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ap in the Cheese
W는 디자이너다. 10여년을 알고지냈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정확히 무슨 디자인을 하는지는 잘 알지 못한다. 나도 일단은 미술을 전공하기는 했지만, CI, BI, BX... 등등 명확하게 분류해서 설명하라고 하면 영 쉽지는 않다. 그럼에도 시각 디자인을 전공한 W의 프로젝트 들을 보고 있자면, 디자인에 대해서는 무지한 나라도 곧 잘 하는구나 정도의 인상은 받을 수 있었다. '문외한이 섣불리 판단하는 걸까?' 싶기도 하지만... 취향이란 것도 있으니까. 그리고 그런 주관적인 평 외에도 취업이라던가 이직이라던가 곧잘 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 객관적 지표로서도 아마 잘 하는 편이 아닐까? W는 연애만큼 일에도 열심인 사람이었다. 휴학에, 군대에 직군 전향등 여러모로 직장과 거리가 멀었던 나에게는 크게 와 닿지 않았던 W의 이야기들도 이제와 돌이켜 보면 '아, 이 사람 일 정말 열심히 하고 사는 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언제나 소소하게나마 프로젝트를 만들고 있었고, 언제나 포트폴리오를 수정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번에 물어온 나뭇가지는 W의 회사에서 분재를 꺾어 온 것이었다.
"우리 팀장님이..."
로 시작된 이야기는 조잘조잘 쉴 틈도 없이 떠들어 댔다. 이쯤되면 나도 그냥 그 회사 디자인팀이 아닐까 생각될 정도로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팀 내 구성원이 몇 명인지조차 알다보니, 우연히 W의 회사를 지나가기라도 하면 누가 누구인지 구분하고 인사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애지간한 워커 홀릭들도 인정할 W의 일 사랑이 그 직장 상사에 대한 호감까지 더해져 버리니 그 시너지는 꽤나 무섭게 느껴질 만큼 거대해져 버렸다. 문제는 그 '팀장'이라는 사람의 반응인데... 곧잘 달려들던 W도 이번에는 회사의 직속 상사이다보니 다소 껄끄러운 점이 있었던 걸까, 꽤나 자중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회식 다녀온다!"
"회식을 이렇게 즐거워하는 직장인이 여깄습니다."
"맛있는 와인 먹으러 간대."
"회식을 와인으로 하는 회사가 여깄습니다..."
W의 관심을 팀장도 인식하고 있었던 것인지, 아닌지는 사실 이제와 생각하자면 조금 가물가물하지만, 적어도 둘 모두 일에 대해서는 꽤나 진심이었던 것만은 기억한다. W의 작업물에 대해서 팀장이 직접 피드백을 해 주기도 하고, 그리고 그 사실을 신나게 떠들고 있는 W가 있었다. 일 얘기를 이렇게 즐겁게 할 수 있다니... 때로는 피드백을 주는 것이 아니라 팀장이 혼자 처리해 버리는 것에 대해 분노하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나름의 공-사 구분을 한 것일까? 일 자체에 대한 프라이드와 팀장에 대한 걱정이 뒤섞인 미묘한 감정이었다. 일의 세부적인 내용은 사실 못 알아들을 전문용어들이 대부분이다보니 대충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되었는데, 그 프로젝트를 위한 공부를 해야 했고, 그 내용을 팀장과 공유하며 일했다. 정도로 축약할 수 있을 것 같다. 문제는 이제 그 프로젝트의 방향성인데, 하늘은 W의 연애가 무던하게 넘어가는 것을 보고 싶지는 않은지 참 다양한 시련을 내렸다.
첫 번째 시련은, 시련이라기보다는 그 환경 자체였는데 대표로 있는 나름의 사장이라는 사람이 본인들이 하고 있는 일에 대한 이해도가 0에 가까웠었다. 사실 디자인팀이 하는 일 자체에 대해서 이해를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매번 프로젝트는 산으로 가기 일쑤였고, 사장이 팀장에게 의지하는 바가 많아질 수 밖에 없었다. 자연스레 W의 최대 관심사인 팀장은 이러저러한 일에 둘러 쌓여있는 상태가 되버렸고, 팀원과의 소통도 중요하지만 대부분 일로 지쳐있었다.
