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을 편하게 하려고 몸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글 | 찰리
델몬트 병에 들어있는 시원~한 보리차 한 잔. 2년 전 예능 <삼시세끼: 산촌편>을 보면서, 먹음직스러운 여느 음식보다 그 보리차 한 잔이 마시고 싶었다. 어릴 적 놀이터에서 흙을 잔뜩 묻혀가며 해 질 녘까지 놀다 집으로 돌아가 꼬질꼬질한 손을 씻지도 않은 채 손날로 컵을 들어마시던 '그' 보리차의 추억을 소환했달까.
지금은 물을 '사 먹는 것'이 당연하지만, 청소년기의 내게 물은 '끓여먹는 것'이었다. 주로 보리차나 결명자였는데, 간혹 정보 프로그램에서 몸에 좋은 차를 소개라도 하면 물 끓이는 냄새가 달라졌다. 엄마는 무슨 나무, 어떤 식물들을 푹푹 끓였다. 그 물에 밥도 말아먹고, 작은 병에 담아 얼려서 손수건으로 싸 학교에 가져가기도 했다.
소풍 때면 새벽같이 일어나서 김밥을 싸시던 엄마가 천오백 원을 주머니에 넣어주며 집 앞 김밥집에서 한 줄 사가라는 말을 하실 때쯤, 우리도 생수를 먹기 시작했다.
최근 동거인들에게 십여 년의 생수 생활 청산을 선언했다. 다시 물을 끓여먹어 보자고. 계기라고 한다면 어느 순간 하루가 멀다 하고 가득 차는 쓰레기봉투가 징그럽게 느껴졌다는 거? 물은 매일 마시는 것이니 며칠만 지나도 빈 페트병이 방 한편에 가득 쌓였다. 지구의 쓰레기 문제는 내가 보태 말할 필요 없이 심각한 지경이다. 거북이를 아프게 한 플라스틱 빨대, 쓰레기로 가득 찬 새의 사체를 그냥 보고만 있기엔 불편한 마음이 한계에 다다랐다. 여전히 걸어 다니는 쓰레기 공장이지만, 조금이라도 바꿔볼 수 있지 않을까.
잘게 나뉜 '쓸모'와 형형색색 쓰레기들
머리 감을 때 샴푸, 몸은 바디워시, 얼굴 씻을 때는 폼 클렌저, 설거지, 빨래 등등 용도에 따라, 상황에 따라 일상 속에서 수가지의 비누를 사용한다. 학창 시절, 친구들 사이에서도 유독 '뷰티 영역'이 부족했던 나는 로션도 제대로 안 바르고, 하교 후에는 비누로 얼굴을 벅벅 씻던 아이였다. (여기엔 자신을 돌보기 보다는 애 셋을 키워야 하는 젊은 엄마의 고난함이 묻어있다.) 여하튼 난 썩 불편하지 않았다. 지금처럼 일거수일투족을 또래집단과 공유하던 문화도 없었고,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동네는 그런 나도 잘 놀아주는(?) 마음 착한 친구들이 있었다.
성인이 되고 나서 뭔가 당연스럽게 화장을 배우게 되었다. 화장을 하기 시작하면서 '좋은 것'을 찾아 바르고, 그것을 또 '더 좋은 것'으로 씻어내는 것에 관심을 가졌다. 뭘 쓰면 살결이 고와진대, 여드름이 안 난대… 점점 더 교묘해지는 광고 기법으로 끊임없이 '필요성'에 노출시키면 나처럼 순진한 소비자는 그 '쓸모'를 덥석 받아들인다.
잘 모르던 시절에는 살구비누 오이비누로만 슥삭슥삭 씻어도 충분히 깨끗했는데, 이제는 얼굴은 꼭 클렌징 폼으로 씻어야겠고, 화장이라도 하면 클렌징 오일 등으로 초기 세안을 해줘야 완벽히 개운해졌다. 샴푸로만 감던 머리를 괜히 린스며 트리트먼트며 세럼이며 더 바르게 되고, 마치 원래 살 냄새(윽) 같은 향긋한 바디워시를 고른다. 아, 스트레스로 머리가 좀 많이 빠지는 것 같아 탈모 샴푸도 구비해뒀다.
이런 잘게 나뉜 쓸모 때문에 가지각색의 쓰레기가 만들어진다. 비누의 종류에 따라 패키지도 다양한데 플라스틱 관과 금속 스프링이 들어있는 펌프형, 짜서 쓰는 튜브형… 각기 다른 모양처럼 플라스틱이라도 다 같은 플라스틱이 아니다. PETE(소위 페트병), HDPE(고밀도 폴리 에틸렌) 등 종류도 여러 가지고, 분리배출 표시가 되어있다고 다 재활용이 되지도 않는다.* 분리배출로 나름 죄책감을 덜었는데 단단히 잘못 알고 있었다. 분리→재활용도 중요하지만 쓰레기 자체를 줄이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바꾸기, 다시 쓰기, 불편해지기
바꾸기
마침 필요했던 물건부터 바꾸기로 했다. 플라스틱 재질인 것들은 생분해 가능한 제품으로 대체했다. 나무 칫솔, 생분해 생리대, 건조된 수세미 열매, 삼베 샤워망을 새로 샀다. 생리대 같은 경우는 생리컵이 대체제로서 더 좋을 것 같지만 아직 한 번도 사용을 해보지 않아서 올해 중으로는 도전을 해볼 생각이다.
