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고 싶다, 잘
글 | 찰리
나는 원래 눈물이 많다. 근데 요즘은 좀 심하다. 원래는 세면대의 수도꼭지 같았다면 지금은 소양강 댐이다. 눈물샘이 고장이라도 난 것처럼 아무 때나 눈물이 난다. 인정하기 정말 싫은데, 슬럼프에 빠진 것 같다.
슬럼프는 쓸데없이 깊은 자아성찰에서 시작한다. 돌이켜보면 내가 제대로 해낸 게 있나. 이것저것 들쑤신 건 있는데 그 중에 내가 제대로 마무리 지은 것이 있던가. 지금의 지독한 지루함과 달갑지 않은 애매한 안정감은 제대로 된 시작과 끝이 없었던 것 때문은 아닐까. 잠기지 않는 수도꼭지처럼 쏟아지는 생각을 막을 길이 없다. 아아 지겨워라.
요즘 내 일상에 새로움이란 없다. 온 힘을 다해 가만히 있으려고만 한다. 밖으로 나가서 하는 활동들은 방역을 핑계로 최소화 하고, 그나마 남은 취미는 유튜브나 넷플릭스 등을 보는 건데 그마저도 이미 수십 번은 돌려본 것들을 보고, 또 볼뿐이다. 아니 사실 틀어놓는 것에 가깝다. 새로운 생각과 감정은 벅찬데 너무 고요하고 적막하면 또 눈물이 픽 날 것 같아서. ‘힘들어’ ‘행복하지 않아’ 온갖 부정의 언어가 시시때때로 샘솟고, 이를 외면하기도 체념하기도 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그럼에도 우울함에만 매몰되기는 싫다. 아무 때나 툭툭 터지는 눈물의 양만큼 공감능력이 좋은 건 아닐까. 인류애 뭐 그런 거. 삶에 대한 애정이 너무 강해서 버거운 건 아닐까. 쁘걸 꼬북좌님도 그랬댔어. 너무 살고 싶은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랐었다고. 나도 그저 잠시 길을 잃은 것뿐이야. 다들 그렇게 산다잖아.
제대로 한 게 없든 요란법석이든, 내 인생이다
얼마 전 영화 '나를 차버린 스파이'를 다시 봤다. 그날도 집은 고요했고, 심각해지고 싶지는 않았으며, 남은 주말 시간을 채울 무언가가 필요했다. 케이트 매키넌의 밑도 끝도 없는 말장난에 맥없이 웃고 싶기도 했고, 멋진 여자 둘이 우당탕탕 총 쏘는 액션 영화는 못참지.
밀라 쿠니스, 케이트 매키넌 주연의 액션 코미디 영화 '나를 차버린 스파이'는 스파이였던 전 애인 덕분에 위험한 물건을 옮기게 된 두 친구의 어드벤처 버디물이다. '문자 이별'을 당한 것도 짜증 나는데 난데없이 첩보작전의 키가 되어버린 오드리(밀라 쿠니스)와 그의 절친 모건(케이트 매키넌)은 죽기 전에 유럽은 가봐야 할 것 같아서 일단 여정을 떠나고, 쫓기는 와중에도 깜빡이를 켜는 스파이라기엔 어딘가 부족하고 생활감이 넘친다. 생활밀착형 인물들은 초짜 스파이의 유쾌 상쾌 통쾌 액션활극이라는 겉모습을 넘어 묘한 위로를 전달한다.
먼저, 오드리는 뭐든 끝까지 해본 적 없는 사람이다. 타고난 것도 없고 법대, 예술대도 다녀봤지만 둘 다 중퇴했다. 제대로 된 성취를 갖지 못했다는 것은 오드리의 콤플렉스이다. 이런 오드리 곁엔 그가 가라앉을 틈을 주지 않는 인간 활력소 절친 모건이 있다. 배우 지망생인 모건은 극강의 낙천주의자로 상처 따윈 받지 않을 것처럼 보이지만 그에게도 '과하다'는 말은 아프다.
존재감 없던 한 사람이 갑자기 세계 평화를 가져올만할 임무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얼렁뚱땅 해낸다는 것은 영화적인 장치이다. 어쨌든 오드리는 기지를 발휘해 총을 쏴 목숨을 지키고, 훈련된 특수요원들의 눈을 속이기도 한다. 지독하게 운이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모두 오드리 자신이 해낸 일이다. 그러나 모건의 "진짜 쩔었다"는 감탄에도 오드리는 "나도 모르게 한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아 한다. 이런 반응은 내겐 너무도 익숙하다. 칭찬을 받으면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저자세가 일상이 된 모습. 겸손인 줄 알고 습관처럼 한 지나친 과소평가. 성취라는 것에 정해진 크기와 조건이 있는 것 마냥 소소하게 이룬 것들은 그냥 지나쳐버리진 않았던가.
모두 박살내야 할 것들이다. "이 여자야 너 멋졌다고, 제발 인정해!" "제발 스스로 과소평가 좀 하지 마"라는 모건의 말처럼.
과하다는 건 뭘까. 모건은 일거수일투족 엄마 아빠에 털어놓고, 주변에서 무모하다며 말리는 일도 해버린다.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은 직설적으로 하고, 친구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 (짧은 인생의 경험상 이런 사람을 만난다면 필히 친구를 먹어야 한다. 내 편일 때 가장 든든한 분들... ) 모건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서 움직인다. 그의 직언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해보고 싶었던 일이라면 도전에 거침이 없다. 그런 그에게 '과하다'는 말은 공격이다. 누군가의 기준에서는 모건의 행동이 보편에서 벗어난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모건의 기준에서는 그것이 ‘할 만한 것’이다. ‘마이웨이’ 모건에게도 과하다는 지적은 상처로 남았고, 이는 자기 검열로 이어진다.
과하거나 덜하려면 기준이 있어야 하는데, 그건 대체 누가 만드는 건데. 오드리의 말처럼 "다른 사람들은 다 지루하게 사니까!" 그런 기준을 보편인 양 구는 거다.
요즘 과몰입이 일상이라 그런가. 이 영화가 이렇게 따듯한 내용이었어? 그래 나 김찰리, 얼레벌레 살지만 죄지은 적 없고,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잘 모르지만 삶에 애정은 있는 사람이다 이 말이야!
때론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는 것도 필요하다. 자기 객관화가 지나치면 허상적인 기준에 나를 맞추려 들 때가 있다. 나는 내 속도와 방향이 있다. 열 명이 있으면 열 가지의, 백 명이 있으면 백 가지가 있는 법. 알면서도 그게 참 생각처럼 되진 않지만.
불안해하지 말라고 하지만
쉽지 않다
짱구 엄마 봉미선이 29살이란다. 그와 대화한 동년배들의 영상이 최근 SNS에서 화제가 되었다. 다들 나만 이렇게 흔들리는 건 아닐까 고민하나 보다. 현재가 불안하고 슬픈, 제대로 해놓은 것도 없고 과하거나 부족한 동지들이여. 그래도 살아냅시다 우리. 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