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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

『1Q84』무라카미 하루키

현실이 한 겹 밀려날 때, 우리가 마주하는 것들

by 김안드레아

1. 현실을 벗어남에 대한 매혹

『1Q84』를 읽으며 가장 먼저 끌렸던 것은 이야기 속 세계가 이질적으로 ‘틀어지는 순간’이었다. 덴고와 아오마메는 전혀 다른 장소에서, 전혀 다른 사건을 통해 익숙한 현실을 떠난다. 누군가는 고속도로에서 빠져나오는 작은 선택 하나로, 또 누군가는 글을 고치는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문 너머로 넘어가버린다. 이 과정은 마치 일상 속 균열처럼 느껴졌다. 소설은 그것을 “다른 세계”라고 부르지만, 나는 그걸 현실의 외부가 아니라 현실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세한 비틀림으로 받아들였다.


이 이야기 속 비현실은 단지 두 개의 달이 뜨고, 리틀 피플이 존재하는 그런 판타지가 아닌 “이제까지 알던 세계와는 조금 다른 질감의 시간과 공간”이었다. 상식이 작동하지 않고, 확신이 흔들리며, 언어로 설명되지 않는 흐름 속에 인물이 던져질 때, 나는 그들이 ‘다른 세계’에 들어갔다고 느꼈다기보다, 예측할 수 없는 삶의 구간에 접어든 것이라고 느꼈다.


그건 내가 현실에서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기도 하다. 물론 비현실적인 일이 실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는다. 말 그대로 일어나지 않을 일을 갈망하는 건, 내 성향상 받아들이기 어렵다. 하지만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도, 우리는 예측할 수 없는 전개, 방향이 보이지 않는 상황을 맞이한다. 사람들과 관계가 틀어지거나, 익숙한 일이 무너지고, 뜻밖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순간들이 그렇다. 『1Q84』의 세계는 그런 순간들을 극단화했을 뿐이다. 거대한 설정이나 초월적인 존재보다, 내가 집중한 것은 그 세계 속에서 인물이 ‘어떻게 선택하고 살아가는가’였다.


예상할 수 없는 미래는 두렵지만, 동시에 가장 강력한 끌림이기도 하다.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세계에 떨어지기를 바라지는 않지만, 지금 이 세계 안에서 예측할 수 없는 가능성이 내 삶에 들어오기를 바란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단순한 상상력이 아니라, 삶의 낯선 구간을 투영한 하나의 비유로 받아들였다. 삶은 끊임없이 방향을 바꾸고, 나는 그 안에서 덴고처럼, 아오마메처럼 조금은 방황하고, 조금은 결정하며 나아가는 존재일 것이다.


“나도 저런 경험을 해보고 싶다”는 갈망, 하지만 그 갈망의 본질은 ‘비현실’을 향한 동경이 아니라,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익숙하게 다루고 있는 나의 세계가 한순간 낯설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 그리고 그 안에서 다시 ‘나’를 정의해야 하는 불확실한 시간에 대한 매혹이었다.


2. 현실이라는 개념

‘현실’이라는 단어는 참으로 묘한 말이다. 한자로 풀이하자면 ‘눈앞에 드러난 실제’, 즉 지금 여기 존재하는 참된 세계를 뜻한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이 말이 지닌 단순한 의미가 얼마나 불완전한지를 절감하게 된다. 이야기 속 인물들은 ‘리틀 피플’이라는 존재와 ‘두 개의 달’이 뜨는 세계를 맞닥뜨린다. 그러나 그 세계는 단순히 판타지적인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눈앞에 있는 것과 실제 존재하는 것이 다를 수 있다"는, 우리가 너무도 쉽게 지나쳐버리는 인식의 근본적 질문을 던진다.