"바쁜건 좋은데, 이 사람 일을 잔뜩 벌려놓는 사람이라 어떻게, 시간을 가지기가 너무 힘들어."
"좋은거 아니냐? 어차피 회사에서 매번 마주칠 사람인데 괜히 껄끄러운 일 생기는 것보다 일하면서 친해지다보면..."
"아니, 그래도 좀 융통성이 있어야지. 뭐든지 다 오냐오냐 봐주는 느낌이니까."
두 번째 시련은, 그 오냐오냐 봐주는 부분이 문제였다. 직장 동료...? 라고 해야할까, 같은 업무를 맡고 있는 다른 직원의 실수에도 오냐오냐, 영 회사 분위기에 끼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도 오냐오냐, 그러면서 정작 본인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융통성 없는 모습을 보이고 있으니 W는 꽤나 답답한 심정을 토로했다. 결론적으론, 그 실수투성이의 직원은 퇴사하게 되었지만 퇴사하면서도 각종 사건들을 벌여놓고 도망치듯 가버린 일에 대해서도 수습은 하면서도 무던히 넘어가는 듯한 팀장의 모습이 W는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이야기를 건네 든는 나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세 번째 시련은, 팀장의 사무실 출근 횟수가 줄어들어 버린 것이었는데... 재택 근무로 전향되는 날이 점점 늘어남에 따라 팀장과 마주하는 날이 줄어든 W는 생각보다 덤덤해 보였다. 처음에는 조금 히스테릭한 모습을 보이다가도 '일이 그런걸 어쩌겠어'라며 체념하듯 넘어간다.
W의 연애사에서 내가 알고 있는 한 처음으로, 서서히 끟어오르다가 넘치는 일도 갑자기 폭발하는 일도 없이 천천히 식어버린 연애였다. 아니, 이건 연애가 아닌가? 시작도 안했으니 연애라고 보기는 어려울 것 같긴 하다만 이 때의 일련의 사건들이 조금은 W의 관심사에 변화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시점이 아니었나 생각한다.
W는 내가 알고 있는 한 항상 연하만 만났다. 의도한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이성에게 기대하는 바가 확고하다보니 자연스레 그렇게 이어진 것이 아닐까 싶다. '연상을 싫어한다' 라기 보다는, '나이에 맞는 행동' 을 바라는 것 같았다. 문제는 W 본인부터가 매일을 바쁘게 살아가다보니, 그것이 당연한 듯 되어버려 기준이 높아졌다는 것이 문제였다. 직장 일, 개인 작업, 레슨, 헬스, 모임, 개인 취미 생활, 하루도 쉴틈 없이 바쁘게 살아가는 W에게 언제 쉬냐는 질문은 의미가 없어보였다. W는 일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항상 무언가에 몰두 해 있는 본인이다보니, 상대방도 자연스레 자신의 일에 최고가 아니어도 최선을 다하는 사람을 바랐고, 그런 상대에 대한 호감은 W의 마음을 움직였다.
당장 위에서 변화의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고는 했지만, 미풍에서 부터 시작한 바람이었기에 W 본인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고, 여느때와 같이 싱싱한 어린 나뭇가지를 줏어온 W는 신이 난 아이처럼 나뭇가지를 자랑해왔다.
"어떡하지? 나 사고친거 같아."
"그, 뭐 하루이틀 있는 일도 아니고, 뭘 새삼스레 그러십니까?"
"아냐, 이번엔 달라."
뭐가 다르다는 걸까. 언제나와 같이 바쁘게 살아가는 어느 정도 훈훈한 외모를 가진 재밌는 성격의 연하를 납치(?) 해 온 W는 이번에는 다르다고 소리쳤다.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이번에는 같은 동네에 산다는 정도 였을까? 3자 입장에서는 사실 큰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다만 한가지 바라는 점이 있다면, 이미 사고를 쳐버린 와중이라지만 그래도 조금은 느긋한 마음으로 지내길 바라고 있었다. W가 새로운 어린 나뭇가지를 가지고 왔을 무렵, 당장 내가 오랜만의 연애에 허둥대다 물을 엎질러 버린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마음이었다. 물론, W는 그건 연애 축에도 못끼는거 아니냐며 자신은 그러지 않는다고 웃어 넘겨버렸지만...
