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밴쿠버 여행 - 새벽에 좀비길을 뚫고 가다(6)

일분이 일 년처럼 느껴지는 공포를 느껴봤는가..

by Sassy

며칠 동안의 편안한 밴쿠버생활로 긴장도 많이 풀어졌고 모든 계획은 작은아이의 손에 일임한 터라 아이가 정한 대로 움직이기만 하면 된다.


미국령인 괌은 가봤지만 시애틀 즉, 본토 미국은 처음이라 작은아이는 잔뜩 기대하고 있다. 2박 3일도 생각해 보고 1박 2일도 생각했지만 호텔도 너무 비싸고 비행시간 포함 총 열흘정도의 여행일정이라 빠듯해서 시애틀은 하루 당일코스 여행으로 최종 결정한다.


대신 새벽 첫 버스인 5:30 버스를 타고 시애틀로 출발, 다시 밴쿠버 복귀는 기차로 저녁 6:30 시애틀출발 밴쿠버 도착 밤 10시 정도로 한다. 처음엔 정말 하루 꽉 채워 밤 12시 도착으로 한다 했지만 그래도 너무 늦은 시간은 피하자 싶어 10시 도착으로 바꾼 거다. (뒤늦게 깨달았지만 최고의 선택이었다)


시애틀행 새벽 버스를 타려면 집에서 새벽 4시엔 출발해야 한다. 우리 둘은 로밍된 휴대폰이 알려주는 정보에 온전히 의지한 채 새벽 네시에 집을 나선다.


십여분 걸어서 도착한 버스정류소엔 사람이 하나도 없었지만 밴쿠버는 싱가포르처럼 철저히 보행자 중심이고 거리가 안전해서 걱정은커녕 오히려 상쾌함까지 느낀다.


나는 버스를 기다리며 주머니를 만지작거리다 전날 담아 둔 도토리를 발견한다. 버스정류장이 어느 가게 앞이었는데 그래도 국경을 넘는 거라 꼬투리 잡히지 않기 위해 아쉽지만 도토리와 작별한다.


새벽버스에 오르니 타고 내리는 사람들의 형상이 낮때와 사뭇 다르다. 조금은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휴대폰으로 방향을 체크하고 있던 아이는 이제 내려야 한다고 했다. 15분 정도 걸어서 기차역으로 가서 5:30 버스를 타야 한다.


시력이 그다지 좋지도 않고 야맹증도 있는 나지만 굳이 선명하게 보고 다녀야 할 게 없어서 안경도 챙겨 오지 않았다.


휴대폰이 알려주는 길로 5분쯤 갔나? 아이가 조금 놀란 톤으로 말한다

"엄마, 저기 그때 개스타운으로 가는 길에 본 약에 찌든 사람들이 너무 많은데?"

갑자기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밴쿠버지리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는 기차역이 그 마약거리를 지나야 한다는 걸 인지하지 못하는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만 것이다.


새벽 다섯 시도 되지 않은 거리에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 폴더폰처럼 꺾여있거나 웅크리고 있거나 동작중인 형태로 멈춰있고 두 다리를 이용해 걷는 사람은 단 우리 두 모녀뿐이다. 거리는 대마인지 마리화나인지 풀 태우는 냄새로 희뿌옇게 보일정도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몸 밖으로 튀어나올 기세다. 흡사 좀비영화 속에 들어간 주인공이 된 심정이다. 게다가 난 자세히 보이지도 않아서 훨씬 그 공포가 컸다. 그들과 눈을 마주치면 안 되니 그냥 앞으로 걸어 나아가는 수밖에..


하필 그 길을 지나야 하다니.. 하필.. 그 약에 취해있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구역을 지나야 하다니.. 안경이라도 쓰고 올걸.. 후회해도 늦었다. 약을 하지도 않은 내 몸이 온통 경직되는 느낌이다. 흐릿하게 보이는 모습들을 아이의 말에 의지해서 상상하니 더 공포스럽다. 그렇다고 그들에게 시선을 두면 절대 안 된다.


"최대한 조용히 빨리 걷자!"

"Wait!"

어떤 가느라단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우리에게 하는 말인지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인지는 불분명했으나 더러 약을 사기 위해 돈을 구걸한다는 말을 들은 터라 더 공포스럽다.


우린 뒤 돌아보지도 않고 더 빨리 가능한 한 큰 보폭으로 살금살금 그 구역을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좀비나라가 이럴까..

이렇게 아름답고 친절한 사람들로 가득한 캐나다에 어찌 이런 곳이 있단 말인가.. 마리화나인지 대마초인지 모르겠지만 냄새가 그 도로를 온통 가득 채우고 있다.


십여분(십 년 같은 시간이었다)을 걸었을까.. 아이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 말한다.

휴우.. 다행이다.. 드디어 백 미터 정도 앞에 기차역이 보인다. 살았다. 아직도 심장은 튀어나올 듯 팔딱인다.


겨우 마음을 놓으려 할 때 또 다른 복병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5분 거리에 기차역이 보이는데 인도가 공사 중이라 막혀있다. 풀숲을 끼고 있는 반대편 길로 가야 한다.


그런데 그 풀숲에서 두 남녀의 영어로 대화하는 목소리가 들린다. 어쩌나..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데 몇 마디씩 나누는 대화만 들린다. 바로 지척이 마약중독자들의 거리라 그들도 분명 중독자들일 텐데.. 너무 무섭다.


