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전부터 작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작문을 좋아하는데 비문학적인 글을 쓰는 것은 정서적 이입이 되지 않고 글을 쓰는 데 목적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 내심 불편했다. 목적적 글은 글을 쓰는 게 여가가 되지 못한다. 나에게 여가는 감정적 분출구로서의 역할을 많이 하는데 그게 감정의 열정적 표출이 되든 심화된 감정의 침잠이 되든 무언가 감정의 응어리가 해소돼야 한다.
그래서 지난 10월, 가슴이 답답하고 침울해 소설을 썼다. 부정적이고 가라앉은 감정을 나누면 덜어진다는 생각에 다른 이와 나누어 왔는데 정작 나눔 받는 사람이 그걸 원하지 않을 것 같기도 하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놓을 자신도 없었으며 말하고 나서 보니 사실 내가 말하면서 어떤 반응을 해주길 바라는 지도 알지 못했던 것 같다.
소설을 완성하지는 못했다. 비록 내가 쓴 건 10줄 남짓의 문장꾸러미였으나 다만 나와 같은 상황을 투영할 수 있는 존재를 창조해낸다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위로가 되곤 했다. 시험 기간 틈틈이 허구의 세상을 구성하는 글을 쓰며 잠시나마 숨통이 트였다. 가끔 그런 생각을 하지 않나. 내가 한 명 더 있어서 곁에 머물러주길 바란다는 거. 상황에 걸맞는 잘 조각해낸 문장들을 들려주길. 내 취미를 함께 즐기고 공감해주길. 사소한 것만으로도 위로가 될 수 있음을 알고 사소한 친절을 베풀어주길. 걷다보니 꽃이 보였고 꽃을 들고 기뻐하는 모습이 보고 싶어 작은 꽃다발을 수줍게 한 손에 들고 오는 사람은 얼마나 다정한가. 소설은 나에게 그런 느낌이었다. 더군다나 내가 썼으나 나에게 가장 근접한 존재가 한 명 더 존재하는 게 아닌가. 나에게 주는 근사한 꽃다발과 다름 없었다.
소설을 계속해서 써내려갈 수는 없었다. 호흡도 길고 시점이나 표현이나 나를 효과적으로 투영하기 위한 장치들이 독자로 읽을 때는 사념하기 어려울 만큼 어렵고 복잡다단했다. 그렇다고 시는 목소리만으로 옮겨지는 구어적 언어로서 갖는 한계가 있었다. 본래 노래 듣기를 좋아하는 나는 그래서 내가 표현하기 어려운 나의 감정들을 풀어내주는 가사들을 가슴에 품고 무한한 애정을 느껴왔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노래들은 모두 공통적 특징이 있다. 모호함과 다중성이다. 우리와 전혀 다른 배경 속에서 삶을 살아왔으면서 섣부르고 무례한 충고를 하는 자기 계발 서적을 싫어하는 이유와 마찬가지로 직설적이고 지나치게 감정을 담은 가사들은 섣부른 추측과 무례함을 난발한다.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바로 드러내는 직설적 가사보다 깊이 침잠해있던 어휘들로 승화하고 에둘러 말하는 가사들이 주는 모호함은 다양한 해석의 여지와 함께 수많은 맥락을 투영해놓는다. 뒤엉킨 감정으로 귀가해 침대에 엎드려 눈물을 훔치며 쓴 가사말과 고난의 시간을 견뎌내고 잘 정제된 감정의 결정들을 녹여낸 가사말은 다르다. 상황을 특정하고 구체화하는 것과 형이상학적으로 승화해 추상화하고 보편화하는 것의 차이. 청자가 어떤 물길로 이 노래로 흘러들어왔든 유영할 수 있는 가사들을 사랑한다.
작사를 배우고 싶다 하니 일전에 누가 묻더라. 작사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뭐라고 생각하냐고. 면접관이 된 듯 혹은 작사를 배우고 싶다는 희소한 사람에 대한 궁금증이든. 모호함이다. 한 번도 생각지 못했던 질문임에도 의외로 금방 답이 나오는 게 신기할 만큼 어느새 이 생각이 마음 속 한구석에 들어와 굳게 자리잡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