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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물감 Jul 29. 2022

네가 좋다면 되었다

판교책방 글쓰기 모임 열 번째 날

오늘의 글: <애쓰지 않아도>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면 해주는 속으로 미소 지었다. 자신의 부모가 자신의 믿음만큼은 건드릴 수 없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어려서부터 해주는 자기 뜻대로 중요한 결정을 해본 일이 별로 없었다. 부모가 다니라는 학원을 다녔고 읽으라는 책을 읽었고 교사가 되어야 한다는 부모의 바람대로 교대에 갔다. 앞으로의 일들도 뻔했다. 안정적인 직업을 가진 남자와 결혼을 해서 아이는 둘 정도를 낳을 것이었다. 그 또한 부모가 세운 계획이었으니까.

대학교에 다닐 때까지는 당연히 서른 살 정도 쯤엔 결혼할 줄 알았다. 딱히 버둥거리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고민한 그 후의 미래는 아이를 낳을까? 그 정도였다. 아이를 낳고 키울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그 부분이 합의가 잘 될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려면 다른 사람을 만나고, 만난 사람과 관계를 지속시키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딱히 버둥거리지 않아도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첫 애인과 헤어질 때 그 애가 뭐라고 했더라. 마지막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너 같은 애는 아무도 오래 만날 수 없을 거라고 했다. 뭐래. 그 때는 헤어지는 순간의 분노로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 말은 점점, 그 애가 그를 얼마나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는 그 후로도 몇 사람을 더 만났지만 하나같이 그가 먼저 지쳐 나가떨어졌다. 그는 그 사람들과 오래 함께 있기 위해 노력하는 것을 귀찮아했고 싫어했다. 그는 선을 넘어오는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가질 수가 없었다. 그가 내면에 가진 선이 너무나 강했고, 그 안이 너무나 소중했고, 그 선을 넘어오게 할 만큼 누군가를 좋아한 적도 없었다. 그런 사람들과 오래 함께 하기 위한 노력을 할 수도 없었다.

당연히 결혼을 할 거라고 생각했던 서른 살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엄마는 선 자리를 찾아오기 시작했다. 주위의 여러 사람들도 결혼적령기라며 소개팅을 주선했다. 몇 번의 만남이 성사됐다. 어떤 만남은 그의 호기심이 동해서, 어떤 만남은 엄마의 바람이나 주선자의 추천을 거절할 수 없어서였다. 그러나 만남은 대개 그의 생각과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그들은 결혼을 할 사람을 찾으러 나왔고, 그가 결혼상대로 적당한 재력과 능력과 성품을 가졌는지부터 판단했다. 그는 그들이 내 선을 넘어올만한 조건을 가졌는지부터 판단했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피곤한 만남의 시기는 몇 년 후에 거의 끝났다. '사회가 정한' 결혼적령기를 넘긴 그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유의 몸이 되었다.

그런 시기를 지나고서야 첫 애인이 한 말을 다시 떠올릴 수 있었고, 그가 진짜 원하는 미래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비록 지금 원하는 미래가 더 후의 그를 힘들게 하고 외롭게 하더라도 그는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길 원하는 게 아니었다. 그들이 아니어도 외롭지 않았고, 그 안의 선을 공고히 해서 그 안에서 푹 쉬고 행복하고 싶었다. 그는 그가 좋아하는 것을 '하나뿐인 사람'이 아닌 다른 것에서 찾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사람이 아닌, 그가 좋아하는 것이 매우 많았다. 그의 시간은 일과 그가 좋아하는 것들과 가족 구성원으로서 해야 하는 일들로 차곡차곡 잘도 채워져갔다.


부모가 생각한 자식의 미래가 있었다. 그것은 자식인 그가 생각한 것과 비슷했다. 그는 엄마와 아버지가 생각한 대로 모범생으로 자랐고, 그런대로 좋은 대학에 입학했다. 그런 큼직큼직한 것 뿐만 아니라 아주 세세한 것까지 그는 엄마와 아버지가 생각한 대로 자랐다. 옷을 입고 신발을 신는 것, 음식을 먹는 것, 책을 고르는 것도. 그러나 더 먼 미래를 결정하는 것만큼은 엄마와 아버지가 생각한 대로 되지 않았다. 그는 부모가 결정한 미래에서 멀어지고나서야 자기가 원하는 것을 스스로 찾고 행복해지기 시작했다.

단 하나 문제는 자식은 이제 부모에게 죄책감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자식이 부모가 원하는 미래를 드리지 못할 거라는 것. 자식은 부모와 별개의 인생인데도, 부모가 원하는 미래를 드리지 못할 거라는, 불효자가 될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웠다. 자식은 부모가 다른 사람들의 자식의 결혼식에 가거나 손자의 돌잔치에 간다고 할 때마다 움츠러들었다. 죄인이 되었다. 얼마나 부러울까, 나는 늙어가는 부모의 품에 손자를 안겨드릴 수 없을텐데. 다른 사람들에게 축하의 말을 들을 수 없을텐데. 그런 죄책감의 시간은, 첫 애인이 '너 같은 애는 아무도 오래 만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던 것의 의미를 되새기고 동의하게 되는 시간만큼 길었다.


그 집 아기 보러 같이 가자.


엄마가 같이 가자며 그의 등을 밀었다. 그는 싫다고 했다. 이유를 묻는 엄마에게 고백했다. 나는 죄책감을 갖고 있다고. 도저히 엄마랑 같이 다른 집 아기를 볼 수가 없다고. 나는 엄마가 그 아기를 안아보면서 부러워하는 것을 볼 수가 없다고. 몇 시간 동안 더 이상 말이 없었다. 몇 시간만에 엄마는 다시  그의 등을 밀었다. 네가 선택한 것에, 네가 후회하지 않고 행복할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괜찮다. 부럽지, 당연히 다른 사람들이 부럽지. 하지만 네가 스스로 벌어먹고 세상에 두 다리 내리고 살면서 혼자서도 잘 지내면 엄마는 엄마 몫을 한 게 아니겠냐. 그러니 엄마가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넌 네 인생을 더 잘 즐기고나 살아라. 그러니까 그러고 있지 말고 가서 맛있는 밥이나 먹고 오자.

그는 처음으로 엄마와 같이 가서 다른 집 아기를 보고 왔다. 아기를 품에 안고 웃으면서 부러워하는 엄마를 봤다. 마음이 아프지 않았다고 하면 거짓말이다. 웃고 있었지만 그 웃음은 가면이었다. 그러나 속으로 생각했다. 앞으로 계속 생각할 그 말을.

 

가 스스로 벌어먹고 세상에 두 다리 내리고 살면서 혼자서도 잘 지내면 된 거 아니겠냐. 그러니 엄마가 다른 사람들을 부러워하면 그냥 그러려니 하고 넌 네 인생을 잘 즐기고나 살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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