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론 싸우는 사람이 덜 이기적이다

공동주택의 평화는 어디에서 오는가

by 미세스쏭작가

카피바라보다 온순한 올드 하우스의 주민들 덕분에 관리실의 서비스 정신은 날로 퇴화되어 갔다. 서비스라고 거창하게 포장할 것도 없었다. 그들이 주민을 응대하는 방식은 대개 이런 식이었다.

"내일 소장 오면 다시 이야기하세요."

"지금 경리 없으니까 이따가 다시 오세요."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난 모르는데."


기본 업무인 주차 관리조차 제대로 되지 않자 아파트 단지 내에는 상시로 불법 주차 차량이 넘쳐났다. 주차 관리 좀 해 주십사 전화를 하면 "정확히 어디에 불법 차량이 있는데요?", "아까 봤는데 없던데?"라는 식의 반문 또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죽하면 주민들이 봉사 차원에서 주차 관리를 하겠노라는 의견을 냈을까.

하물며 민원 처리 과정에서 "투표권 있어요?", "자가예요?"라는 직선적인 질문을 자주 던지는 관리실 직원들의 응대는 놀랄 노자였다. 자가와 전세 여부를 따지는 직원들 때문에 상처받는 주민들도 많았다. 독특한 응대 방식에 허를 찔린 몇몇 주민들은 이 거지 같은 아파트에서 하루빨리 떠나겠다며 열을 내기도 했다. 남편 역시 입대의 회의 안건에 대해 질문했다가 소장에게 자가인고? 하는 질의를 받았다고 했다. 남편은 그렇다는 답변 대신 그게 지금 전화로 물어볼 사안이냐며, 전월세 주민은 관리비 안 내느냐고 따졌다고 했다. (옳소! 누구 남편인지 참 야무지다.)


관리실의 불친절 응대에 불만을 품는 사람들은 시간이 갈수록 늘어갔다. 그럼에도 주민들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단체 채팅방에서 고자질하듯 이거 불편하네요, 저것 좀 바뀌었으면 좋겠네요라는 식으로 화제를 툭툭 던기고선 휘리릭 사라지기 일쑤였다. 참다못해 어렵사리 시간을 내어 입주민 회의에 참석한 소수의 주민들은 더욱 커다란 벽에 부딪쳐야만 했다. 주민들 편이라고 믿었던 입대의는 사사건건 '우리'라는 표현을 써가며 주민들을 배재하고 관리실 직원들만을 옹호했다. 첩산중에 놓인 주민들 쉬이 포기하지 않고 하나둘씩 뭉쳐 지혜를 모았다. 주민이 무려 열 명이나 참석한 회의는 아마도 이번 연도가 최초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만큼 주민들의 관심과 참여가 낮은 아파트였기 때문에 도려내고 바꿔나가야 할 부분들이 많았다.


나만 해도 옳은 소리를 내고 주민의 권리를 챙기기보단 관리실 눈치를 보는 데 급급했다. 타인과 부딪치는 것을 몹시 싫어했던 나는 그들이 나를 극성 주민이라 치부할까 봐, 우리 집 동호수를 기억하고 욕할까 봐 마치 주인의 눈치를 보는 강아지처럼 별 같잖은 이유로 몸을 사렸다. 하지만 내가 아니라 이웃을 위해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각성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안녕하세요. 천사동 천사 호인데요. 이번 달 회의 참석하겠습니다!"

"함께 회의에 참석하실 분 계신가요? 여러분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카피바라 같은 우리 주민들이 바라는 건 매우 사소했다. 담당자 부재 시 메모라도 남기는 것, 모르는 건 차차 알아보겠다고 응대하는 것,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지 않는 것. 어느 직장에 가더라도 기본 중의 기본인 사안들이다만 만성 매너리즘에 빠진 올드 하우스에선 이조차 당연한 일이 아니었다. 지난한 싸움을 하며 도대체 누굴 위하여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나 회의감이 들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친구가 된 이웃들은 버틸 수 있는 온기를 보태 주었다.

겨울의 길목에서 봄을 기다리는 야무진 주민들 열 명이나 모여서 한 목소리를 냈더니 그래도 그만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우리는 인공지능의 힘까지 보태 진정서를 작성하여 제출했다. 관리사무소는 비로소 '저러다가 말겠지.'라는 입장에서 '앞으로 달라져 보겠습니다.'라는 식의 태도를 비추었다.


여태 두 손 놓고 아파트가 잘 돌아가기만을 바란 주민들 역시 이번을 계기로 깨닫는 바가 있었을 테다. 아무런 견제도 없이 건강하게 운영되는 집단은 없다. 세입자도 차별 없는 응대를 받는 아파트. 관리비가 눈먼 돈으로 쓰이지 않는 아파트. 인류애를 상실하게 만들지 않는 관리실 직원들. 빼어나기보단 정상적으로 운영되는 아파트를 만들기 위해 투쟁하면서 여름, 가을을 다 보내고 겨울을 맞았다. 우리 아파트에도 볕이 들고 꽃이 피는 봄이 오면 좋겠다. 척박한 밭을 개척하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던 몇몇 동지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한다. 올드하우스 카피바라들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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