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교회에 다닌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본 질문일 거라 생각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 중 누가 제일 좋아?"
쟁쟁한 후보들이 많아 섣불리 답을 하기가 어렵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 하나님 마음에 합한 왕 다윗,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한 모세, 카리스마 있는 정열의 사도 바울, 사자굴에 들어간 다니엘, 고난과 역경에도 끝내 믿음을 지켜낸 욥 등 믿음의 용사들이 차고 넘친다.
개인적으로는 요나를 좋아한다. 1월 큐티 본문이 요나서라 주일 예배 설교도 요나서로 이어졌다. 왜 하필 요나인가. 요나는 고집불통에다 무모하고 찌질하다. 그런 인간적인 모습에 정감이 간다. 나와 꼭 닮았다.
조국 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수르의 구원을 위해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로 가서 복음을 전파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요나는 전혀 다른 방향인 다시스로 간다. 해골들이 쌓여 언덕을 이룬다는 악명 높은 앗수르 사람들이 혹여나 회개라도 할까 봐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한 것.
이는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탕자의 비유와도 비슷하다. 아버지의 유산을 일찍 요구해서 집을 나간 둘째 아들이 방탕한 생활을 마치고 돌아오자 아버지는 기뻐하며 아들을 맞아준다. 하지만 첫째 아들은 이에 불만을 품고 아버지에 항변한다. 짐승만도 못한 둘째 놈이 온 게 뭐가 그리 기쁘냐고. 왜 저놈을 꾸짖지 않고 잔치를 베푸는 거냐고.
요나와 탕자의 비유에 나오는 첫째 아들이 간과한 것이 있다. 그들은 어리석게도 인간은 도찐개찐, 거기서 거기라는 중요한 사실을 망각했다.
아마도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겠지.
'앗수르인들은 하나님 나라 백성들을 죽이고 멸망시킨 한낱 살인마일 뿐인데.
둘째는 아버지의 재산을 탐내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게 살다가 아들이 아닌 '종'으로 돌아온 인간말종인데!'
'저런 인간들에게 왜 회개의 복음을 전해야 하지?
'인간 같지도 않은 저들이 왜 하나님 나라에 초대되어야 하지?'
이런 시선에는 기본적으로 '내가 저들보다 낫다'는 인식이 디폴트로 깔려있다. 피조물인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관점에서 거기서 거기일 텐데, 스스로 등급을 매기며 나보다 남을 못하다고 여기는 것.
이렇게 적용이 잘 되는 본문이 있을까. 나는 직장에서, 교회에서, 가정에서 타인을 온전히 사랑했었나.
회사에서 상사들을 욕하는 게 생활의 원동력이었다.
교회 성도들을 비판하고 때로는 직분자와 교역자들을 우습게 여길 때도 있었다.
철없는 아이들과 학생들을 멸시했다.
친구를, 부모님을, 사랑하는 아들과 딸을, 하나뿐인 아내를 미워하기도 했다.
꼭 대놓고 미워하고 욕을 하고 화를 내야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마음을 다해 사랑하지 않는다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지 않는다면, 하나님의 명령에 대놓고 개긴 요나나 둘째를 미워하고 아버지의 잔치에 불응한 첫째 아들과 진배없다.
도찐개찐을 기억하자.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보기 전에 내 눈 속의 들보를 먼저 상기하자.
미워할 힘으로 사랑하자. 예수 그리스도의 피값으로 사신 저들을 내 기준으로 판단하지 말자.
하늘과 우주만물보다 높으신 이가 짐승의 밥그릇에서 탄생하신 은혜를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