다양했던 비누들은 슬슬 한 가지로 통합을 해볼 생각이다. 일단은 바디워시와 주방세제를 바꾸기로 했다. 특별히 민감한 피부가 아니라서 비교적 포장이 간단하고 가격도 저렴한 도브 비누를 다량으로 구매했는데 향도 좋고 특별한 불편함을 느끼진 못하고 있다. 비누는 금방 물러버리니 비누 갑을 꼭꼭 이용하면 좋을 듯하다. 나는 마침 굴러다니던 비눗갑이 있어서 사용 중인데 다 쓴 페트병 등으로 물 빠짐 구멍을 만들어 쉽게 사용할 수 있을 것 같다.
당연히 주방 세제는 액체여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자연 재료로 만든 고체형 세제도 많이 있었다. 물론 최저가를 검색해 쓰던 시절보다는 번거로운 것은 사실이지만, 사용하다 보니 은근히 쉽게 무르지도 않고 익숙해지니 특유의 뽀득뽀득함이 좋아졌다.
세탁 세제 대용품은 열심히 찾는 중이다. 독일이나 캐나다에서 생산되는 100% 생분해 종이 세제 등이 있지만 한 번 살 때 가격이 부담된다. 소프넛이라고 저절로 거품이 나는 자연 열매도 있는데 이 열매의 세정력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고.* 물론 난 귀가 얇아서 한 자루 샀지만. 일단은 사용하고 있던 세제의 양을 절반 이상 줄이고 소프넛을 면 주머니에 넣고 함께 빨고 있다. 아직까지는 만족스러운데 소프넛만 넣고 빨아볼 때까지 지켜보는 걸로.
다시 쓰기
모든 물건을 생분해, 자연 친화적인 것으로 바꾸면 좋으련만 이는 많은 비용이 들고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 한번 산 것을 여러 번 쓰는 것도 좋은 방법이 될 것 같다. 대표적으로는 텀블러가 있다. 처음에는 귀찮기도 하고 자주 까먹었는데 이제는 집에 돌아가면 병을 씻고, 아침에는 간밤에 말린 병을 들고 나오는 습관이 들었다. 또한 가방에 다회용 장바구니를 들고 다닌다. 예전에 태국 여행을 하면서 콘도 마트에서 받았던 부직포 장바구니인데 한 번 쓰고 버리기엔 튼튼하고, 무게도 부피도 차지하지 않아 들고 다닌다. 이제는 어떤 물건을 사더라도 당당하게 말한다. "봉투는 괜찮습니다!"
"혹시 당근이세요...?" 밈인줄만 알았는데 실제 당근 거래를 해보니 나도 하게 되더라. 친구가 에어프라이어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당근 했다'(당근마켓 중고거래)고 자랑 자랑을 하길래 가입을 했는데, 은근히 쏠쏠하다. 나 역시 새 에어프라이어를 아주 합리적인 가격에 득템 했고, 이사를 준비하며 멀쩡하지만 가져갈 수 없는 물건들을 무료 나눔 했다. 버리기 너무 아까웠던 이 물건들이 누군가에게 쓸모 있게 쓰인다는 기쁨과, 그리고 물건과 함께 오가는 소소한 정이 참 매력 있더라.
불편해지기
나 살기도 벅찬 세상에 환경까지 보살펴야 하는 삶은 사실 불편함 투성이다. 터치 몇 번이면 내일 아침 당장 물건을 받아볼 수 있는 이 편리한 시대에 발품을 팔고, 몇 가지의 행동을 더하면서 하루를 채워나가야 한다. 2리터 물을 끓여 먹으려면 수돗물을 받아 주전자에 팔팔 끓이고, 차를 넣고 조금 더 끓이고, 식혀서 냉장고에 넣기까지 몇 시간이 걸린다. 생수 2리터는 저렴할 땐 500원 정도면 살 수 있는데. 친환경 제품들은 대부분 동네에서 손쉽게 살 수도 없어서 택배거래가 불가피하다. 환경을 보호하려고 샀던 친환경 물건이 내 집에 오려면 탄소 발자국을 남겨야 하는 이 아이러니. 아니 왜 나만 고군분투해야 해? 그냥 딱딱 척척 만들어주면 얼마나 좋아. 나만 사냐 지구에? 갑자기 급발진하기도 한다. 참 어렵고 먼 길이다.
기술의 발달은 정말 많은 것을 남겼다. 거대한 쓰레기, 누런 하늘과 답답한 마스크까지도. 불편하던 때로 돌아가 보는 건 어떨까. 아껴 쓰고, 나눠 쓰고, 바꿔 쓰고, 다시 쓰다 보면 불편한 마음이라도 덜 불편해지지 않겠어.
▽같이 보기
*KBS, “애써 씻고 말려서 버렸더니, 재활용 안 되는 플라스틱”
http://news.kbs.co.kr/news/view.do?ncd=5106314&ref=A
*닷페이스, 화장품 회사에 재활용 안 되는 화장품병 다 쏟아놓고 왔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y42OL-uhtUs
*경향신문, 음식 버리면 재앙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32&aid=0003063986
*연합뉴스, '오우 맙소사'...인도 떠돌이 소 배에서 71kg 쓰레기 나와
https://www.yna.co.kr/view/AKR20210315117400009?section=international/all&site=hot_news
*한겨레, ‘환경친화’ 좀 하려는데 왜 나만 피곤해야 하지?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8&aid=00025427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