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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나고 Apr 04. 2023

읽는 자만 닿을 수 있는 세계

갓 지은 밥 같은 온기가 그곳에 있다.



프롤로그,

읽는 자만 닿을 수 있는 세계




새벽 5시, 읽는 자가 되기 위한 스위치를 켠다. 어슴푸레한 새벽빛은 식탁 위 작은 조명 하나로 자취를 감춘다. 깊은 잠을 덮은 아이와 남편은 어제의 세계에 있고 나는 책을 비추는 빛을 따라 읽는 자만 닿을 수 있는 세계로 들어간다. 그곳에는 갓 지은 밥 같은 온기가 있기 때문이다. 




아침식사를 위해 찬물로 씻은 쌀을 전기밥솥에 넣고 아무 책의 귀퉁이를 잡고 읽었다. 어두움의 한기가 서린 마음에 문장들이 다가와 마음의 밥 짓기를 시작한다. 밥솥의 얼굴이 고요하듯 나의 표정도 변화가 없지만 내면은 문장의 열기와 압력을 고스란히 받아 견디고 있다. 어느새 밥이 다 되었다는 알림이 울린다. 뚜껑을 열면 솟아오른 김 사이로 뜨끈한 밥알이 보인다. 가지런히 누워있는 밥알을 저어주노라면 진한 밥 향이 퍼진다. 갓 지은 밥이 전해주는 온기는 내가 읽은 자로 누리는 그것과 닮았다.



직장생활과 자녀양육 사이를 동분서주하며 수시로 찾아오는 불안과 우울에 싸워야 했던 날, 읽기를 통해 나는 누군가가 되려거나, 무엇인가 생산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이미 많은 역할을 감당하고 있었고 초과 생산을 하는 중이었으니까. 어느 때보다 생을 열심히 살았지만 어찌 된 영문인지 나의 자아는 소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새벽 독서의 온기로 간신히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면 누가 믿으랴. 그저 밥 향을 따라 지그시 퍼지는 온기를 쐬려 글을 읽어 내려갔다.



그 세계는 아무리 소비해도 나처럼 소멸하지 않았다. 새로운 감정과 생각이 흘러나왔다. 책의 제목이 다름처럼 그 세계는 다채로웠다. 나의 시간을 정지시키는 힘이 있었고 무한의 끝자락으로 아무렇지 않게 나를 데리고 갔다. 희미했던 나의 취향, 능력, 즐거움이 그 세계와 만나 색이 진해져 갔고 외면했던 너와 우리의 현실과 의문들에 관심을 가지게 되며 나의 세계가 확장됨을 느꼈다. 




읽은 자가 만나는 세계는 글쓴이가 의도해서 만든 세계보다 항상 크다. 그 이유는 읽는 자는 자신의 세계 전부를 가지고 책을 열었기 때문이다. 읽는 자의 영역으로 침범해 들어오는 세계는 교집합이 되어 진하게 색을 덧칠한다. 읽는 자의 영역 밖에 있는 세계일지라도 읽는 자와 합집합을 이루어 그 색을 확장시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내가 읽는 자로 만난 세계에 대해 이제는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갓 지은 밥 같은 온기를 바라는 누군가를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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