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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appa Aug 21. 2023

프롤로그 - 공항에서

여행과 오브제

  2022년 3월, 근 2년 만에 인천공항을 다시 찾았다. 1주일 전, 코로나19 예방접종을 완료한 입국자는 2주 격리가 면제된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샌프란시스코행 항공권을 끊었다. 출장을 가는 친구에게 숙박을 빌붙기로 하고 충동적으로 결정한 여행이었다. 2년 만에 떠나는 여행의 행선지는 사실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로든 '떠난다'는 것이 중요했을 뿐. 원래 여행을 좋아해서 해마다 두세 번은 꼭 국경을 넘었던 걸 생각하면 그동안 어떻게 참았나 싶다. 


  공항은 적막했다. 나만큼 여행에 목마른 여행자가 많지는 않았는지, 누가 봐도 출장을 떠나는 듯 말쑥한 옷차림의 직장인만 간간이 보일 뿐, 한산하기 짝이 없었다. 북적이는 출국 심사 줄도, 시장통을 방불케 했던 면세점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다. 스무 살 때부터 참새가 방앗간을 드나들듯이 오갔던, 기억 속의 공항이 아니었다. 넓은 공항 로비에 서있으니 마치 인류가 모두 멸망한 도시에 혼자 살아남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소설 속 주인공이 된 기분이었다. 

  수속 인원이 열 손가락도 되지 않는 덕에 이륙 시까지 시간이 한참 남았다. 세계 공항 순위 1위를 자랑하던 인천공항도 2년의 불황을 견딜 순 없었는지 문을 연 카페도, 가게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글이나 쓸까. 텅 빈 벤치에 앉아 스마트폰의 메모장을 켰지만  마우스 커서만 허하게 반짝일 뿐, 차마 생각이 글이 되어 나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일기를 쓰지 않은 지도 한참이다. 첫 책을 출간하고 벌써 1년이 흘렀다. 그즈음부터 일기를 쓰지 않았다. 15년 넘게 이어오던 습관을 하루아침에 내려놓기란 어색했지만, 도무지 머릿속 생각이 문장이 되어 써지지 않았다. 좋은 습관은 만들기는 어려워도 잃어버리긴 한 순간이라더니. 한동안 씁쓸한 죄책감에 시달리다 나 좋자고 들인 습관이 오히려 강박처럼 느껴져서 어느 순간부터는 글을 쓰려는 노력을 굳이 하지 않았다. 

  사실은 글쓰기의 무게를 덜어내고 싶었다. 제법 묵직한 주제로 첫 번째 책을 쓰고 났더니, 예쁘고 가벼우며 부담 없는 글을 쓰고 싶었다. 다시 책을 낸다면, 약속은 없는데 비는 내리고 나가기는 귀찮은 어느 날에 따뜻한 커피를 한 잔 내려서 창가에 앉아 빗소리를 들으며 부담 없이 펼칠 수 있는, 얄따랗고 예쁘장한 책이면 좋겠다. 자고 일어나면 어제의 콘텐츠는 옛 것이 되는 콘텐츠 홍수의 시대에, 책장을 덮으면 기꺼이 떠내려갈 법한 책을 쓰고 싶었다. 사람이 어떻게 삼시 세 끼 미슐랭 쓰리스타만 먹고살겠는가. 친한 친구와 쉼 없이 깔깔거리는 수다같이 가볍고, 팝아트처럼 생기 있는 책을 꿈꿨다.

 

  무료함을 이기지 못해 이어폰을 꽂았다. SNS에서 시답잖은 유머글을 봐도, 유튜브에서 좋아했던 드라마의 요약본을 봐도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엔 어땠더라. 그 시절엔 여행에 대한 설렘과 기대, 그 자체만으로 상당한 엔터테인먼트였다. 공항으로 향하는 리무진 안에서 mp3에 담은 스무 곡 남짓한 노래를 들으며 끝없이 펼치는 여행에 대한 공상은 지겨울 틈이 없었다. 며칠뿐이지만 예측할 수 없는 새로운 일상이 어떻게 펼쳐질지 시나리오를 쓰듯이 최대한 구체적으로 상상했다. 날씨가 화창하면 얼마 전 세일에서 건진 빨강 원피스를 입어야지. 하루 종일 걸으려면 운동화를 신어야겠다. 손글씨로 노트를 채워가며 꼼꼼하게 여행 계획을 세우는 것도 퍽 즐거운 오락이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뒤적이다 2018년 포르투갈 포르투에 혼자 여행을 갔을 때 적었던 메모를 발견했다. 당시 끄적였던 기억조차 잊어버린 모양인지, 내 필체인데도 새삼 새롭게 읽힌다. 나는 여행지에서 되도록 데이터 로밍을 하지 않는다. 무료로 와이파이를 제공하는 곳, 카페나 식당, 호텔 로비에서 잠깐 동안만 스마트폰을 사용한다. 나만의 디지털 디톡스 원칙이다. 대신 생각을 많이 하려고 애쓴다. 평소 머릿속에 맴돌던 잡념들을 정리한다. 글이라기보다는 메모나 일기에 가깝지만, 어쨌든 글도 쓴다. 스마트폰의 메모장에 쓸 때도 있고, 카페에서 볼펜을 빌려 냅킨에 끄적일 때도 있다. 여행지에서의 사고는 혼자 여행의 외로움을 달래주기도 하고, 세상을 보는 시각을 살짝 돌리기도, 깨달음을 주기도 한다. 여행지에서 얻은 교훈과 지혜를 돌아가 접목할 생각에 평범한 일상이 새롭게 보이고, 두근거림과 설렘을 느낀다.

  문득 닳고 닳은 여권 케이스를 내려다보았다. 2017년 아프리카 말라위에 갔을 때, 같이 갔던 동료에게서 선물 받은 것이다. 기념품을 통해 당시 여행에서 내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어떤 생각을 했는지 떠올린다. 잊고 있었던 그 시절의 깨달음과 다짐을 다시 떠올린다. 여행에서 얻은 오브제는(특산품이든, 기념품이든, 하다 못해 글귀를 끄적인 영수증이든) 여행의 상징적이고 환상적인 의미를 새삼 곱씹게 만든다. 우리는 여행을 통해 느슨해진 일상의 긴장을 되찾기도 하고, 유난히 지친 날이면 다시 떠날 날을 기약하며 활력을 얻는다. 15년 간 썼던 일기장을 우연히 펼쳤을 때 글을 정리해서 책을 쓰고 싶다고 느낀 어느 날처럼, 여행을 통해 얻은 오브제를 보며 지난 여행이 나에게 남겼던 감상을 책으로 엮고 싶다는 갈망을 느꼈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돌아오면 책을 쓰리라. 그때 다짐했다. 물론 일상에 치여서 실제로 글을 쓰기까지는 예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지만.


  그동안 유행은 조금씩 잠잠해졌고, 마침내 정부에서 코로나19 감염병의 종식을 선언했다. 여행을 떠나는 발길도 늘어만 간다. 사람마다 여행의 의미는 다르겠으나, 나랑 비슷한 사람이 있다면 이 글이 타인의 일상을, 그리고 생각을 훔쳐보는 즐거움이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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