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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없이 혼자 자는 날

헬스장은 없지만 공원은 있는 올드 하우스

by 미세스쏭작가

지난 주말 남편의 밤샘 당직이 잡혔다. 비가 올랑말랑 우중충한 날씨는 마음까지 그늘지게 만들었다. 바로 다음날 아침 일찍 기차를 타고 여행을 떠날 계획이었지만 우울한 기분이 가시지 않았다. 남편도 없고 반려견도 없는 올드 하우스에서 나 홀로 1박 2일이라니.

윗집 사람들은 집에서 뭘 하는지 자정이 넘도록 다시 큰 소음이 나기 시작했다. 있으나마나 한 관리실은 오히려 기피대상인지라 요즘엔 에어팟 낀 채로 잠들기도 한다. 나 혼자 남겨진 올드 하우스는 무인도의 귀곡선장이나 다름없었다. 친정댁으로 도피하고 싶었지만 여행 짐도 싸야 하고 여건이 되지 않았다.

보통의 주부들은 집에 혼자 남겨지면 "아싸. 자유다."를 외치던데 나는 지하까지 움츠려 드는 수준이다. 무서워서 불까지 켜고 자는 내 신세가 처량하고 어리숙하기 그지없다. 홀로 집을 지키는 날이면 하늘나라로 떠난 강아지 생각이 너무 많이 난다. 이런 나를 잘 아는 남편은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다며 선뜻 대문을 열지 못했다.


"저녁에 맛있는 거 시켜 줄까? 맛있는 것 좀 먹고 힘내. 우리 내일 여행 가서 재밌게 놀자. 조금만 견뎌." 당직 근무 하러 가면서 와이프 끼니 걱정까지 하는 남편이라니! 복도 많은 내가 이러면 안 되지 싶어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 오늘 혼자서라도 뛰어야겠어."

"그래. 달리기를 해 봐!"대화의 흐름 무엇?

어쨌거나 나는 러닝화 끈을 질끈 동여매고 용기를 내서 집밖으로 나갔다. 모처럼 찾아온 외로움과 공허함을 떨쳐버리기 위해 열심히 달려 보기로 했다. 짙푸른 어둠이 깔린 가을 하늘을 보니 더 어두워지기 전에 달려야겠단 생각만 앞섰다. 핸드폰도 손목시계도 없이 혼자 공원으로 나왔지만 북적이는 인파를 보니 안심이 됐다.


가볍게 몸을 풀면서 홀로 달리는 사람들을 구경했다. 저 혼자 거친 숨소리를 내며 앞만 보고 달리는 사람들과 마주칠 때마다 내적 친밀감이 들었다. 그들을 벗 삼아 달렸다. 잦아든 풀벌레 소리에 귀 기울이며 밤을 노래하는 오리들의 울음소리를 스치며 저수지를 한 바퀴, 두 바퀴, 세 바퀴째 돌다 보니... 외로움이 뭐예요? 공허함은 또 뭐죠?

'이제 그만 뛸까? 아니. 오르막길까지만 뛰자. 내리막길인데 아깝잖아. 공공 화장실까지만 뛰자. 거의 다 왔는데? 좀만 더 뛰어?' 초보 러너는 오로지 자신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달리면 달릴수록 그저 달릴 수 있는 내 몸과 조건에 감사하단 생각만 든다. 이것이 달리기의 마법이다. 러닝의 리을 자도 모르는 사람이지만 6km를 달렸고 여태 쉬지 않고 뛴 것 중 가장 긴 거리였다. 외로움이 배출된 심적 공간을 성취감과 뿌듯함으로 가득 메꿀 수 있었다. 그토록 싫어하던 달리기를 조금은 즐길 수 있게 되었으니 이미 큰 수확이다.


올드 하우스의 몇 안 되는 장점들 중 하나가 바로 근처에 멋진 공원이 있다는 것이다. 색색깔의 불빛이 일렁이는 커다란 저수지와 지루할 틈 없는 오르막길과 내리막길이 교차되는 동네 공원은 우리 부부의 최애 장소이다.

"훗날 이사가게 되면 신혼집이 그리울 것 같아?" 사람들이 물을 때마다 나와 남편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 전혀."라고 답한다. 신혼 초에 만났던 윗집 빌런들과 관리실 사람들의 반복되는 잘못을 겪으며 올드 하우스에 끝내 정을 붙이지 못했다.

하지만 보물단지 마냥 옆구리에 끼고 산 동네 공원만큼은 아주 오래도록 그리울 것 같다. 이곳에 오면 잔디밭에 누워 음악을 들으시던 아빠의 모습이 보인다. "꼬마야. 꼬마야." 노래를 부르며 줄넘기를 하던 조카 담이의 모습이 보인다. 하늘나라로 떠난 자두가 그토록 사랑했던 공원을 우리 부부는 따로 또 같이 달린다. 숨이 턱끝까지 찰 때마다 "자두야. 언니랑 오빠 응원해 줘."라는 기도를 하며 다리에 힘을 싣는다. 남편 없이 건전하게 잘 놀았다. 물론 오늘은 1+1으로 달릴 계획이다.

촛불 하나 같은 나의 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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