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실수도 색채가 있다. 까만 거짓말과 하얀 거짓말처럼 말이다. 그러나 하얀 말실수는 선의의 거짓말과는 달리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인간관계를 흔든다.
성인군자도하루 세 번 말실수를 한다는데 하물며 나란 작자는 어떠할까 생각하면 아찔하다. 언제 저질러도 뜨끔 하고, 언제 당해도 따끔거리는 말실수 때문에 님이 남이 됐다가 놈이 되기도 하는 현실을 번복한다.
목적성과 고의성을 충분히 따진다 해도 말실수가 잦은 사람을 곁에 두기란 여간 달가운 일이 아니다. 나는 좋은 의도의 말에도 일거수일투족 상처를 받거나, 말실수를 밥 먹듯 하는 사람은 결코 곁에 두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관계가 넓지 않은 편이고, 역설적으로 행복을 지키는 비결이기도 하다.
말을 함부로 하는 사람을 끊어내고 후회했던 적은 없다. 언행이 경솔한 사람에게선 매력을 느끼기 힘들고 나를 지키기도 버겁기 때문이다. 누군가 치명적인 말실수를 하거든 나는 가장 먼저 그 사람의 눈을 확인한다. 미미하게나마 애정이 깃들어 있는지, 혹은 너무 많은 피로나 긴장이 담겼는지, 지나치게 들뜬 상태는 아닌지. 이런 경우라면 의미 부여를 하지 않고 넘어가고자 노력한다.
반면 두 눈에 오만과 업신여김이 가득 담긴 상태로 끼얹는 말실수는 실수가 아닌 언어폭력으로 구분한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실수를 인지하는 능력을 상실해 버린 지 오래이다. 그들 곁을 떠나는 사람들 중 대부분이 이유를 설명해 주거나 딱히 시시비비를 따지지도 않기 때문이다. 발전의 가망성조차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저지르는 까만 말실수는 이러하다.
"네 언니는 무슨 일 하니?"
"대기업 연구원입니다."
"대기업 수명 엄청 짧은데 얼마 다니지도 못 하겠네. 쯧쯧. 어째. 유능한 아랫사람들이 치고 올라오면 일만 죽어라 하고 설 자리는 없어지는 거지 뭐. 내 친구 아들도 그랬거든."
"어머. 아끼던 고양이가 죽었다고? 속상해서 어떡하니. 그러니까 고양이 말고 애를 키웠어야지. 요즘 젊은이들이 개 키우고 고양이 키울 때가 아니야. 너희가 애가 없으니까 슬픔에서 못 빠져나오는 거야."
"OO 씨. 세상에서 제일 무식하고 할 일 없는 사람들이 갖는 직업이 뭔 줄 알아요? □□예요. 오해하지 마세요. 절대 OO 씨를 두고 하는 말은 아니고요."
내가 직접 보고들은 빌런들의 발언이다. 조언을 가장한 저주를 퍼붓는 인간, 공감능력이 결여된 소시오패스를 대면하고 나면상처와 분노가 차오른다. 똥인지 된장인지도 구분 못하고 뱉는 그들의 실언은 별안간 나의 몫으로 전락한다.땅거미처럼 따라붙는 노여움을 떨쳐내려 애쓰다 보면 이게 뭐 하는 건가 싶다.
밤이 깊도록 마음이 정리되지 않을 때는 따뜻한 물을 받아놓은 욕조 속으로 들어간다.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욕조 안에서 '내가 어떻게 반응했더라?' 불쾌했던 상황을 돌이켜 본다. 그리고 나를 위해 긴장을 풀고 미움을 덜어낸다. 얼룩진 마음이 씻겨 내려가길 바라며 가만히 기도한다. 행여라도 같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염원하며 두 손을 모은다. 말실수를 안 하고 살 순 없지만 말실수가 너무 잦은 사람이 되는 것도 그런 이를 곁에 두는 것도 지양해야 한다.
말실수를 줄이는 최고의 방법은 상대를 존중하는 것이요. 그다음이 비로소 말을 아끼는 것이다. 사람을 사랑하면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말의 화살촉이 둥글어진다.똑똑한 사람들이 넘치는 세상이다. 답을 주려고 하지 말고 먼저 마음을 주자. 대화할 땐 입을 바삐 움직이지 말고 두 귀를 사용하자. 모임이 많아지는 연말이다. 뭇 모임의 승자는 단언컨대 말을 적게 한 사람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