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처에 염증이 나는데 뛰는 걸 멈출 수는 없다
글이란 게 교묘하게도 상태가 멀쩡하면 잘 쓰이지 않는다. 우울이나 불안 등 정신적 고충이 있어야 생각이 깊어지고 떠오르는 게 생기는 법이다. 브런치에 오랫동안 글을 안 썼던 걸 보니 아마 상태가 괜찮았던 걸까 싶다. 근데 다시 들어온 걸 보면 상태가 다시 안 좋아졌나 싶기도 하다.
취업했다. 정확히 한 달 전부터 회사를 다닌다. 회사를 다니면서 나를 잃어가고 있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취향은 무엇이었고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어떤 분위기를 사랑하는 사람이었는지. 기억을 바래게 만드는 생활들. 감정의 폭과 깊이가 넓어지고 깊어질 틈도 없이 웃고 다가가고 말해야 하는 생활의 반복. 회사를 다니기 전까지는 내가 세운 기준에 만족스러우면 됐지만 이젠 내 기준 따위 아무래도 상관 없어진 것이다. 중요한 건 내가 아닌 회사의 기준. 하지만 한 달 간 기준을 만족시킨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매일 반성문을 쓰고 후회하고 자책해왔다.
취준생일 때 내 기준에 만족스럽지 못해서, 혹은 내 기준이 취업할 수 있는 기준선에 부합하는 지 알 수 없어 불안해하던 시기도 있었다. 무지에서 비롯된 불안이었다. 지금은 아니다. 스스로 깎아내리는 매일이 지속되고 그래도 잘하고 있다며 다독이는 삶의 연장이다. 매일 같이 넘어지고 상처 나고 흙과 모래가 상처 속을 파고들어 염증이 일고 있지만 그래도 괜찮다고, 잘하고 있다는 말들로 다시 일어나고 이 악물고 뛰어야 하는 삶이 지속되는 것이다.
그만두고 싶었다. 이 일이 내게 잘 맞는지도 모르겠고 남들보다 부족하다는 걸 매일 같이 느끼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어렵고 어울려야 하는 것도 어렵다. 처음이니까 모두가 그렇다는 말로도 메울 수 없는 깊은 진공 상태가 마음 한켠에 항상 자리 잡고 있다. 그래도 매일 해보자고, 스스로 부둥켜 안고 다시 일으켜야 하겠지.
김사월의 '지옥으로 가버려'에서 나오는 지옥은 잊는 것으로부터 정의된다. 잊고 잊어지는 망각의 지옥. 쌓아온 것들에 대한 기억을 잃는 무지의 지옥. 지옥으로 가기 전 죽은 자들의 영혼이 머물며 단련 받는 곳을 가톨릭 교리에서는 연옥이라 한다. 완전한 망각과 무지로 나아가기 전의 연옥 속에 나는 서 있는 것 같다. 점점 나를 잃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