어떻게 지나가지? 아이가 방법이 없다고 조용히 지나가 보자고 한다. 정말 공포영화 그 자체다. 둘 다 머리카락이 다 설 정도로 공포에 빠졌지만 서로 애써 아닌 척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노력한다.


소곤거림은 어느새 사라졌고 우리는 마음을 단단히 먹고 그 풀숲을 낀 길을 걷는다.. 그런데 바로 옆을 지나가려는데 다시 선명한 대화소리가 들리는 거다.


곧 풀숲에서 그들이 나올 것 같아 아이에게 다급하게 속삭였다.

"영아 빨리 뛰어!"

그들이 튀어나와 우리의 목덜미라도 물어버릴 것 같았다.


아이는 초고속으로 뛰어간다. 나도 뒤따라 뛴다. 심장이 몸 안에 제대로 있긴 한 건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내 평생 이렇게 공포스러웠던 적이 또 있었을까..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듯하다..


이제 정말 기차역 앞이다. 찻길만 건너면..

아무렇게나 건너도 되는지도 모르겠고 혼이 나가버려서 기차역만 목적지로 삼고 움직인다.


온 힘을 정말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기차역으로 들어갔는데 역 안이 쾌적하기는커녕 아까 그 대마초인지 마리화나인지 풀 태우는 냄새로 가득하다.. 미칠 지경이다. 역안도 안전해 보이지 않는다..


놀란 가슴 쉬게 할 틈도 없이 우리 둘은 화장실로 들어가서 피난한다. 소변 후 물도 안 내려진 변기들도 있고 몇 군데나 열어봤지만 쾌적과는 거리가 있다. 제일 가장자리 변기가 깨끗하길래 피난처로 정해 본다.


화장실문을 닫고 보니 화장실 공간은 아주 넓었지만 아무렇게나 테두리만 그려진 20cm 길이의 십자가 형상이 뒷벽 쪽과 화장실 앞 문쪽 두 군데 보인다. 마치 공포영화에라도 나올만한 모습으로..


이건 또 무슨 조화인지.. '하나님 제발 도와주세요'

화장실에서 소변을 보고 물 내렸다. 작은 아이도 용변을 보겠단다. 그러라 했다.


"엄마, 큰 거 봐도 돼?"

"당연히 되지!"

다른 때 같았음 아무리 딸이라도 큰 볼일 보고 있는 화장실에 같이 있는 건 끔찍 그 자체였을텐데 그 따위 냄새가 뭐라고 싶다..


그때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가 들린다. 사람이 더 무섭다..

캐나다와 미국은 화장실 칸 발쪽 부분에 빈 공간이 20cm 넘는 것 같다. 아래쪽으로 사람이 충분히 오갈 수 있는 폭이다.. 좀비가 우리 쪽으로 와서 화장실 아래로 보이는 우리 다리를 알아차리고 문을 벌컥 열어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두 다리가 최대한 보이지 않게 갓 쪽으로 바짝 붙어선다.


아냐.. 괜찮을 거야.. 우린 애써 서로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물을 내리고 밖으로 나간다. 이미 우리 눈엔 정상적으로 보이는 사람이 없다..


대합실로 나가서 정상적인 사람을 찾아보기로 한다. 중국계로 보이는 여자들이 세 명 정도 앉아 있는데 커다란 캐리어를 옆에 끼고 있는 모습이 무조건 여행객으로 보여서 다가가 본다.


"시애틀 가는 버스 타려면 여기서 기다리면 되나요?"

"우리는 토론토에서 왔는데 기차 타고 갈 거예요. 버스는 저쪽인 것 같은데요?"


다행이다. 정상인이라는 게 확인되어서.. 놀란 가슴 진정 시켜보려 말을 건다.

"여기로 버스 타고 걸어오다 마약중독자 거리를 지나오는 바람에 지금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가슴이 어찌나 뛰는지.."

"오.. 여긴 괜찮아요.. 마음 놓아요.. 좋은 여행되길 빌어요.."

"정말 고마워요.. 좋은 여행 되세요.."


처음 만난 정상인을 보니 마음이 좀 놓인다. 이제 버스 타는 대기의자 쪽으로 옮긴다. 인도계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있다.

"실례하지만 여기가 시애틀 가는 버스 타는 곳 맞나요?"

"네. 저도 5:30 버스 기다리고 있어요.."

"아.. 고마워요.. 좀 전에 마약중독자 거리를 걸어서 지나오는 바람에 너무 놀라서 정신이 하나도 없네요.. 밴쿠버는 처음이라 휴대폰이 알려주는 길을 쫓아오는데 정말 심장이 다 떨어졌어요.."


묻지도 않는 질문에 정상인이다 싶으면 쇼크 받은 내 심장을 위로라도 받고 싶은 듯 어둠 속에서 뚫고 나온 그 봉포의 구역에 대해 마구 쏟아낸다. 마치 미친 여자처럼..


다행히도 인도계 여자는 나를 이해한다는 듯 자기 이야기를 한다. 가족은 밴쿠버에 살고 자기는 시애틀에서 일을 한다고.. 아버지가 역까지 태워주셨다고..


고마웠다. 믿을 사람이 생긴 것 같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 생긴 것 같았다.


버스시간이 되어 우리는 버스에 오른다. 버스기사는 백인인데 유머가 있다. 국경을 지나는 버스라 주의사항이 많다. 어둠을 뚫고 시애틀로 향하는 버스에 인도계 여자가 동행하니 한층 마음이 놓인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