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과 폭력에 관하여
6월은 Pride Month. 한국은 이를 기념하지 않지만, 미국에서는, 특히 캘리포니아주에서는 아주 화려한 퍼레이드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에 있는 동안, 얼굴에 무지개 빛깔로 페이스 페인팅을 하고 퍼레이드를 하는 사람들을 향해 환호하는 상상을 하곤 했다. 6월 전에 미국을 뜬 것이 못내 아쉽기만 하다.
모두가 존중받고, 모두가 자신만의 빛을 발산하며 살아가기를 기원하는 달이니, 용기를 내어 약간의 소신 발언을 해보고 싶다.
최근 개봉한 <인어공주>를 보고 많은 생각을 했다.
먼저 영화에 대해 평하자면, Halle Bailey가 묘사한 인어공주는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여론이 인어공주에게 어떤 외형/성격을 기대했든, 개인적으로는 충분히 납득 가능한 에리얼이었다고 본다. 90년대 어린이들에게 비현실적인 외모와 몸매로부터 어딘가 잘못된 미의 기준을 만들었던 디즈니가, 2D 영화를 실사화하면서 다양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러한 기준을 완화 —타파— 하려는 시도로도 느껴졌다. 그런 점에서 디즈니의 행보를 열렬히 응원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과하게 늘어난 러닝타임과 다소 어두운 영상 효과로 처지는 느낌을 주었다. 또, 인어와 인간으로 형상화되는 서로 다른 두 세계의 공존, 화합을 그려내긴 했지만 결국 인어인 에리얼과 인간인 에릭이 함께하기 위해서는 인어가 인간의 형상을 따라야 한다는, 어쨌든 한 쪽으로 순응해야 한다는 식의 결말을 바꾸지 못했다는 아쉬움도 컸다. 요즘 영화 티켓값이 지나치게 비싸니… 디즈니 플러스 구독자라면 조금 기다렸다가 좋은 음향기기를 연결해서 스트리밍으로 보길 권한다.
이 영화에 대한 여론을 지켜보는 나의 입장은 조금 애매하다. 우선, 영화의 내용과 별개로 이 영화의 설정에 대해 오로지 ‘취향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주연 배우와 디즈니에게 필요 이상의 비난을 하는 것은 아주 잘못됐다고 본다. 왕자 에릭이 흑인 어머니에게 입양되었다는 설정으로 나오는데, 처음에 들으면 응? 싶은 것은 사실이나 막상 영화에서는 정말 별것도 아니다. ‘각색’인데 그 정도는 용인해도 되는 것 아닌지. 영화를 보지 않은 채 피상적인 것들을 마치 그것들이 영화의 전부인 것마냥 비난하는 것은 취향의 문제를 떠나 옳지 못한 태도인 것 같다.
그런데, 영화 플롯이나 그래픽, 기타 아쉬운 부분에 대해 비판적인 의견을 내는 사람들에게 인종주의자라며 거세게 비난하는 것 또한 매우 잘못됐다고 생각한다. 어떤 영화든 개인의 감상은 다를 수 있고 따라서 아쉬움을 느끼는 지점도 다르기 마련인데, 단지 이 영화가 인종주의의 도마 위에 올랐다고 해서 영화에 대한 모든 비판을 다 인종주의적인 것으로 여기고 비판을 비난으로 해석하는 여론도 적지 않다.
이쯤되니 나도 헷갈리기 시작한다. 이 비판의 원천이 영화의 순수한 부족함인지, 아니면 여론의 실망에서 비롯된 볼멘소리인지 말이다. 만약 빨간머리를 가진 아리따운 백인 배우가 주연을 맡았다면, 이렇게 우중충하고 아쉬운 결말을 내포한 이 영화에 그런 비난이 쏟아졌을까? 어쩌다 이렇게까지 여론이 과열되었을까? 쉬이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상황이 이렇게 되니, 어떤 말을 하든, 어떤 글을 쓰든 점점 사족을 붙이는 일이 많아진다. “물론 그 집단을 비난하려는 것은 아니지만 …” 또는 “이렇게 말하는 것이 폭력일 수도 있지만 …” 하는 식으로 말이다. 한 마디가 열 마디가 되고, 말에 힘 대신 긴장이 들어간다. 뭐가 폭력이고 뭐가 아닌지도 사실 잘 모르겠다. 점점 입을 다물게 되는 것도 같다. 속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극도로 예민하고, 과열되어 있고, 그러다 쉽게 분열되는 우리는 과도하게 존중하고 존중받으려고 하는 것 같다. 뭐가 존중인지도 모른 채로.
어디까지 존중해주고, 어디까지 존중받을 수 있는지 사실 잘 모르겠다. 그 기준이 국경에 따라, 사회적 지위 또는 살아온 환경과 가치관에 따라, 심지어는 간혹 기분에 따라서도 달라지는 것이 당연한 줄 알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금 우습다. 넘쳐나는 존중은 관계의 당사자들 사이에 허물어질 수 없을 만큼 견고한 장벽을 만든다. 부정적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이는 배려의 현대적인 형태일 수도 있다. 확고하고 완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들끼리 각자의 자아를 지키고 지켜주는 방법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적당히 ’선을 지키며‘ 마찰 없이 지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배려의 대상이 한 명의 타인이든, 다수의 집단이든, 나아가 전세계이든 적어도 그와의 관계에서 발전을 원한다면 말이다. 사람들 사이에 형성된 어떤 연결이 존속하고 나아가 발전하려면 현상태를 그저 지속하는 것만으로는 역부족이다. 유지와 발전은 사전적 정의만으로도 정반대의 개념이다. 발전을 위해서는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가는 것” 즉, 다가가는 것이 필요하다.
다가가면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다. 나는 나를 둘러싼 세계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과 다르기 때문이다. 어떤 페미니스트 채널에 올라온 쇼츠 중, “what others say about me is actually none of my business (남들이 내게 뭐라고 하든지 그건 내 알 바 아니에요),”라는 짧은 말이 기억이 난다. 맞는 말이다. 나에 대해 맘대로 지껄이라지, 뭐! 물론 그 말의 취지는 사람들과 담 쌓고 내 뚝심만 지키라는 무책임한 말은 아니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는 가드를 내리고 마찰을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짜 폭력을 구분해내는 법, 다름에서 비롯된 마찰과 상처를 스스로 또는 누군가의 도움으로 치유하는 법, 때때로 다름을 맞추어 나가는 법, 제때 맞서고 제때 포용하는 법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사람/커뮤니티/사회와의 결속이 강해지고 발전하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든다.
‘표현의 자유’라는 강한 권리를 무기로 삼아 결백한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는, 그 권리가 존중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무기로 타인의 권리를 제한하고 억압하지 않는, 조금 덜 과열되고 더 다정한 사회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