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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Aug 06. 2022

이혼 그리고 엄마

 대학 조교를 통해 연락을 받은 건 학기가 시작되고 나서 중간고사 시험이 한참일 때였다. 대학에 오면 지긋지긋한 공부는 끝이겠거니 했는데, 전공과목은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어려움으로 머리를 지끈거리게 했다. 죄다 원서라 사전을 옆에 펴 두고 읽어도 이해가 안 가는 책들뿐이었다. 그날도 어지러운 활자 속에 사전을 한 장 한 장 찾으며 빈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이모가 대학 로비에 찾아왔으니 로비로 오세요.’라는 쪽지였다. 공부를 하다 말고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간 동기를 통해 전해진 쪽지는 전공서적과 싸우고 있던 나를 살짝 짜증 나게 했다. 반가운 쪽지가 아니었다. 엄마가 없던 나는 이모도 없었기 때문이다.


 ‘누가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나를 찾고 있지?’ 어디까지나 호기심이었다. ‘누굴까?’ 하며 나간 그 자리에서 나는 그 사람의 뒷모습을 보고 그만 얼어붙고 말았다. 엄마가 여덟 살의 나를 두고 집을 나간 지 12년의 시간이 지나있었지만 그 뒷모습이 엄마인 것을 알아차리는 데는 1초의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로비의 그 뒷모습은 엄마였다.


 두 모자는 아무 말 없이 학교의 빈 벤치로 향했다. 잘 지냈냐는 말도 없었고 엄마라는 말도 없었다. 엄마는 그저 ‘어릴 때랑 똑같네.’라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말에 눈물이 터졌다. 벤치에 앉아 허리를 숙인 채 땅바닥을 향해 하염없이 눈물을 쏟아 냈다. 5월의 흙먼지가 눈물에 맞아 짙은 갈색으로 점점이 얼룩졌다. 그날의 기억은 거기서 끝이 났다.


 내가 여덟 살, 동생이 여섯 살 때 집을 나간 엄마는 그날 밤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그런 엄마를 찾느라고 아빠도 우리 둘을 두고 집을 나갔다. 나는 동생이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있어야 했다. 아빠가 돌아온 시간은 동생이 잠들고 난 후 깜깜한 밤이었고 술에 취한 채였다. 엄마는 이제 오지 않는다는 말을 토해내듯이 하며 아빠는 우리 옆으로 쓰러져 잠들었다.


 그리고 또 기억의 단절. 그다음 기억은 할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동생과 함께 부산의 할머니 댁으로 가는 기차였다. 아빠가 함께 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동생은 열차 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이 신기했는지 마냥 신나 했고 나는 엄마가 집으로 돌아왔을 때 우리들이 없어진 걸 알면 안 될 텐데 하며 걱정했다. 그때는 엄마가 12년 동안 우리를 보러 오지 않을지 몰랐다. 까마득히.


 지금 내가 아이들에게 유독 정을 쏟는 건 내가 엄마에게 받지 못한 것들에 대한 보상으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처럼 크면 안 되지 하며 여덟 살의 나와 큰애를, 여섯 살의 동생과 둘째를 항상 비교하곤 한다. 부부끼리 사소한 마찰이 있을 때도 아이들의 눈과 귀가 무서워 다툼으로 번지지 않게 한다. 언쟁을 하는 중이라도 아이들이 “아빠 엄마 싸우는 거야?”라고 물어보면 “아니 엄마 아빠는 잠시 의견을 나누는 중이야. 소리가 컸다면 미안해.” 하고 아이들에게 사과한다. 그럼 아내도 곧 수그러진 목소리라 싸움으로 번질 일이 없다.


 할머니 밑에서 자라 지금은 두 아들의 아빠가 되었지만, 우리 아이들에게만큼은 내가 겪었던 외로움과 세상의 무너짐을 알게 하고 싶지 않다. 부부간의 사랑이 가끔 지루할 때가 있지만 아이들이라는 연결고리가 그 느슨함을 다시 팽팽히 조여 준다. 두 놈이 깔깔거리며 노는 걸 보며 그 시절 나와 동생을 버린 한 여자의 마음을 부모의 심정으로 이해해보려 하지만 커다란 벽에 번번이 가로막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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