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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은혜 Aug 02. 2022

들어줄 사람이 있다는 건

은모든,  『모두 너와 이야기하고 싶어 해』, 민음사,  2020를 읽고

“싱크대 위에 쌀 불려둔 거 있지? 밥 좀 해놔~ 콩도 좀 넣고. 그래서 내가 엄마한테 그랬지….”


“엄ㅁ….”


뚝-.



나도 할 말이 있었는데.


우리 엄마는 프로 일방통행러이다. 바쁘기도 바쁘고, 말할 때도 일방통행, 운전할 때도 일방통행, 쉴 때도 일방통행. 학교에 데려다 준다면서 엄마는 자신의 하루 계획을 그리며 일방통행 하느라 여념이 없다. 한 번은, 아니 어쩌다 한 번씩, 직장에 다 와서야 엄마는 자동차 뒷좌석에 짐짝처럼 덩그러니 남겨진 우리를 보며 “너네 왜 아직도 여기 있니? 어머!”라는 어처구니 없는 말을 하기도 했다. 우리 엄마는 치매가 아닐까, 아니면 뇌에 암세포가 자라는 건 아닐까.


언제나 엄마의 일방적임에 나는 금세 기분이 상하고,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엄마에게만 무게가 실린 삶의 방식이 아직도 낯설다. 엄마도 일방적임을 당하면서 살아왔으니, 보고 느낀 것들이 엄마의 삶의 방식이 된 거겠지만.



그런데 머리가 조금 자라고 보니, 자꾸만 일방통행화 되어가는 나를 마주하는 일이 잦아졌다.


가령, 주말에는 꼭 혼자 쉬어야 한다던지, 갈수록 사람들과 말하고 싶지 않다던지, 자본주의 미소라던지, 친구들과 대화할 때 역시 다 그렇군, 다 거기서 거기구나, 라는 말로 “그래, 그냥 적당히만 해.”라며 모종의 다짐처럼, 저마다 사회로부터 자기 자신을 잘 지키겠노라, 하는 결연한 태도 같은 모습들이 그렇다. 산책은 오직 혼자서, 음악과 함께. 귀를 틀어막음으로써 나는 ‘사회적 단절’을 이룬다. 사회적 단절 내내, 나는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도, 이야기하지도 않는다.



나와 반대로, 소설 속 주인공 ‘경진’은 그녀의 꿀 같은 휴일 사흘 동안, 숱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정거장처럼 지나온다. 도입부에서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남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서, 마침내 자신의 의지로 엄마의 이야기를 “경청하기” 위해 고향 전주로 내려가는 행위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과정은 지나친 비약도, 과장도, 극적인 요소도 없이 담담하고, 은은하게 그려지고, 경진이의 두 발이 요목조목 거니는 대로 독자는 그녀의 휴일 산책을 동행하게 된다. 은모든의 힘은 여기서 나온다. ‘산책’이라는 요소로 서사를 이끌어가는 단정하고도 고요한 매력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은주의 파혼, 낯선 부녀의 웃지못할 에피소드, 웅이와 현수의 이야기, 그리고 마침내 엄마의 이야기를 거쳐, 경진은 성숙해진다. 부모가 한 번도 자신에 대해 궁금증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는, 세신사 아주머니의 담담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녀는 처음으로 타인의 이야기에 대해 <신체적인 제스처>를 취한다. 바로 손을 포개는 일. 듣는 일이 감정을 나누는 공감으로 확장되고, 목욕탕 안 수증기처럼 은모든만의 따듯한 감수성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다시 처음, 휴일이 시작되는 날 오전, 과외학생 ‘해미’를 다시 만나는 것으로 돌아온다. 소설의 첫머리에선 ‘해미’가 가진 근심에 대한 궁금증이 전혀 없었던 경진은, 그녀의 휴일 산책 동안 ‘해미’의 수심깊은 얼굴을 몇 번 떠올리게 되고, 마침내 소설의 끝에서 ‘해미’의 이야기를 들어주겠노라고, 오늘은 너의 이야기가 듣고 싶다고 단호히 속삭인다. 단 한 명이라도 들어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특별한 축복이다. 요즘의 우리는 에어팟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의 소리만을, 자기 감정의 반향음만을 듣고싶어 하니까.



은모든이라는 작가를 만나본 적도, 아는 사이도 아닌데, 은모든 작가와 이야기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소설 속 경진이 “너도 할 말이 있지 않느냐”고 내게 묻는 것만 같은 착각이 일었다. 경진이가 웅이를 만난 것처럼, 오늘의 나에게는 웅이 같은 친구들과의 약속이 있다. 친구 한 명과 함께 다른 친구의 퇴근을 기다리며 약속 장소로 같이 걸어나가기로 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었지?


아니다, 오늘은 내가 들어줄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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