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 vs 나 Oct 25. 2024

나에게 말하고 내가 듣는다

상대의 악함은 잊지말고 내 억울함은 잊어버리자 - (생산적 복수)

나는 만화나 드라마를 즐겨보는데 그중 특히 복수극을 좋아한다.

대개 줄거리는 늘 같은 패턴으로 흘러간다. 

살인자(범인, 피해자)는 과거에 가해자로부터 억울한 일을 당하고 (때론 오해일 때도 있다)

과거에 당한 원통함에 마음속에 한이 서려있다.

이 한이 가해자에게 쏠린다. (저 놈 때문에! 저 사람만 아니었다면! 내 인생은.... )

‘나를 이렇게 만든 놈, 가해자 너도 똑같이 당해야 돼! 아니 나보다 더 고통스러워야해!’

이런 마음이 생겨난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에 벌을 줄 수 없겠지만, 신이 언제쯤 그 벌을 악인에게 내릴런지 알 수 없고 그 시간은 피해자에게 너무 길기만 하다.

그래서 그 억울함에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가운데

그 마음을 알아채고 위로라도 하듯이 방법이 있다며 복수를 부추기며 나타나는 조력자(?)가 있다.

“네 복수를 내가 도와줄게! 완벽하게!”

나는 복수극을 볼 때마다 ‘마음의 한은 이렇게 복수를 하는데 쏟게 되는건가’라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결국은 어떠한가? 복수를 해서 행복한 사람은 없지 않을까.

현실에서는 단언 할 수 없지만 영상속의 결말은 그 누구도 행복하지 않다.

그렇다고 다 잊고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나는 나의 삶을 살거야!' 

그것도 쉽지는 않다.

가해자로 인해 내 삶이 깨지고 망가지고 상처났는데 분노는 당연하다.

그러나 울분이 깊어 한스러움을 가지면 오히려 또다른 악인이 손짓하는 유혹에 빠지기도 한다.

복수를 부추기는 조력자에게 넘어가 더 큰 파멸에 이르고 마는 피해자처럼.

나는 이제 이 분노를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하는 중이다.


대기업 건물앞에 날마다 홀로 시위를 하는 사람을 보며 함께 있던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떤 억울한 일이 있었을까? 누구에게 피해를 당했을까? 나는 모르지만 가해자는 알겠지“

“저희 대학교 앞에 저렇게 혼자 시위하시는 분이 계세요“

늘 같은 사람이 분노를 안고 000교수의 비리를 지탄하면서 교수직에서 물러나게 되기를 바라며 수 년째, 십년이 넘게 매일같이 시위를 하러 와서 그 학교의 명물처럼 되었다고,

그런데 그 교수는 어느새 정년 퇴임을 하고 그 학교에는 이제 나오지도 않고 없다고 한다.

10년이 넘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 사람은 분노가 사라지지 않았고 원통함에 자기 삶을 살지도 못했던 걸까? 학교앞에서 매일 시위를 하는 시간들이 자신의 삶이 되어 버린 것일까?

정작 악인은 자신이 할 일을, 자기 삶을 살며 정년 퇴임까지 했는데, 상처에 휩싸인 사람은 

그 사그러들지 않은 한을 품은 채 가해자가 없는 그곳에 날이면 날마다 서있다.


인간은 때로 자신이 억울한 상황에 놓이게 된 것에 대한 분노로, 그 원통함에 갇혀 시간을

보낼 때가 있다.

이미 벌어진 일에 대한 노여움일 때도 있고 현재의 상황일 때도 있다.

상처로 인한 복수심이 정의감으로 승화되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전화위복이 되는 해결책이 될 때도 있지만 때론 그 분함을 풀려는 행동이 자기 삶을 제대로 살지 못하고 일상의 삶마저 분노속에 빠지게 되는 경우도 있다.

자신은 삶이 없어지며 그 속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 자체도 인식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기도 한다.     

나는 분노로, 억울함으로, 슬픔으로, 아픔으로, 미련으로, 아쉬움으로 내 삶을 흩어버리고

싶지는 않다.

타인에게 보이고자 갚아주고자 이기고자 하는 삶, 그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기 싫다.

그런 것을 내 인생의 의미로 만들지 않겠다.

“복수할거야! 또 다시 당하지 않기 위해 나는 더 이상 누구도 믿지 않을거야” -그러한 감정에

빠지지 말자.

 속고 당하는 과거를 지나왔지만 이제 나 자신을 좀 더 믿고 나를 신뢰하고 나아가보자.

모든 사람은 실수투성이고 다 자기를 우선한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그리고 나도 나를 우선하자!

똑같은 아픈 일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 기억은 필요하다.

이것은 추억이 아니고 기억이니까.

원통함은 때로 동기부여를 해주기도 하고 열정을 불어넣어 주기도 한다.

딱 거기까지만 분노를 이용하고 싶다.

상대의 악함은 잊지말고 내 생활을 살기 위한, 내 삶에 더하기가 되기 위한 분함만 느끼고

나의 억울함은 잊어버리고 나로써 살고 싶다.

그럼 당하는 일은 크게 없을 것이다. 당했어도 일어설 힘이 있을 것이다.

나는 나의 인생을, 나로써 만족하는 생을, 내가 기쁘고 행복하고 뿌듯한 삶을 살아갈 것이다.     

작가의 이전글 나에게 말하고 내가 듣는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