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하우스 베짱이 탈출기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느긋하게 일어나서 브런치를 먹고 반려견과 산책 후 글을 쓰는 호화로운 일상을 보냈다. 언제까지고 그렇게 사는 게 즐거우리라 생각했다. 남들 일하는 때에 놀고먹고 쉬는 것도 어지간히 헤비멘털이어야 가능하다는 걸 차츰 깨닫게 되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 밑에서 만난다고 늦은 아침, 한적한 오후마다 마주치는 요주의 인물들이 몇 있었다. 아파트 입주자 대표 회의 때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주민들과 싸웠던 문제의 빌런들이었다. 주민의 입장을 헤아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고 오로지 관리실 직원들 편에 서서 몰상식한 소리를 해대던 그들은 각 집안의 가장이자 백수 양반이었다. 오후 두 시에 헬스장에 가서 씻고 오기, 달에 한두 번 입대의에 참여하기, 관리실에 드나들며 아파트 일에 관섭하는 것이 그들이 맡은 요직의 전부였다. 누가 묻지도 않았는데 빌런들은 자꾸만 본인을 이렇게 포장했다. 왕년에 열심히 일했던 사람. 현 프리랜서. (아무도 찾지 않음 주의.) 백수 프리랜서인 그들은 주민들이 아파트의 발전을 위해 개선안을 내거든 이런 말로 초를 쳤다.
"직장생활 안 해 봤어요?"
"회사 안 다니죠? 일 안 하고 있죠?"
엥? 그러는 당신은? 어이없는 입주민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코웃음을 쳤다. 퇴근 후 어렵사리 회의에 참석한 이들 모두 본인들과 같은 처지인 줄 알았던 모양이다. 관리실 직원들의 근태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옛날옛적의 회사생활을 운운하며 대화의 논점을 흐리는 빌런 아저씨들을 보며 입이 떡 벌어졌다. 어쩜 저렇게 자기 세상에 꽉꽉 갇혀 있을까? 무명작가이자 전업주부였던 나는 그들을 보며 세게 한방 맞았다. 달려야 할 때 안주하다간 나도 저렇게 나이 드는 거 아냐?
올드하우스에 오래 거주한 기간을 훈장이자 권력처럼 여기는 그들을 보고 있으니 더욱 이사 생각이 간절해졌다. 새집으로 이사 가고 싶으면 일단 돈을 모으자. 내 힘으로 이사 비용이라도 벌자. 직장과 사회에 기여하는 사람이 되자. 그 생각으로 남편 몰래 이력서를 넣었더랬다.
반려견 하임이를 부모님 댁에 맡겨야 하는 게 너무나 마음에 걸렸지만 일단 뭐라도 해 보자는 심정이었다. 큰 기대 없이 도전했는데 감사하게도 최종 관문을 모두 통과했다. 출근을 위해 하임이를 부모님 댁에 맡기고 돌아오던 날 눈물이 찔끔 났다. 새집으로 이사 가면 그땐 옆구리에 끼고 살아야지 다짐했다.
출근 버스를 타러 갈 때마다 예사롭지 않은 낌새가 느껴져서 관리실 쪽을 보니 빌런 한 명이 나를 유심히 관찰하고 있었다. '아저씨처럼 살지 않으려고 다시 직장인이 되었습니다. 허허.'
회사에 소속된 후로 글이 오히려 더 잘 써진다. 믿는 구석이 생겨서인지 마음은 편하고 월급날도 빨리 다가온다. 워라밸이 확실한 직장이라 만족스럽다. 올드하우스의 빌런들이 아니었다면 결단을 내리지 못했을 것이다.
퇴근 후에 방문한 헬스장에서 올드하우스 베짱이 아저씨를 만났다. 그는 떡진 머리로 유유히 헬스장을 거닐고 있었다. 다 지나가 버린 과거만으론 현재를 빛나게 포장할 수 없다. 일을 오래 쉬고 수입이 사라지면 자존감도 낮아진다. 타인에게 비말을 뿌려 가면서 자꾸만 과거를 소환했던 이유를 정작 본인들만 모르는 것 같다. 정말로 중요한 건 일을 하고 있든, 안 하고 있든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다. 그들은 도태되어 가던 나의 삶을 진중히 돌아보게 만들었다. 올드하우스의 입주자 대표 회의는 아파트를 바꾸진 못했지만 내 삶에 변환점을 마련했다. 올드하우스의 빌런 아저씨들은 나의 소중한 스승님이시다. 네 글자로 하면 '반면교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