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병철 선생님이 오로지 책 제목만으로 세상에서 날려버린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다. 『에로스의 종말』, 『리추얼의 종말』, 『사물의 소멸』, 『고통 없는 사회』, 『타자의 추방』… 네댓 권쯤 읽고 나니 다음에 책을 쓰실 땐 또 무슨 개념을 없애시려나 궁금해진다. 왠지 『사회의 종말』도 곧 출간될 것 같다는 장난스런 예측을 해 본다.
사실 우스개소리로 한 말이지, 한 선생님의 저서들을 읽다 보면 제목에 언급된 부류의 개념들은 다 부정(否定)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런 부류의 개념이란, 말장난 같겠지만 '부정성'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개념들이다. 지금 말하는 부정성은 '그렇지 않음'의 의미보다 '다름' 또는 '나에게 반하는/저항하는 것'의 의미로 이해하는 게 조금 더 이해하기 편할 듯하다. 아주 과감히 요약하자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모든 것들이 다 공장에서 찍어낸 것마냥 똑같은 것들이라는 게 된다.
사물은 조금 복잡하지만 에로스, 리추얼, 타자 같은 것들과 유사한 특징을 지닌다. 어쨌든 사물이라는 것은 "지속하는 형태를 띠고 삶을 위한 안정적 환경을 형성하는" 것들이며 동시에 손으로 움켜쥘 수 있어야 하고 — 이 부분은 작가가 하이데거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이 드러나는 대목인데, 독자인 나는 그 개념에 대해 잘 모르므로 우선은 넘어가도록 하겠다 — 앞서 말한 '부정성'을 띠는 아주 복잡한 개념이다. 자연물 따위의 아주 구체적인 대상부터 '사회'라는 다소 추상적인 개념까지, 이 '사물'이라는 범주에 포함될 만한 것들이 꽤 많아보인다.
그런데 현대 사회는 디지털 사회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작가가 기술한 '사물'의 특징과 아주 반대된다는 걸 알 수 있다. 디지털 정보는 역동적으로 변하고, 따라서 안정적일 수 없다. 문자 그대로든 철학적 의미를 고려해 해석하든, 결론적으로 정보는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 여기서 움켜쥐는 것은 '감동', '감정'같은 개념과 관련이 있다 — 것이다. 디지털 세상의 커뮤니티에서는 부정성도 성립하지 않는다. 개개인 사이의 상호작용과 소통은 모두 '좋아요'로 치환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작가는 사물이 소멸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특징을 지닌 디지털 사회에서는 애초에 사물의 특성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어때, 쉽죠?
책의 챕터 중 「스마트폰」, 「인공지능」에 대한 부분이 인상적이었다. 이상하게 작가의 분노와 극도의 꺼림이 느껴지기까지 하는 챕터였다. 작가는 이 두 녀석을, 우리가 손으로 움켜쥘 수 없는, 즉 보고 듣고 느끼고 우리 나름대로 해석할 여지를 주지 않는 세상으로 우리를 끌고 들어가는 존재(스마트폰),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죄다 똑같은 것들로 치부해버리고 '나름의 해석' 없이 오로지 아웃풋을 뽑아내는 기계(인공지능)로 묘사하고 있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특히 사진첨부된 대목을 읽고는 좀 흠칫했다. 상대방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을 때 종종 써먹는 '안읽씹'이 생각나서 소름이 돋기도 했고. 어쨌든 이 스마트폰과 인공지능은 사회에서 '다름'을 점점 사라지게 하는 주범이라는 것에는 십분 동의한다.
한병철 선생님의 저서를 읽고 나서 늘 드는 생각은, 내가 사는 현대 사회가 좋을 게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도 요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생각하는 것 같다. 작가가 스마트폰이 없던 시대의 철학자였다면 현대 사회를 어떻게 바라봤을까, 그럼 작가는 이 공장 생산품처럼 다 똑같은 사회인들이 이 사회를, 자신을 어떻게 바꾸길 바라는 걸까, 개개인의 개성과 다름이 모두에게 인식되는 그런 사회로 회귀 — 그런 적이 있긴 했었냐마는 — 하길 바라는 걸까, 바뀌고 바꾸길 바라는 건 맞나, 뭐 그런 비판 아닌 비판을 하게 된다. 철학자의 딜레마인 것 같기도 하다. 사회의 단면을 날카롭게 포착하고 뼈아프게 비판하지만 그것에 대한 시원한 해결책의 제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는…
※한병철 작가의 저서를 읽고 싶다면, 개인적으로 『피로사회』, 『에로스의 종말』, 『타자의 추방』을 읽고 다른 것들을 시도하는 것을 추천합니다. 하이데거에 대해 조금 찾아보고 읽는 것이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