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 없으면 안 될 것 같아

by 화혜

"투어."


아이가 나를 보자마자 한 첫 마디였다.


"추워?"

"투어. 투어."


아이는 신발을 채 벗기도 전에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추워~ 밖에 춥구나?"

"아니~! 투어! 투어!!!"


'추워'가 아니라고? 무슨 말인지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아이는 답답해 죽겠단 표정으로 간절한 눈빛을 쏘며 같은 말을 반복했다.


'투어가 대체 무슨 뜻이지?'


아이가 치료실에 들어와 팔을 한껏 뻗어 손가락 끝으로 한 곳을 가리켰을 때,

그제야 나는 알 수 있었다.


"아!!! 트럭!!!!!"


'투어'는 바로 '트럭'이었다!

아이는 책장 꼭대기에 있는 커다란 덤프 트럭을 갖고 놀고 싶었던 것이다.

아직 발음이 정확하지 못해서 내가 못 알아들었을 뿐,

자신의 의사를 아주 명확하게 표현하고 있었다.


그러나 언어치료에 와서 트럭 놀이만 할 수는 없는 법.

오늘 목표는 발음 연습을 하는 거였다.


지금도 '트럭'을 '투어'라고 발음해서 소통에 실패하지 않았나.

발음 연습을 열심히 한 후에 자유놀이 시간을 갖게 해줄테다.


"트럭이 하고 싶구나? 그래, 선생님이랑 뽑기 게임 다 하면 이따가 트럭 줄게."


행여 아이가 투정부릴까봐 잽싸게 뽑기 기계를 꺼내 보여주며

세상에서 제일 재밌는 장난감인 것처럼 주의를 끌었다.


"우와, 이것 좀 봐! 동전 넣고 돌리니까 캡슐 나와. 짜잔!"


다행히 아이는 호기심 가득한 눈을 반짝이며 책상 앞에 바짝 앉았다.


발음 연습을 하면서 귀여운 미니어처 인형을 캡슐에 담아

뽑기 기계에 넣을 수 있도록 하나씩 건네 주었다.

아이는 인형이 담긴 캡슐을 뽑기 기계에 쏙쏙 넣으며 즐거워 했다.

그런데 갑자기 아이가 한 인형을 넣지 않겠다고 버티기 시작했다.

아이는 인형을 손에 꼭 쥐고서 이건 절대 잃을 수가 없다는 의지를 비쳤다.


다름 아닌 고슴도치였다.


내가 고슴도치를 캡슐에 넣자고 유도하자,

아이는 와다다 달려가 출입문이 있는 구석탱이에 서서 울기 시작했다.

얼마나 뺏기기 싫은지 알아달라는 듯 내 눈을 보며 목청껏 큰 소리로 왕왕 울어댔다.

이 작은 방 안에서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도망간 것이다.


"고슴도치가 그렇게 좋아?"


아이에게 묻자, 구슬 같은 눈물을 똑똑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슴도치가 너무 소중해? 그래서 넣기 싫어?"


아이는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며 "네"라고 대답했다.

조그만 고슴도치를 그 작은 품에 꼭 안고서.


"그랬구나. 고슴도치가 그렇게 소중했구나.

선생님이 몰랐어. 고슴도치 안 뺏을 거야. 이리 와."


아이는 순순히 돌아와서 제자리에 앉았다.

그러곤 고슴도치를 한 손에 꼭 쥔 채로 다시 뽑기를 시작했다.


그런데 얼마 안 되어 또 예상치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도고애!!!”


인형들 가운데서 돌고래가 나온 것이다.

아이는 반짝이는 눈망울로 돌고래를 살펴보다가 고슴도치가 없는 반대편 손에 꼭 쥐었다.

양 손에 인형을 쥐고 있으면 손을 쓸 수 없어 놀이를 계속하기가 어려웠다.


"우리 고슴도치랑 돌고래 중에 하나는 넣어주자.

뭐 넣을까? 고슴도치? 돌고래?"


아이는 일단 둘 다 넣지 않겠다고 칭얼댔다.

하지만 내심 본인도 알고 있는 듯 했다.

가장 소중한 것 딱 하나는 갖고 있을 수 있지만,

놀이를 계속하려면 다른 하나는 뽑기 기계에 넣어야 한다는 것을 아는 모양이었다.


"정했어? 고슴도치 넣을까, 돌고래 넣을까?"


위기에서 겨우 지켜낸 소중한 고슴도치와 새롭게 등장한 귀여운 돌고래.

아이는 고슴도치와 돌고래를 몇 번이나 번갈아 보았다.


“고슴도치? 돌고래?”


마침내 아이는 결정을 내렸다.


아이는 캡슐에 고슴도치를 담고 미련없이 쏙 넣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잃고 싶지 않아서 그렇게 목 놓아 울던 고슴도치였다.


"고슴도치 넣었어? 고슴도치 소중하잖아. 괜찮아?"


아이는 나를 보며 배시시 웃었다.


"도고애 더 죠아."




아이의 모습에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남몰래 묘한 감정을 느꼈다.


마침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실연의 아픔에 허우적대던 중이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고슴도치는 내가 좋아한 그 사람을 닮았다.

겉으론 고슴도치처럼 날선 가시가 있었지만, 알고 보면 말랑하고 여린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래서 사실 고슴도치를 보았을 때 나도 모르게 그가 생각이 났다.


고슴도치를 품에 꼭 안고선 방구석으로 도망가 서럽게 우는 아이의 모습이

마치 밤마다 깜깜한 방에서 혼자 배겟닢을 적시며 울던 내 모습 같았다.

그래서 더 측은했다.


아이에게 고슴도치가 그렇게 소중하냐고 물을 때

마치 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았다.


‘그 사람이 그렇게 소중해?’


그런 내게 아이는 한 가지 진리로 위안을 주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만고불변의 진리 말이다.


소중한 고슴도치를 잃었다고 해도, 돌고래가 나타나면

언제 울었냐는 듯 고슴도치는 말끔히 잊고 돌고래를 보며 다시 웃을 것이다.


나도 언젠간 마음 속의 고슴도치를 떠나보낼 때가 오겠지.

어쩌면 다음 사람은 뾰족한 가시 하나 없이 해맑고 자유로운 돌고래를 닮았을지 모르겠다.




돌고래를 제외한 모든 인형을 뽑기 기계에 넣은 후,

발음 훈련을 복습하며 동전을 넣고 캡슐을 하나씩 뽑았다.

마침내 모든 캡슐을 다 뽑고 귀여운 인형들이 책상 위에 한가득 쌓였다.


"연습 끝!!!"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투어!!!"


그랬다.

고슴도치도, 돌고래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가장 원했던 건 트럭이었다.


나는 기쁜 마음으로 트럭을 꺼내 아이에게 주었다.


발음 연습이 끝나자 아이에게 최애 장난감이 주어졌듯,

나의 연애도 모든 수련이 끝나면

가장 멋진 사람이 주어지기를 기대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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