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 습작소>(랜덤 단어 3개)동물병원, 표정, 손짓
햇살을 받아야 비타민 D가 합성되고 멜라토닌이 생겨, 밤에 잘 잔다는데
며칠 째 소녀는 방 커튼을 열지 않았다.
소녀를 비추는 빛은 오로지 모니터에서 나오는 푸른 파장의 빛뿐이었다.
'H'의 폴더 보관함에서 소녀는 ctrl+F 버튼을 누르고, 찾고, 복사하고, 붙여 넣으며
'H'의 온갖 선행, 기부, 미덕을 퍼뜨리고 사람들의 sns 알고리즘에 끼우고 채웠다.
자신과 'H'가 나눴던 유료 팬레터의 따뜻한 답글도 카드뉴스로 만들었다.
어디선가 'H'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이젠 네가 날 구해줄 차례야'
불꽃소녀에게는 90년대 청소년들이 쓸 법한 스티커 모음집 다이어리가 있었다.
'H'의 사인회를 갈 때마다 받은 한정판 스티커를 차곡차곡 모아둔 보물 일지다.
좋아하는 스타와 사진을 찍고, 설렘에 주체 못 하는 표정으로 손깍지를 끼며 선물을 조공하는 팬심을
불꽃소녀는 고루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H'의 사인회는 구태의연한 방식이 아니었다.
그의 사인회는 특별했다. 세심하고 다정다감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언제나 사인회에 자체 제작 스티커를 만들어왔다.
팬들의 마음을 말랑말랑하게 해주는 문구를 박은 스티커를 붙여주고 그 옆에 사인을 해줬다.
현재 불꽃소녀의 핸드폰 케이스에 붙여진 스티커는 '너는 너답게, 그게 가장 완벽해요'이다.
가족에게도 듣지 못한 말, 친구에게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소녀는 언제나 00의 딸답게, 00의 친구답게, 00의 손녀답게, 00의 학원 수강생답게, 00 학교의 모범생답게
뭐든지 답게가 붙였다. 답답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답게들에게 덮여 숨이 턱턱 막혔다. 그래서 그런지
너는 너답게, 그게 가장 완벽하다는 말이 너무 소중했다.
단순한 글귀가 아니었다. 뭉클한 한 마디였고, 마음을 울리는 말이었다.
불꽃소녀 말고도 많은 팬들은 그가 선택한 글귀에 그렇게 마음이 동했다.
팬들은 이번에는 어떤 글귀가 박힌 스티커를 'H'가 가져왔는지 궁금해했고
'H'의 사인회에 받은 감성스티커는 소녀들에게 스티커 다이어리 레트로 붐을 일으켰다.
비싸게 팔려나가는 것을 방지하는 '리셀 NO 동의서'에도 서약하는 모습은 거의 신성한 다짐과도 같았다.
어느 날에는
'H'가 얼굴과 귀까지 빨개진 팬을 손짓으로 다시 부른 다음, 홍조현상에 좋다는 민들레 비누라며 선물을 주곤 했는데, 그렇게 받은 비누가 지금 불꽃소녀의 방을 장식하는 유일한 소장품이다.
'H'를 알기 전, 소녀가 키우던 강아지가 혈액암으로 손쓸 틈도 없이 무지개다리를 건넜던 일이 기억났다.
그런데 'H'는 불꽃소녀의 애도를 도와주는 건지
희귀 동물병을 앓고 있는 반려견, 반려묘들을 위한 연구에 써달라며 제3차 동물병원에 기부를 했던 적이 있다. 팬레터에 반려견에 대한 이야기를 썼던 적이 있는 소녀는 그 기사를 캡처하고 스크랩하고, 그 병원 앞에서 인증사진도 찍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과거의 그 기사를 찾아 sns 팬버스 계정을 태그 하며 소녀는 다짐했다.
'배신'이라는 말. 그건 'H'와 나 사이엔 어울리지 않다.
세심하고 사려 깊은 아이돌이, 호구가 되어 사라져 가는 걸 볼 수 없었다.
그녀는 읊조렸다.
'H' 너의 호구는 내가 돼 줄게.
쏟아지듯 업데이트되는 소식에 나의 최애는 이 세상 최고의 호구가 되고 있었다.
나는 내 최애가 불시착한 이 지저분한 판에 호구를 두어야 한다.
바둑에서 자신의 돌을 지키기 위해 놓는 중요한 수 '호구'는 나와 같은 팬들이 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