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책방 글쓰기 모임 일곱 번째 날
오늘의 글: <계속해보겠습니다>
무섭지 않아? 하고 소라가 묻습니다. 아이를 낳고 부모로서 영향을 주고 그 아이가 뭔가로 자라가는 것을 남은 평생 지켜봐야 한다는 거...
엄마는 스물 일곱에 나를 낳았다. 내가 나오려고 진통이 시작됐을 때 남편은 일을 하고 있어, 혼자 택시를 타고 병원으로 달려갔고, 택시기사가 분만실 앞까지 함께 가줬다고 한다. 나는 스물 일곱에 취업을 준비하고 있었다. 아이를 낳는 것은 커녕 결혼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엄마는 지금 내 나이에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 큰 아이인 나는 학교에 다니고 있었고, 둘째는 아직 엄마 품에서 하루 종일 지내는 나이였다. 그 때쯤에 엄마는 첫 집을 마련했다. 나는 지금 직장에 다니고 있는 캥거루족이다. 여전히 아이를 낳는 것은 커녕 결혼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가끔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지금 내 나이에 이미 엄마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나는 해보지 않아서 다른 사람들의 말과 글로 간접 체험도 되지 않는 간접 체험을 통해 상상하는 그런 것을 어떻게 엄마는 해냈을까.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혼자 배에 아기를 품고 경험해보지 않은 것을 상상하고, 책임감을 만들어내면서 어떻게 지냈을까. 겨우 친정에서 몇백미터 떨어진 시가에 살면서 친정에 가지도 못하고, 중학생인 아가씨의 밥을 차리고, 철없는 도련님들의 술상을 차리면서 어떻게 지낸 걸까.
엄마에게 말하지 못했다. 나는 그런 것들이 너무 무섭다고. 끔찍하다고. 나는 도저히 못할 것 같다고. 그러나 그 결과로 만들어진 게 나였다. 나는 엄마가 그런 것들을 겪고 나서 만들어낸 존재이다. 그 모든 것들을 뚫고 나서 만들어진 존재이다. 그 존재가 엄마의 지나온 시간들을 무섭고 끔찍하다고 판단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 덕분에 내가 있잖아. 웃으면서 말하면 엄마는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징그럽다 야. 그 짧은 대답과 표정에서 지나온 시간에 대한 감정과, 그 지나온 시간으로 만들어진 존재에 대한 감정이 뒤섞여 있는 게 느껴졌다.
누구든 자신의 인생에 대한 결과물이 비록 찬란하지는 않더라도 돌아보니 좋았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만물의 창조주도 자신이 손수 만든 모든 것을 보니 참 좋았다고 말씀하시지 않았는가. 나도 찬란하지는 않더라도 돌아보니 그래도 괜찮았다, 정도는 말할 수 있게 해 주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