나는 대체로 과학을 신뢰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이 질문에 대해 처음에는 감각적으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접근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세상이 진짜일까? 눈으로 본다고 해서, 그게 객관적인 현실은 아니다. 왜냐하면 시각, 청각, 후각, 촉각—우리가 세계를 인식하는 모든 감각은 결국 우리를 둘러싼 물리적 신호를 해석하는 뇌의 해석 과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감각은 정확하지 않고, 인식은 언제나 주관적이다. 그 사실은 “현실”이라는 개념이 결코 단일하지 않으며, ‘지금 여기’라는 말조차 인간마다 다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1Q84』의 세계는, 어떤 실재의 전환이라기보다, 감각의 틀어짐이 낳는 인식의 전환에 가깝다. 같은 세계를 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두 개의 달을 보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리틀 피플이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이건 환각이나 오류라기보다는, 현실이라는 것이 애초에 단일하지 않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장치라고 느꼈다. 그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지금까지 내가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이 세상조차도, 나라는 하나의 필터를 거쳐 재구성된 이미지일 뿐이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우리는 결코 현실 자체를 볼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의 감각을 통해 만들어낸 ‘해석된 현실’을 살아가는 존재다. 그렇다면 현실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 가능한 것이다. 이 깨달음은 무서우면서도 해방적이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면, 그 너머에 또 다른 방식의 세계가 존재할 수 있다는 뜻이니까. 그리고 그 세계는 단지 책 속에 있는 게 아니라, 내 생각과 시선이 달라지는 순간 내 삶 속에서도 모습을 바꿔 드러날 수 있다.


『1Q84』는 내게 ‘현실’이라는 말이 얼마나 상대적인가를 보여주었다. 그것은 더 이상 단순히 물리적인 존재 여부를 뜻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감각하고, 해석하고, 신뢰하는가에 따라 바뀌는 유동적인 세계의 이름이다. 이 소설이 흔드는 것은 세계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세계를 ‘믿는 방식’이었다.


3. 리틀 피플과 초현실

『1Q84』를 읽은 독자 중 대부분은 ‘리틀 피플’이라는 존재에 주목할 것이다. 이 알 수 없는 집단은 공기 번데기, 도터, 그리고 한 소녀의 글을 통해 이 세계의 질서를 뒤흔드는 중심축으로 작용한다. 독자들은 이들을 악의 상징으로 보기도 하고, 사회적 권력이나 신비적 질서의 은유로 읽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이 리틀 피플이라는 존재를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그 세계에서 주어진 '자연현상'처럼 생각했다.


비가 내리는 것처럼, 바람이 부는 것처럼, 어딘가에서 작용하지만 내 뜻대로 조절할 수 없는 것들. 리틀 피플은 내게 그런 존재였다. 그들이 이야기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보다는, 그 속에서 인물들이 무엇을 느끼고 어떤 판단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게 다가왔다. 문장을 따라가며 줄곧, ‘이 사람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질문을 되뇌었고, 그러다 보니 리틀 피플은 점점 내 감정선 밖으로 밀려났다.

오히려 관심을 가졌던 건, 그들이 존재하는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선택과 흔들림, 그리고 감정이었다. 모든 이들이 설명할 수 없는 초현실적 위협 앞에서 반응할 때, 어떤 이는 무기력하게 침묵하고, 어떤 이는 그 안에서도 작은 윤리를 지키려 한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것을 ‘현실’로 받아들인 채 조심스럽게 살아간다. 그들의 모습이 현실의 우리와 닮았다고 느꼈다. 실제 세계에서도 우리는 이해할 수 없는 것들에 둘러싸여 있다. 정치, 경제, 종교, 시스템, 또는 죽음 같은 것들. 리틀 피플은 어쩌면 그런 이해할 수 없는 세계의 은유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이 소설을 통해 어떤 음모나 신비를 추적하려 하지 않았다. 대신 혼란 속에서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지켜보았다. 아무리 초현실적인 세계라도, 그 안의 인물들이 느끼는 감정과 반응은 지극히 현실적이다. 그래서 나는 리틀 피플을 이야기의 핵심으로 보지 않고, 그들이 만든 조건 속에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어떻게 균형을 잡으려 하는지를 보는 쪽에 더 끌렸다.


