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단어 습작소>(랜덤 단어 3개)스트레칭, 진심, 소문
'H'를 만나기 전 소녀는 이랬다.
소녀가 사는 세상은 매우 협소했다.
스트레칭을 위해 팔을 뻗고 다리를 찢을 수 있는 큰 대자 영역이 소녀가 겨우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인 듯했다.
학교-집-학원, 학교-학원-집이 반복되는 날들이었다.
'네 곁에는 언제나 가족이 있어'라는 생일 메시지가 무색하게 소녀의 부모는 매우 바빴고 냉장고에 붙여진
포스트잇이 소녀에게 말을 걸어주는 날이 더 많았다.
10대에 해야 하는 일, 20대에 해야 하는 to do list, 30대가 해내야 하는 인생과제는 이제 옛말이다.
지금은 5살 때 영어로 대화하기,
7살 때 한자 자격증 따기
9살 때 오케스트라 오디션 합격하기와 같이
연단위로 소녀가 해내야 하는 성취과제는 날이 갈수록 무한 증식했다.
소녀는 무엇이든 해내려고 더 힘을 짜냈다.
"해볼게요", "할 수 있어요", "다시 해보지 뭐", "나도 잘하고 싶어", "나도 해보고 싶어"
라고 말하는 소녀는 언제나 진심이었다.
부모의 만족을 위해,
어른들로부터 받을 인정을 위해,
부러워하는 친구들의 눈빛을 위해
언제나 적극적이었지만
중, 고등학생을 거치며 뭐든지 귀찮아졌다.
무엇을 해내야 한다는 사회적 알람이 지긋지긋했고
언제부턴가 친구들로부터 스스로 소외당하길 선택했다.
"같이할래?", "나도 궁금해", "진짜? 그래서?", "나도 너랑 같은데!", "우리 같이 가자"
라고 말하는 소녀는 더 이상 없었다.
주류에 속한 아이들과의 의미 없는 대화는 피곤했고
왁자지껄한 소리는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온갖 질투, 시기, 경쟁들로 가득했으며
그것은 누구 한 명을 돌아가며
괴롭히는 소문의 진원지였을 뿐이다.
또래친구들과 친해지려 했던 과거와 달리
이젠 소녀에게 그저 그런
학교에서, 학원에서 만나는 아이들은 아무 자극도 주지 않았다.
예뻐 보인다는 말보다 피곤해 보인다는 말이 더 듣기 좋아진 순간부터였을까 소녀는
열심히 살고 있다는 말과 피곤해 보인다는 말이 같은 말이라고 생각했다.
"눈빛 봐라- 지금 반항하는 거야? 너 아직 힘이 남아있구나"라고 말했던 부모의 말이
마음에 쑤셔 박힌 날부터였을까.
아니면 전교 1등을 하던 날, 주인공인 소녀 없이 파티를 여는 부모를 보고
마음 한편이 텅 비었을 때부터였을까.
친구들 사이에서 소녀만 빼고 sns 채팅방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부터였을까.
소녀는 허리를 웅크리고 허벅지가 얼굴에 닿을 듯한 자세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는 일이 많아졌다.
그렇게 세상에서 숨어버리고 싶었다.
부모로부터, 친구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자신은 호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난 호구였구나. 난 그저 누구의 들러리나 되는 쉬운 호구인가.'
소녀의 삶이 열정은 사그라들고 있었고
생기 있는 불꽃들이 꺼지고 있었다. 그때
소녀는 'H'를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