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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설 Oct 19. 2024

그런 날

그래 그랬었지

그래 그런 날도 있는 거지.


오랜만에 내게 찾아와 준 시간에 여유로움이 잔뜩 묻어있는 하루. 찬장을 열어 인스턴트커피가 담겨있는 봉지 하나를 꺼내 내가 좋아하는 흰색 머그컵에 담아냈다.


아무런 무늬도 특별히 보이는 모양 없는 그저 둥글고 넓고 조금은 무거운 흰색의 머그컵.

유난히도 눈에 띄었던 컵이 오늘도 눈에 띄어 손에 잡혔다.


그 안으로 떨어지는 검기도 하고 갈색 같기도 한 가루들이 가벼이 떨어진다. 무거운 입자들은 아래로 가벼운 것은 위로 그리고 컵 주위로 퍼져 나간다.


어찌 되든 괜찮다. 그들도 자신의 무게로 자신의 크기로 나아가는 것이겠지.

이런저런 생각들이 머릿속에서 같이 퍼져나간다. 오랜만에 찾아온 여유로움의 반가움인지 그저 카페인이 들어올 기대감인지 알쏭달쏭하다.


나이를 많이 먹은 것도 적게 먹은 것도 아니지만 여전히 쓴 커피는 입에 잘 맞지 않는 내 입맛에 옆에 있던 설탕통을 집어 들었다.


흰색의 설탕보다 약간은 갈색이고 조금 더 고운 입자로 되어있는 설탕을 한 스푼 떠서 머그컵 안으로 밀어 넣는다.

작은 티스푼에 곱게 묻어난 가루들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다시 한 스푼 푹. 떠서 옮겨 담는다.  


옅은 베이지색의 설탕이 들어가자 더 어두워진 것 같은 머그컵 안에 커피들. 아직 물을 붓기도 전인데도 그 맛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일까. 자꾸만 혓바닥 양옆에서 저릿하게 침을 내뿜는다.


이제야 정수기로 컵을 밀어 넣어 뜨거운 물을 받는다.

가을이라고 하지만 아직은 햇빛이 뜨겁고 나뭇잎들도 초록이 가득한데 어째 가을이란 계절은 예전의 낙엽들과  같이 떨어져 버린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아직은 더운 날인데도 정수기에서 떨어지는 뜨거운 물은 겨울의 내 입김처럼 하얀 선들이 위로 뻗어나간다.

가늘고 여린 그 선들을 따라가면 같이 따라오는 커피의 향에 드디어 준비가 되었구나! 하며 머릿속이 살짝 정신이 돌아온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받아 톡, 톡 방울지는 커피들. 혹은 설탕의 방울들을 살살 저어 옆으로 밀어내 본다. 점점 가운데로 몰리는 작은 커피 거품들. 딱히 특별한 맛이 나지는 않겠지만, 딱히 특별한 식감을 가지지는 않겠지만 마지막으로 강하게 세 번 돌려 퍼지지 않게 모아둔 뒤 슬쩍 떠본다.


알고 있는 맛이고 알고 있는 식감이지만 부드럽게 퍼지는 연한 커피 맛에 톡톡 느껴질 듯 말 듯 간지리는 방울들의 감촉을 상상하며 식탁에 자리 잡는다.


그저 평범하고 아무것도 아닌 인스턴트커피이지만 

한 모금, 따뜻하게, 달콤하게, 씁쓸하게 넘어가는 커피.


그래, 그런 날도 있었고 이런 날도 있는 거지 모든 것이 전부 하나로 통합된 날이 있을까?

있기도 하겠지. 지겹게도 지내온 삶, 지루하게 반복되는 하루, 그 속에서 자신의 시간을 갖기 위한 열정적인 시간들이 이어진 그날들.


어떤 것 하나 보내기 아쉽고 내어주기 아까운 나날들. 그래 그런 날들.

오늘의 커피는 유독 달다가도 쓰게 넘어간다. 그래도 따뜻하기에 목뒤로 넘어가면 점점 가라앉는 마음에 살며시 토닥토닥, 내 하얀 머그컵도 톡.


우리의 하루에 모든 선들이 모이는 그런 날이 되어가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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