『1Q84』는 리틀 피플을 통해 세계가 낯설어졌을 때, 인간은 어떻게 판단하고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묻는다. 나는 그것이야말로 소설이 던지는 진짜 질문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존재를 이해하려 하기보다, 그 존재를 인식한 채 어떻게 살아갈지를 고민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리틀 피플을 대하는 태도와, 우리가 현실의 불가해한 상황들을 대하는 태도 사이에 존재하는 묘한 평행성이다.


4. 사랑의 본질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은 특이하다. 둘은 어린 시절 잠시 손을 잡은 기억 하나만으로, 스스로의 삶을 관통하는 감정을 “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수십 년의 시간 동안 서로를 찾아 헤맨다. 흔히 말하는 로맨스의 공식—만남, 친밀함, 갈등, 재확인—과는 다르게, 이들의 사랑은 물리적 접촉이 사라진 자리에서 오히려 점점 더 강해진다. 마치 존재하지 않는 실체를 더 강하게 신뢰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의 관계를 보며 자연스레 ‘진짜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품게 되었다. 하지만 곧 깨달았다. ‘진짜 사랑’이라는 표현 자체가 모순이라는 것을. 사랑이란 단어는 이미 이상화된 감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부모의 사랑, 친구 간의 사랑, 연인 간의 사랑을 모두 동일한 언어로 표현하면서도, 그 감정들의 실체는 다르다고 느낀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 복잡한 감정의 총합에 ‘사랑’이라는 하나의 이름을 붙인다. 이 단어는 언제나 실제보다 더 크고, 더 정제된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진짜 사랑인가 아닌가’를 묻는 것 자체가 무의미하다. 사랑은 언제나 이상화된 채 존재하고, 그 불완전함 때문에 인간적이다.


덴고와 아오마메의 관계를 조금 더 현실적으로 바라보면, 어쩌면 그들은 어릴 적 느꼈던 미세한 떨림을 평생 동안 잊지 못한 채, 그 감정을 다시 꺼내줄 누군가를 찾지 못해 결국 서로를 찾아간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자신을 향해 다가오지 않는 긴 시간 동안, 인간은 그 공백을 스스로의 기억으로 채우고, 기억을 믿음으로, 믿음을 사랑으로 바꾸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오히려 더 이상화되고 미화되며, 현실에서 가능했던 모습보다 더 강하게 다가온다.


사람은 자신이 직접 겪지 않은 사건이나 관계를 훨씬 더 긍정적으로 상상하는 편향을 갖는다. 그런 심리의 연장선에서 덴고와 아오마메의 관계는 어쩌면 ‘가능성이 실현되지 않았기에’ 더 완벽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것은 누군가를 향한 사랑이라기보다는, 그 사랑을 품은 채로 살아온 자기 자신을 붙잡고 있는 방식이었을지도.


그런 감정을 애써 부정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모두 그렇게 산다. 우리는 모두 어떤 사랑을 기억하고, 어떤 사랑을 상상하며, 어떤 사랑을 붙잡고 있다. 설령 그것이 현실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감정이라 해도, 그 감정을 믿고 살아온 자신은 확실히 존재한다. 덴고와 아오마메의 사랑이 진짜였는지를 묻는 대신, 나는 그 사랑이 그들 각자에게 무엇이었는지를 상상하며 조용히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5. 세상은 하나인가, 여러 개인가

덴고와 아오마메는 어쩌면 같은 세계에 있으면서도, 서로 다른 세계를 살아간다. 두 사람 모두 ‘1Q84’나 ‘고양이 마을’이라는 이름이 붙은 낯선 공간에 들어서지만, 그들이 겪는 사건과 감정, 심지어 세계에 대한 감각조차 조금씩 다르다. 두 개의 달을 본다는 것은 단지 현상적인 차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동일한 현실 속에서도 서로 다른 층위를 살아가고 있다는 비유처럼 느껴졌다. 이 이야기를 읽으며 나는 “세상은 정말 하나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게 됐다.


