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계절의 이야기
6월이 되니 신주쿠 쿄엔도 짙은 초록색 여름의 옷을 입는다. 솜사탕처럼 달콤하게 흩날리던 벚꽃의 자리에 이제는 힘 있게 자란 초록 잎사귀가 싱그럽다. 언제 이렇게 시간이 흘러갔나 싶다. 초록색, 보기만 해도 듣기만 해도 생명력이 넘치는 단어다. 자연의 색이 이토록 가슴에 콕 박히는 것은 나에겐 여름날의 초록잎들과 푸른 바다다. 쨍한 초록과 파랑을 보고 있자면 새삼 내가 지금 이곳에 살아있음을 느끼곤 한다.
계절 중 여름도 그렇다. 생명력이라 하면 보통 많은 사람들이 추운 겨울을 이겨내고 크고 작은 생명이 움트는 봄을 먼저 떠올리곤 한다. 하지만 내게 여름은 그 어느 계절보다 생명력 넘치는 시기다. 초록을 배경 삼아 붉은 태양의 뜨거운 이글거림 아래 풀과 나무들이 무섭도록 자라난다. 어디 그뿐이랴, 태풍의 세찬 바람과 빗줄기 아래 여리하던 줄기와 뿌리가 단단하게 굵어지고 커진다. 그래서 항상 여름날은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난 다음날이 모든 생명들이 한층 더 자라 있는 느낌이 든다. 자신에게 닥친 시련을 오롯이 다 이겨내고 한층 성장한 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지기까지 한다. 시련은 사람에게도 식물에게는 같을 것인데 식물을 사람보다 오히려 힘듦을 더 잘 이겨내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식물의 생각을 알 수 있는 언어가 없으니 그들의 속내는 알 수 없다. 하지만 세찬 비에 쓰러져있다가도 다음날 다시 일어나 있거나, 아스팔트의 작은 틈에서도 씩씩하게 자라는 작은 풀이나 꽃을 볼 때면 경외심마저 든다. 초록은 참으로 대단하다.
신주쿠 쿄엔은 도쿄에서도 이름난 공원이다. 바로 도심 속의 큰 공원이기 때문이다. 바쁘기로 두 번째라면 섭섭한 도쿄 시간과는 다른 세상 같다. 게다가 초록이라는 배경을 뒤로 갖은 색의 꽃들은 더 선명해 보인다. 보라. 초록 덕분에 멋없고 딱딱하게만 보이는 도쿄의 건물들도 부드럽고 낭만스러워 보이지 않는가?
초등학교시절, 미술에 큰 재능이 없었던 내가 조금이라도 그림을 잘 그리고 싶어 했던 그릴 수 있던 비법이 하나 있었다.(이 비법은 내가 스스로 알아낸 것이 아니라 당시 다녔던 미술학원 선생님께서 알려주신 것이다) 바로 도화지 배경을 초록색으로 꼼꼼하게 칠하는 것이다. 배경 하나에 뭐가 그리 크게 바뀌겠어라고 생각이 들지만 막상 초록색으로 색칠하고 나면 그림이 한층 또렷해지고 잘 그린 것처럼 보인다.
언젠가 대학교 미술교양 수업 때는, 유난히 보라색을 좋아하던 친구가 있었다. 당시에도 미술치료, 고유한 색이 갖는 테라피 개념이 한창 유행이던 때라 어떤 사람이 보라색을 좋아한다 하면 개성이 강한 사람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친구에게 왜 보라색이 좋은지 물었더니 혼자서도 전혀 주눅들지 않는 색이어서 그렇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어디서든 늘 당당하고 돋보이고 화려하던 친구와 찰떡인 색이었다. 시간이 흘러 세상을 살아보니 혼자 주눅들지않고 당당하게 산다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보라색으로 살 수 있다면 아마 내 이름 석자를 신문에 낼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이런 주눅 들지 않는 보라색보다 더 어려운 게 초록색으로 사는 것이다. 초록은 미술치료에서 안정과 힐링의 역할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타인과의 관계를 소중히 여기고 배려하는 분이다. 자신만의 내공을 가지고 단단한 사람, 하지만 결코 모나지 않다. 당신의 주변에는 이런 초록 같은 사람이 있는가? 혹시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초록일 수도 있다. 내 주변에도 이런 초록의 분들이 있다. 묵묵하게 후배를 돕고 응원하며 타인을 돋보이게 만들어주는 선배, 배우자, 후배 등등 말이다. 이런 초록색 분들 덕분에 보라색 분들의 장점이 더 부각되는 경우도 많이 봤다.
실은 우리 주변에 어느 누구보다도 초록인 분들이 있다. 바로 부모님이다. 늘 묵묵하게 자식의 뒤에서 응원해 주시고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시는 분. 나도 부모가 되어보니 초록의 부모가 얼마나 위대한지, 그렇게 자식의 편안한 배경이 되어준다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새삼 깨닫고 있다. 아이 고유의 색이 빛날 수 있게, 더 환히 보일 수 있게 배경이 될 수 있는 초록의 부모가 되어주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앉았던 의자에서 일어섰다.
오늘은 신주쿠 쿄엔에서 새삼스레 초록색에게 감사함을 느낀다.
초록색님! 존재함과 오늘도 애써주심에 감사드립니다. 더불어 나란 존재도 때론 누군가에게 초록과 같게 될 수 있도록 응원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