그러는 와중에도, 다른 점을 찾아보자면 어느때보다 W가 즐거워 보였던 것은 사실이다. 오랜만에 개그코드가 맞는 친구를 만난것인지, 아주 사소한 일상에서도 꺄르르 거리고는 하였다. 그러면서 나에게 너도 빨리 연애를 하라며 부추기고 있는 모습을 보자면, 실연 당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람한테 이게 할 말인가, 인간이 맞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 만큼 W는 잔뜩 물이 올라 있었다.
물이 올라도 너무 올랐기 때문일까, 결국 우려하던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단지, 그 방향성이 그간 내가 알고 있던 W와는 너무나도 다른 모습이었기에 조금 놀랬을 뿐이다. 이번 연애 중의 W는 어느 때보다 밝아보였다. 십수년을 알고 지낸 W가 이렇게 즐거워 하는 것을 본것이 손에 꼽힐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연애 자체가 즐겁다기 보다는 오랜만에 재밌는 놀거리가 생긴 아이마냥 들떠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는 남이 알 수 없는 스린 마음이 들어 있었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고 하면 틀린 말이다. 과거에도 한 번 비슷한 전적이 있었다. 몹시 불안해 하는 W의 이야기를 완전히 처음보는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 내 대학 동기 Y와의 관계가 끝이 났을 때에 들었던 이야기였다. 당시엔 이유는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같은 일인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어렴풋이 비슷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연애 할 때 엄청 불안해 한단 말야."
W는 무엇이 그렇게 불안한 것 이었을까?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멋있게만 느껴지던 W가 이렇게도 초라해 보이는 것은 처음이었다. 충분히 일상 속에서 즐거워 보였고, 서로 일이 바빠 만나지 못 할 때도 있지만, 그 속에서도 관계는 이어나갔었다. 동네에서 스토킹 비슷한 것을 대응하며 조금 더 둘의 사이가 돈독해 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런 일상들이 반복되는 와중, 서로의 관계 외적인 곳에서 발생한 스트레스들이 둘의 사이를 조금씩 떨어뜨리고 있었 던 것 같다.
일이 바쁜 서로이기에, 일로 인한 스트레스는 서로 이해 할 수 있었음에도, 사람 마음이란 것이 그리 쉽게 정한대로 행동 할 수는 없는 것이기에...
바쁘게 살아가는,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에게 끌리는 W는 상대방에 대한 마음은 더욱 커져가지만, 오히려 그렇게 바쁘게 살아가는 상대방이기에 W에게 소홀해 지는 모습을 보일 때면, 그런 모습이 W를 불안하게 만든 것 같았다. 참 아이러니 하다. 서서히 스스로를 옥죄어 가는 모습처럼 느껴진다. 모든 일 들을 다 알고 있는 것은 아니기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사과해야 겠다는 W의 이야기를 막을 수는 없었다.
"너가 잘못한게 아닌 것 같은데 뭘 사과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내가... 잘못한 건 맞아. 바쁜거 알면서 서로 얘기하면서 맞춰가자고 했으면서 답답하게 한게 많아."
'그게 너만의 잘못이라고 할 수 있는 걸까?'
입 밖으로 차오른 말을 차마 내뱉을 수는 없었다.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불안감들을 조금씩 어딘가에 덜어내고, 자신을 조금 더 아끼는 방향으로 나가길 바란다는 사탕발림이었다. 그것이 W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 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누구의 잘못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는 일로, 전해 듣기만 했던 사람보다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 무너지는 것을 보고 싶지만은 않았다. W는 그렇게 조금 고장난 상태로 한 동안 조용히 시간을 죽였다.
달콤한 치즈 속에 감춰진 덫에 걸려버린 W는 그 달콤함에 빠져 허우적 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