내 첫 번째 반응은 ‘그렇다’였다. 세상은 과학적으로 하나이고, 실재는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 믿음은 곧 다시 질문에 부딪혔다. 그렇다면 왜 같은 사건을 두고도 사람마다 전혀 다른 기억, 해석, 감정을 가지는 걸까? 왜 어떤 사람은 같은 현실을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고, 또 어떤 사람은 같은 현실 속에서 새로운 의미를 발견하는 걸까?


나는 이 질문을 통해 “세상이 하나일 수는 있어도, 그 세상을 바라보는 주체의 수만큼의 세상이 다시 존재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우리가 보는 세계는 동일한 무대일지 몰라도, 그 무대를 바라보는 각도의 수는 무한하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도 반복적으로 마주쳤던 사실이다. 사람들은 자신만의 필터로 세상을 본다. 그 필터는 감각, 경험, 가치관, 욕망, 두려움 등으로 구성된 복잡한 구조물이다. 따라서 누구도 타인의 세계를 완전히 경험할 수 없고, 설령 같은 공간에 있어도 ‘다른 세계’를 사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이 책은 그 다름을 극단적으로 보여준다. 서로의 세계를 온전히 알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덴고와 아오마메는 그 다름을 뚫고 서로를 찾아가려는 움직임을 멈추지 않는다. 우리가 모두 다른 현실 속에 살아간다는 사실은 때로는 외로움을 낳지만, 동시에 타인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에 깊은 의미를 부여한다.


세상은 하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 각자의 눈에 어떻게 비치는지는 전혀 다른 문제다. 결국 우리는 각자의 1Q84를 살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중요한 건 그 다름을 지워내려 하기보다는, 그 다름을 이해하고, 타인의 세계가 존재함을 인정하며 함께 살아가는 태도 아닐까. 『1Q84』는 내게 그런 삶의 자세를 조용히 가르쳐주었다.


6. 여운 없는 여운

책을 다 읽고 덮었을 때, 나는 이상할 정도의 고요를 느꼈다. 보통의 책이라면, 마음 어딘가에 선명한 문장 하나쯤 남기고 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책은 그러지 않았다. 감정이 고조되는 결말도 아니었고, 뚜렷한 해답이나 반전도 없었다. 그저 내가 잠시 다른 세상에 다녀왔다가, 다시 내 일상으로 무심히 돌아온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이토록 두꺼운 책을, 이토록 밀도 있게 읽었는데, 왜 아무런 여운도 남지 않는 걸까. 하지만 곧 나는 이 느낌 자체가 『1Q84』라는 책의 본질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소설은 강한 인상을 남기기 위한 책이 아니었다. 마치 덴고와 아오마메처럼 오히려 그것은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고, 내가 그 안에 격렬히 발을 딛고 있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빠져나오게 만드는 책이었다.


어쩌면 이 책의 가장 큰 힘은, 무언가를 남기지 않는다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선명한 교훈이나 눈물겨운 감정이 아니라, 흐릿한 체류의 기억. 그리고 그런 흐릿함이 남긴 자리는, 다른 책들에서는 얻기 힘든 감각이었다. 여운이 없는 것이 여운이 되는 역설. 그것은 내가 이 책을 기억하는 방식이자, 이 책이 나를 통과해 지나간 방식이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1Q84』가 나에게 무엇이었는지 정확히 말하기 어렵다. 다만 분명한 건, 나는 잠시 동안 다른 세계를 걷고 있었고, 그 세계의 공기가 내 삶을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히 바꿔놓았다는 사실이다. 이제 나는 다시 내 세계로 돌아왔고, 그 사실만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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