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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분카레 Aug 19. 2024

선풍기에게 경이로움을

잘 돌아가던 선풍기였다. 껐다가 다시 켜기까지 아무 일도 없었다. 근데 갑자기 반항을 한다. ‘미풍’ 버튼을 눌러보고 ‘회전’ 버튼도 눌러본다. ‘잉’하는 모터 도는 소리가 난다. 미약하게 돌아가지만 날개가 버거워 더 이상 돌아가지 못하겠다는 눈치다. 


더위에 지쳤나. 이상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지금 이 날씨에 밤에 선풍기를 켜지 않고는 잠을 잘 수 없는데. 이 시간에 선풍기를 사러 갈 수도 없고. 난감했다. 

     

선풍기를 들어보고, 옮겨보고, 눌러보고, 때려보고 해 볼 수 있는 짓을 다해 본다. 소용없다. 이왕 이렇게 된 바에야 이유라도 알아야겠다는 마음에 선풍기 머리를 열어보기로 했다. 며칠 전 남편으로부터 고장 난 압력밥솥의 끊어진 선을 연결했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베란다 창고 안 공구함을 열어 십자드라이버를 찾았다. 드라이버를 잡고 선풍기를 마주하니 마치 수술용 매스를 든 의사가 된 것 같았다. 반드시 살려내리라는 비장한 각오로 마주했다. 감전의 위험이 있을지 모르니 우선 위험인자를 먼저 제거하기 위해 코드를 뽑았다. 

     

나사를 풀고 뚜껑을 열었다. 그 작은 공간 안에 에나멜선 다발들이 빼곡히 들어앉아 있었다. 색색의 전선도 몇 가닥이 야무지게 묶여 꼬투리 속 콩알처럼 자리 잡았다. 버튼만 누르면 돌아가던 선풍기에게 처음으로 경이로움을 느끼는 순간이었다. 실만큼 가느다란 선들이 하나하나 힘을 보태어 자기 몸의 몇백 배가 넘는 날개를 주야장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반항'이라고 한 말에 잠시 미안한 마음이 든다. 


그의 노고를 치하하는 마음으로 우두커니 들여다보는데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끊어진 선이 발견되지도 않았다. 경건한 맘으로 애먼 먼지만 닦아내고 다시 봉합수술을 했다.     


이 행위만으로 선풍기가 돌아가길 바라는 마음은 허무맹랑하다. 하지만 턱도 없는 일에 간혹 희망을 걸기도 하는 법이니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미풍’을 눌렀다. 나를 조롱이나 하듯 선풍기는 혀들을 날름거리며 바람을 일으켰다. 평소 내 손에 들어오기만 하면 이상 현상을 보이는 기계들이다. 그런데 내가 그런 기계를 고치다니, 쾌재를 불렀다. 남편한테 전화해서 자랑질할 생각 하니 룰루랄라 저절로 콧노래가 나왔다. 날개 앞 철재뚜껑을 끼우기 위해 선풍기를 껐다. 마저 끼우고서는 손을 탈탈 털고 의기양양하게 다시 ‘미풍’을 눌렀다.  

  

앗! 안 돌아간다.

분명 덮개를 씌우기 전에는 잘 돌아갔는데 귀이한 현상이다. 어떨 때는 돌아가고 어떨 때는 안 돌아간다. 수차례 끼웠다 뺐다를 반복했다. 일정한 패턴 없이 선풍이는 제 맘대로다. 지금은 돌아가지만 저 선풍기가 또 언제 멈출지 알 수 없다.    

  

수 차례의 이사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철철이 해체되고 조립되고, 간혹 사람에 의해 밀쳐 넘어진 선풍기였다. 갖은 수난에도 여름 한 철 내내 열일하며 무심한 듯 제 역할을 충실히 해주었다. 

     

무더운 여름을 나는데 선풍기 하나에 의존하기에는 턱도 없다. 에어컨이 켜지는 날이면 선풍기는 뒷전이 되고 에어컨에 그 존재감이 가려진다. 그러나 에어컨의 인기는 며칠 못 간다. 에어컨이 반짝 스타라면 선풍기는 믿고 보는 스타 격이라 할 수 있다. 한여름의 더위를 제외하고는 시작과 끝에는 선풍기의 전성시대다. 


다른 해와 다르게 올해는 유난히 에어컨의 활동기간이 긴 듯하다. 하지만 끝날 날이 머지않았다. 선풍기의 활약시대가 오고 있다. 시월까지도 선풍기는 간혹 자신을 찾는 이들을 위해 거실 한가운데 덩그러니 앉아있다. 자신의 쓸모를 다하기 위해서다. 점차 뒷전으로 내몰리다가 겨울이 가까워져서야 붙박이장으로 거처를 옮긴다. 


여름밤 갑자기 멈춰버린 선풍기와 기나긴 대화를 한 듯했다. 그러고 보니 비록 살아있는 생물에게만 수명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오랜 기간 우리 가족의 땀을 식혀준 이 선풍기가 수명을 다 하는 날 나는 좀 더 고마운 마음으로 이별을 하게 될 것 같다. 작동이 예전만 못하다고 미리 쓰레기분리 수거장에 내버리지 않을 것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은 선풍기뿐 아니라 주위의 모든 사물들에게로 뻗어간다. 비닐봉지 하나에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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