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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서 Dec 10. 2022

드라마PD가 되고 싶습니다!

우물 안 개구리

 올해 7월부터 12월까지, 폭풍같던 방송가 공채 시기가 지나갔다. 나는 서류부터 필기, 면접까지 다양하게 탈락을 맛보며(엿을 먹으며) 첫 취업준비 시즌이 막을 내렸다.


 아직 취업도 못한 주제에 무슨 자랑이라고 취준일지를 쓰냐고 물을 수도 있겠다. 한탄이라면 한탄이고, 회고록이라고 본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다. 잘생기고 예쁜 사람들처럼 유튜브로 영상은 못 남기겠고, 내가 투머치토커이기도 하니까 글이 딱이긴 한 것 같다.


 대학교 4학년이 되면서 나는 미루고 미뤄왔던 “진로 선택”을 확정지어야 했다. 막연하게 드라마PD를 꿈꿔왔다지만 워낙 취업문이 좁기로 유명하고, 당시에는 공무원 열풍이 불면서 그나마 적성에 맞는 듯한 경찰을 준비해야하나 고민이 깊었다.


 바로 그 시기에, 한 E-Sports 아나운서 분의 인터뷰 기사를 읽었다.

마인드도, 직업을 이어나가는 모습도 모두 존경스럽고 멋있는 분

 다시 봐도 멋진 말이다. 올해 취업을 말아먹은 입장이지만 이 말에 대해 비판할 생각은 없다.


 딱히 이 말을 듣고나서 정한 건 아니었던 것 같지만, 아무튼 나는 정말로 드라마PD라는 직업을 “쟁취”하고 싶었다. 어릴 적부터 누가 나를 아줌마라고 부르든 말든, 드라마를 좋아하고 열렬히 시청해왔으니까.


 4-1학기에 모든 졸업 준비를 마치고, 널널한 막학기와 함께 7월부터 나의 취준이 시작되었다. 방송, 언론 관련 취준생이라면 다 아는 카페에도 가입하고, 이름만 다르지 거기서 거기인 것 같은 취업정보 사이트도 여러 군데 가입했다.


 그리고 취준 시작과 거의 동시에, M사 계열사의 공채 정보가 떴다. 아무런 준비도, 공부도, 심지어 직무 관련 인턴이나 공모전, 대회, 동아리 경험도 전무했지만 “경험 삼아” 자기소개서를 써보기로 했다.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취업상담서비스나 유튜브 영상 등을 참고하며 열심히 자기소개서를 작성했고, 경력과 스펙이 별거 없다는 나의 우려와는 달리 서류 합격을 받았다.


 필기전형(방송국PD는 보통 상식+작문or논술로 진행된다)도 스터디 없이 혼자 준비했는데도 운 좋게 합격했다. 이때만 해도 내가 재능이 있는 것 같아서, 금방이라도 좋은 방송국에 취업할 것만 같았다.


 호기롭게 면접 스터디를 구해서 나름 열심히 준비했다. 거의 한달치 알바 월급을 털어서 정장 한벌도 구비했다. 7-8월의 무더운 여름날, 위아래로 정장을 쫙 차려입고 M사 계열사로 출발했다. 여름용으로 나온 재질이라 시원하다는 말이 무색하게 땀으로 온몸이 젖었지만,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자소서 기반 질문이니, 인성 질문이니 할 것없이 꽤나 열심히 준비했다고 생각해서 자신감을 가졌다.


 긴장한 상태로 들어간 면접장. 셔츠는커녕 후줄근하게 반팔 반바지를 입은 아저씨(?) 3분이 앉아계셨다. 심지어 한 분은 자세를 반쯤 돌려 앉은 채, 한창 게임중인 꼬마아이를 공부하라고 앉혀놓은 것처럼 뾰루퉁해 있었다. ‘널 절대 뽑을 생각없어, 애송아.’라고 무언의 압박을 넣는 것 같았지만, 내색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짧은 자기소개로 시작된 면접은 약 10분 정도로 진행됐다. 다만, 자소서나 인성 등 내가 준비한 질문은 단 한개도 나오지 않았다. 단 한개도. 기억에 남는 질문 중, 최근에 본 드라마 5개를 말해보라는 게 있었다. 전날까지도 드라마를 봤던 나는 자신있게 술술 드라마 제목들을 이야기했다.


 다음으로, 최근에 본 책 중 300페이지 이상인 것을 5권 이야기해보라고 했다. 말문이 막혔다. 군대에서는 심심해서 책을 자주 읽었지만, 전역 후에는 거의 읽은 적이 없었으니까.


 여기서부터 화가 난 것같은 면접관들은 본격적으로 나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PD는 글로 말하는 직업인데 책도 안 읽냐며, 한국어 자격증 급수는 왜 이렇게 낮냐며, 그 나이 먹고 어떻게 첫 면접이냐며 등등.


하고 싶긴 한데 준비는 전혀 안 된 모순적인 상황이랄까요

 내가 면접을 보고 있는지, 공청회에서 해명하고 있는지 구분도 안 되는 그 시간은 정말 순식간에 지나갔다. 당연하게도 탈락이었다.


 면접관 분들의 태도에 배려가 전혀 없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내가 아무런 준비가 안 되었다는 생각이 더 강했다. 기본적인 것도 갖추지 못했고, 서류와 필기를 뚫은 나의 운과 요행은 면접관을 마주한 순간 “뽀록”난 것이다.


 ‘왜 이 일을 해야하고 얼마나 잘 할 수 있는지, 이 일을 진정으로 하고 싶은지’ 생각해보란 의미를 그제서야 깨달았다. 면접관의 입장에서도, 정말 열심히 준비하고 대비해온 다른 취준생의 입장에서도, 단순히 ‘하고 싶다’를 넘어선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는 걸.


 그리고 난 그저 우물 안에서 하늘 높은 줄 몰랐던 개구리였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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