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외부 회의가 있었던, 진이 빠지는 날이다. 닥친 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각 부분의 담당자들만 와서 밀도 있는 대화를 나누어도 될까 말까 한 일에 억지로 외부 전문가를 앉혀놓는 바람에(게다가 말도 많은) 결국 문제 해결은 1도 되지 않고 좋은 말만 듣다 왔다. 융합,소통,복합,공동,사례....좋은 말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대화가 찰떡같은 맛이 없고 끝내 서로의 귓전에서 튕겨지다 회의가 끝났다. 연말에 가까워질수록 일은 많아질 것 같아 계속 부담이 되는데, 남편은 오늘 한 해의 가장 중요한 일을 마무리지어 홀가분하다 한다. 부럽다. 그래, 그러니 또 나가서 먹자.
남편의 책거리를 핑계로 술잔을 기울이며 한 해 동안 고생 많았다고 조금 이른 인사를 건네고 보니 정말 연말 기분이 든다. 올 한 해도 농사를 지었다고 생각해본다면, 어째 수확 거리가 없다. 품종도 정하지 않고 낡은 호미 한 자루로 게으르게 깨작거리다가 뭔가 뿌리 깊게 심어내지 못한 채 땅은 얼어버렸다. 코로나라는 자연재해가 좋은 핑계가 되어주니 자책하거나 실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 위로라면 위로이려나. 실제 야심차게 들인 로즈마리도 진작에 고사했고, 바질트리는.. 왜 자꾸 새카매지는지?
겨우내 먹을 것이 없는 베짱이 신세이지만. 그동안 스스로에 대한 부채감으로 항상 조물조물 뭔가 계획하고, 뭔지도 모르면서 뭔가 이루고 싶어 하는 마음에 늘 짓눌린 기분이었는데, 올해 자의반타의반 완전히 손을 놓게 되어버리고 보니... 이런 삶도 나쁘지 않고 오히려 꽤 괜찮다는 생각마저 든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서,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해서, 답답하게 집안에 처박혀 유튜브만 보아서 좋았던 해. 아예 다 놓아버릴 수 있었기에 그동안 우선순위에서 항상 밀려왔던, 진짜 내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던 해.
내년 풍작을 위해 나의 땅을 푹 쉬게 한, 낭만적이었던 해.
베짱이와 토끼도 좋았던 해!
*오늘 하루는 내가 긍정적이려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