으고, 외모도 좀 빛나면 좋겠고, 새로운 것들을 계속 배우며 열려있는 어른이 되어야지. 건강은 무조건 챙겨야하니까 운동도 해야겠고, 취미 생활도 꼭 제대로 해야 한다. 좋은 자식, 좋은 부모, 좋은 형제도 좋은 친구도 해내야 한다.
당연히 반드시 해야하는 것들만 죽 늘어놓은 것 뿐인데도 벌써 숨이 막힌다. 대체 뭘 포기하고 버릴 수 있겠나 싶지만 대체 저걸 어떻게 다 가져갈 수 있을까. 좋은 것을 버리는 것을 두려워하며 살았던 시간이 너무 길다.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덜어내야 하는 때가 오면, 너무 자책하거나 무너지지 말아야지. 훌훌 털고 가는 것에 익숙해져야 끝까지 씩씩하게 걸을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건강 살짝 버리고 오늘 야식은 치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