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교책방 글쓰기 모임 여덟 번째 날
오늘의 글: <내 아침 인사 대신 읽어보오>
내가 가장 사랑했던 여자애는 나를 떠났다. 나는 검은색 셔츠를 입는다. 나는 열 살 때 제분소에서 손가락을 베였다. 나는 여섯 살 때 차에 치여 코가 부러졌다. 나는 열다섯 살 때 경오토바이에서 떨어져 엉덩이와 팔꿈치 살갗이 까졌는데 손을 사용하지 않고 뒤를 보며 길거리를 무시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서사는 없고 순서 없이 '나'의 기호나 체험, 생각 따위를 나열한다. 화자의 말을 따라 퍼즐 조각을 맞춰가는 재미랄까? 파편적인 문장들로 이루어진 거대한 자화상 한 점 같았다.
우리나라의 아이들은 자기소개를 해 보라고 하면 대개 이름, 소속된 초등학교 이름과 학년과 반을 말한 다음 자기가 누구와 같이 사는지 가족을 소개한다고 한다. 아주 오래 전에, 적어도 10년은 더 전에 본 것이라서 지금도 아이들이 그렇게 자기소개를 하는지는 모르겠다. 내가 본 그 글에서는 그만큼 무의식적으로 아이들마저 자기가 어디에 속해 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했던 것 같다. 내가 속한 곳이 곧 나를 말해준다고 여기는 것이다. 그 점을 비판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고, 그만큼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 글을 보고, 그 때부터 지금까지, 내가 나를 소개한다면 어떻게 말할까 생각해 왔다. 내가 어디에 속해 있다는 것을 빼고 온전히 나 자신만을 소개한다는 것은, 대체 어디부터 시작해야 하는 일인 걸까? 어디에 속해 있지 않은 온전한 나 자신은 어떤 모습일까?
그것은 결국,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을 잘 하는지, 내가 어떤 것에 관심이 있는지 생각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내 취향과 능력과 관심 역시 사회에 속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것들은 한편으로는 내 소속과 상관없이 생기는 것이기도 했다. 그런 생각은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내가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계속 생각해 보게 했다.
저는 딱딱한 베개와 부드러운 담요를 좋아하고, 이불은 한여름에도 꼭 있는 게 좋아요.
주말에라도 되도록 뒹굴거리면서 시간을 보내고 싶어요.
여유가 있을 때는 휴대용 키보드나 그림도구를 들고 카페에 가서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는 게 좋아요.
볶음밥을 좋아해요. 중국집에 가면 깐풍기와 볶음밥을 시켜먹는 게 좋아요.
정치나 인문에 대한 책을 좋아해요.
어릴 때 교통사고를 당해서 발목이 부러졌는데, 그것 때문에 발목이 좀 약해요.
머리숱이 많아서 여름에 머리 말릴 때 시간이 너무 많이 걸려요.
저런 것들이 내가 다닌 학교, 내 직장, 내 가족에 대한 소개를 했을 때보다 타인에게 얼만큼 나를 잘 드러낼까? 내가 다닌 학교, 내 직장, 내 가족에 대한 소개를 하는 것이 사람들에게는 더 효율 높은 소개일 수 있을 것 같다. 나를 다른 사람에게 소개한다는 것도 결국 사회 속에서,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이고, 내가 속한 집단을 통해 나를 소개하면 그 집단은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기 때문에 나를 파악하기 쉽게 해 줄 것이다. 이런 학교를 나왔으니 이런 성향이겠지, 이런 직장에 다니니 이런 성향이겠지.
그러나 저런 소개, 내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에 관심이 있는지 늘어놓는 소개는 효율은 낮아도 진짜 '나' 하나만을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더 따뜻하고 부드러운 소개일 것이다. 저 소개를 들은 사람은 진짜 '나'에게 관심이 있다면, 한여름에 쓰는 얇은 시어서커 이불을 보거나 서점의 정치 코너를 보거나 중국집 메뉴판에서 깐풍기를 볼 때 나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나도 마찬가지로 검은 셔츠를 보면, 콧대가 조금 휘어진 사람을 보면, 당신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