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이 자꾸만 좁아진다. 그 흔한 이사 한 번 해본 적 없어도 네 가족에게 넉넉하던 집이 점점 작아지는 시간이 거푸 흘렀다. 어떤 방식으로든 손에 들어온 물건을 버리지 못하고 다 안고 가는 소라게 같은 삶의 한가운데에서, 일단 가방에 들어간 물건을 꺼내지 않는 것은 간편한 핑계인 동시에 필연적인 결과이다.
7월 신입사원 연수를 떠나기 전날 밤, 어중간한 크기의 캐리어와 작은 가방에 일주일 치 짐을 구겨 담았다. 짐 정리에는 소질도 없고 재미도 없다. 그래서 미루고 미루다가 이런 특별한 이벤트가 있어야만 가방을 한 번 뒤집곤 한다. 그제야 짧게는 몇 주, 길게는 몇 년을 넘게 가방에 있던 물건들이 비로소 바깥 구경을 하게 된다. 1년 전에 다녀온 여행 중 묵었던 숙소에서 가져온 어메니티, 근처 맛있는 카레 집에서 가져온 명함, 장마철에 갈아 신으러 가져갔다 그대로 가져온 흰 양말 한 켤레, 또 사정없이 구겨진 면접 준비 자료들. 잠깐이나마 마음을 뒀던 것들이 가방 바닥에서 먼지를 덮고 모로 누워있었다. 좋은 곳에 가서 무언가를 소중히 길어 담아두어도 추해지기 십상이구나, 총천연색의 기억이 뒤섞이면 결국 검게 변해버리는구나. 관리는 고사하고 일상적인 정리조차 되지 않은 이 검은 가방이 실은 하얀색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엉뚱한 상상을 했다.
가방을 빨아본 적이 있던가? 한 번도 그래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선물 받아 몇 년을 잘 지고 다니던 가방을 빨아야겠다고 생각했던 것은 두 달 전이었다. 가방 앞에 달린 작은 주머니에는 립밤, 칫솔, 지갑 같은 잡동사니가 질서 없이 담겨 있었다. 그것들을 꺼낼 때마다 불쾌한 축축함이 느껴졌다. 텁텁하면서도 달콤한 냄새가 나기에 립밤이 녹았겠거니(사실 이것도 대충 넘길 일은 아니다) 하고 말았다. 며칠 뒤에야 가방에서 콜대원이 터졌다는 걸 알고 안에 있던 것들을 꺼낼 때 가방을 빨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물론 생각만 했고 아직 물이 닿진 않았지만, 무슨 일이 있어야만 정리되는, 또 비워졌다 채워지는 내 가방의 일생이 새삼 가엽다. 소중한 것들, 어쩔 수 없이 떠맡은 것들을 몇 달이고 담고 있음에도 이런 푸대접이 부당하기도 하다. 그렇다고 바뀔 것은 없을 거지만.
정동진 여행에도 함께한 그 가방을 방바닥에 내려놓자, 상아색 모래가 후두두 떨어졌다. 바다에 들어가 노느라고 접어 올린 바짓단에 들어있던 것들과 함께 섞여 바닥이 엉망이 됐다. 가방에 담기는 것이 단지 짐뿐일까? 가방에는 시간이 담기고 묻어난다. 아니, 어쩌면 시간에 내 가방이 묻는 것만 같다. 내가 지나온 곳과 시간을 함께 지나온 가방을 물끄러미 보니 이만한 의미를 가진 물건이 또 있나 싶다. 이 생각을 하며 글을 마무리 짓는 이 순간에도 발치에서 구르는 가방을 멀뚱히 내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