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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킴 Jan 25. 2023

나탈리 카르푸셴코 사진전 (下)

12/23, 그라운드시소 성수

지난 이야기: 카르푸셴코는 태초·근원과 공생의 터인 물을 사진으로 표현했다. 또 뭘 표현하고 싶었을까?


Rising Woman

이 섹션에서는 카르푸셴코가 무엇을 보여주고 싶었는지 감히 요약해서는 안 될 것 같다. 작품을 요약하는 행위는 모두 폭력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항상 하지만, 특히 이 섹션을 관람할 때에는 더욱 숙연해졌다. 카르푸셴코가 물, 자연물과 함께 촬영한 모델들이 꼭 여성으로 국한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섹션과 뒤에서 다룰 Wild Breath의 모델은 모두 여성이며, 대체로 꾸밈없이 나체로 촬영했다. 이번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모든 것의 뿌리 (1)

감히 추측해보자면, 카르푸셴코가 물을 활용해 어떤 근원, 발생지, 태초, 공생과 공존 등을 표현하기 위해 연출에 힘썼다는 점으로 미루어보아 그는 그 모든 특성들이 요즘 조명받고 강조되는 여성의 이미지와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아니, 물보다 근원의 이미지를 더욱 강하게 드러내는 것이 여성이라고 생각하는지도 모르겠다. 웅크리고 있는 자궁 속 태아의 모습으로 사람들의 자세를 연출한 점도, 위 사진의 글귀도 이런 이유에서이지 않을까. 'Rising woman', 이 섹션에서만큼은 여성들에게 온전히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불편한 자세의 다양성

흥미롭게도, 그러나 너무나 예상가능하게도, 이 섹션도 모두 나체로 촬영한 사진들이다. 결코 즐겁지만은 않은 촬영이었을 것이다. 염분 때문에 몸이 따끔거리는 것을 참아가며 수중 촬영을 강행하고, 바위 위에 나체로 누워 몸을 홈에 구겨넣은 채로 꽤 오랜 시간을 버티며 촬영을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고됨이 느껴져서 더욱 숭고하게 느껴졌다. 카르푸셴코의 다양한 촬영방식에서 일관적인 가치관이 드러나는 것도 참 신기했다. 온갖 방식으로 촬영을 하는데도 어쩜 이렇게 한결같은 이야기를 전달할 수 있을까?

숨참고~ (1)
숨참고~ (2)

개인적으로 이 두 다이빙 사진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내맘대로 하는 해석이지만, 물에 뛰어들면서 일어난 기포가 흡사 로켓 발사를 연상하게 해서, 로켓이 발사되면서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지듯이 물속으로 솟구치며 자유로움을 만끽하는 느낌을 받았다. 갑판에서 마치 피터팬마냥, 또 잭 스패로우마냥 힘껏 점프해서 바다로 뛰어드는 것도 참 생기있어 보였다. 흑백사진인데도 말이다.

모든 것의 뿌리 (2)

카르푸셴코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한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매우, 정말 매우매우 오래 산 나무라고 설명에 적혀있던 것 같다. 뿌리와 밑동이 굵고 튼튼해서 절대 쓰러질 것 같지 않은 나무와, 나무의 결을 따라 누워 마치 함께 자라나는 것처럼 — 심지어는 그들이 뿌리의 일부인 것처럼 — 거기에 누워있는 여성들을 함께 담았다. 이런 사진들을 보면 늘 영화/사진 연출을 공부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만 든다. 

Wild Breath

Wild Breath 섹션 또한 여성 모델과 함께 다양한 동식물을 같이 담았다. 차이가 있다면, Rising Woman에서는 스포트라이트가 '여성'이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단체 사진이 대부분이었다. 또, 큰 나무, 해양 주변의 바위 등 거대한 자연물이나 장소를 활용하고 이를 사진에서도 강조한 경우가 많았는데, 이 섹션에서는 동물 또는 꽃이나 풀들과 함께 찍힌 모델들의 단독 사진이 주를 이루며 둘이 함께하고 있는 모습 자체를 배경보다 더 조명하고 있다.

왠지 너무나도 마음에 드는 사진

이 사진이 왜 그렇게 좋은지 모르겠다. 작품 해석이나 디테일 분석했을 때 고도의 표현력이 느껴진다기보다는 그냥 있는 그대로 사진에서 느껴지는 분위기가 너무 좋다. 생각에 잠긴 눈으로 건너편을 바라보는 모델의 표정도 좋고, 머리에서 나뭇잎이 뻗어나가는 모양새도 좋다. 하와이 여행갔을 때 야자나무를 들고 친구들의 모습을 이런 느낌으로 비슷하게 찍어줄 걸 그랬나, 싶다. 물론 카르푸셴코에 비하면 한참 모자란 사진 실력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사진이 됐을 테지만 말이다. 

치타 너 이렇게 순한 동물이었어?

Rising Woman이 자연물의 일부로서의 여성을 담았다면, Wild Breath는 자연물과 교감하고 있는 여성, 그러니까 대등한 관계로서의 여성을 보여준다. 그래서 낯설면서도 감탄을 자아내는 사진들이 많았다. 이를테면 치타를 꼭 끌어안고 찍은 모습이라든지, 성내며 달려들 것만 같이 생긴 소 위에 안장이나 기타 보호장비 없이 가볍게 걸터앉아 있는 모습이라든지. 따지고 보면 지능이 조금 더 높다는 것을 근거로 — '지능'이라는 것도 어찌 보면 우리 인간이 만들어낸 하나의 추상적인 개념일 뿐이다 인간이 우월하다는 잘못된 결론을 도출하고 우리 주변의 많은 것들을 오로지 도구와 수단, 또는 장애물로 여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인간에게 쾌락과 편의를 제공하면 좋은 것, 그렇지 않으면 제거해야 할 골칫덩이와 적으로 치부하는 색안경을 쓰고 주변을 바라봤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드는 섹션이었다.


11월, 이곳 그라운드시소 성수에서 열었던 <비비안 마이어 사진전>에서는 자연물이 아닌 길거리에서 찰나의 역할극 같은 장면을 포착함으로써 사진의 뒷이야기에 대한 궁금증을 자아내는 사진들이 주를 이뤘다. 반면 카르푸셴코는 의도적으로 모델들을 자연 속에, 자연 옆에 배치함으로써 다양하면서도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노력했다.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나는 사진이 좋다. 사진은 이야기가 될 수도, 메시지를 주는 작품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여럿이서 먹다 남은, 누구도 건드리지 않는 마지막 한 스푼을 찍으면서도, 심혈을 기울여 예쁜 노을 앞에서 화보 찍듯이 친구를 찍으면서도 늘 이 모든 것들을 사진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고 즐겁다. 

80억명에 육박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과 생각의 변화를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도, 그렇게 선택한 방법이 사진 촬영이라는 것도 참, 뭐랄까. 모르겠다. 그냥 마냥 좋은 것 같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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