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출력에 문제 있어?
예쁘게 말하는데 돈 드는 거 아니다
지난 7월 제주로 여름휴가를 다녀왔다. 떠나기 열흘 전부터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일기예보를 확인했지만 비 소식은 그대로였다. 비가 와도 쉬면 그저 좋지, 너무 땡볕에는 아무것도 못하겠더라고... 하면서도 일 년에 한 번 길게 가는 휴가, 날이 좀 맑았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계속 들었다.
그러다 동기와 여름휴가 이야기를 하는데 다음 주에 제주도로 여름휴가로 간다고 하니 대뜸 "제주도 비 엄청 오지 않아? 엄청 많이 올 텐데~ 하긴 지금 취소할 순 없지" 하는데 뭔가 기분이 확 상하는 거다. 상대는 사실을 말했을 뿐이지만 며칠 동안 날씨 때문에 마음 졸이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려고 애쓰던 나는 상대의 그런 반응에 갑자기 화가 났다. 내 표정이 좋지 않았는지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걱정돼서" 하는데 얼마나 성질이 나던지... 그렇다고 그 사람이 못된 사람도 아니다. 진짜 내 걱정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의 진심과 상관없이, 다만 그의 출력이 거지 같은 것이다.
대화를 해보면 출력에 문제 있는 인간들이 정말 많다. 뭔가를 이야기하면 그것과 관련한 안 좋은 이야기를 가장 먼저 한다. 좋은 일에도, 나쁜 일에도, 귀신 같이 가장 안 좋은 점을 찾아낸다.
영어공부한다고 하면 영어 쓸 일 없지 않냐고 하고, 누가 대기업에 취업했다고 하면 야근 많지 않냐고 하고, 자전거 타러 간다고 하면 자전거 위험하지 않냐고 하고, 수영하면 물 더럽지 않냐고 하고 ㅋㅋㅋㅋ 쓰면서도 웃기네. 진심 어린 걱정이라면 걱정이다.
나쁜 놈들한테는 응징하면 되지만, 문제는 악의도 저의도 없이 그냥 그렇게 말해서 사람 속을 뒤집어 놓는 사람이 정말 많다는 것이다. 심성과 관계없이 출력회로가 그렇게 꽂힌 사람들과의 대화는 정신건강에 좋지 않으니 피하는 것이 좋다.
아니 뭐 그냥 돈 드는 일도 아닌데 서로 기분 좀 좋게 해 주면 안 되냐고. 그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어차피 남의 일, 안 좋은 이야기 해서 뭐해.
예쁘게 말하는데 돈 드는 거 아니다.
반면, 같은 이야기를 해도 예쁘게 받아주는 사람들이 있다. 화장실에서 만난 다른 동료는 제주로 여름휴가를 간다고 하니(요즘엔 여름휴가 외엔 서로 할 이야기가 없어서들 그렇다...) '너무 좋겠어요!' 하는데 그 말에 내 기분도 좋아진다. '아니요.. 비가 많이 올 것 같아서 좀 그래요' 했더니 '비가 와도 제주는 운치 있고 좋죠!' 하는데 우씨... 그냥 고마운 거다. 평소에 잘 모르던 사람이라도 그 몇 마디 대화로 인상이 바뀐다.
'넌 회로가 제대로 꽂혔구나! 이 시대의 소듕한 정상인..ㅠㅜ'
일주일 내내 비 소식이 걸려있었지만, 잔뜩 흐리기만 할 뿐 마지막 날 빼고는 비가 오지 않았다. 나에게 의도치 않은 저주를 내린 동기의 휴가를 생각하면 나도 모르게 간절히 바라게 된다. 널 미워하진 않지만 너의 휴가 때 꼭 비가 많이 왔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