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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병상일기

엑셀 glxi 경기 나 9231

병상일기 #011

by 자크


내비 따라가겠습니다~.


우연히 집어 탄 택시에서 그 옛날 아빠 차의 냄새가 난다. 차량 방향제의 인공적인 달콤함을 억지로 껴안은 퀴퀴하고 눅눅한 연초 냄새. 그리고 오랜 시간 배어든 운전자의 체취다. 뒷자리에 녹아내린 듯 누워 한숨을 푹 내쉰다. 내비를 따라 가든 이대로 천국을 향해 가든 아무래도 좋을 만큼 지쳐버린 퇴근길이지만, 이따금 삶은 아주 잊고 살았던 기억 앞에 예고도 없이 나를 휙 던져 놓는다.


엑셀 glxi 경기 나 9231


차 이름이 엑셀이야? glxi는 뭐야?

gti보다 비싸고 좋은 차란 뜻이야.

아? 그럼 gti는 뭔데?

..... glxi보다는 안 좋다는 뜻이지.


엑셀은 우리 가족의 첫 차였다. 당시엔 제법 여유가 있었던지 외할머니는 아빠에게 엑셀을, 큰삼촌에게 르망을 선물했다. 그즈음부터, 아니 어쩌면 그전부터 우리 집과 큰삼촌 일가 사이에는 꽤 보편적이고 미묘한 경쟁심리 같은 게 있었던 거라고, 나는 기억한다. 경희대를 졸업한 아빠는 산본에, 인하대를 졸업한 큰삼촌은 평촌에 집을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에 태어난 아들과 아들. 마침내 이번에는 엑셀과 르망이 그들 앞에 나란히 놓인 것이었다. 즉 두 집은 한 치 간격으로 앞서고 또 뒤처지며 그야말로 평범한 90년대 중산층의 삶을 성실히 살아내는 중이었고, 그런 평온한 삶의 서사가 중단될 타당한 이유 같은 건 없어 보였다.




두말할 것 없이 내게 있어 엑셀이야말로 가장 '폼 나는' 차였다. 아빠가 그렇게 말했으니 틀림없었다. 내비게이션 같은 건 없던 시절이지만 알 수 있었다. 아빠가 이끄는 대로만 따르면, 이 뒷자리에 잠자코 앉아 있으면 목적지에 확실히 도착할 수 있음을. 아빠는 전국 팔도 길이란 길은 모조리 그려 넣은 '전국 5만 지도'였고, 아빠의 목소리는 길 안내라기보다는 삶의 이정표처럼 느껴졌다. 좌회전. 우회전. 기분 좋은 과속방지턱의 출렁-을 느끼며 얕은 잠에 들곤 했다. 눈을 뜨면 빗방울에 번진 낯선 풍경을 멍하니 구경하며 까딱까딱 손가락으로 전봇대를 넘었다. 그리고 아무런 근심도 없이 흘러나오는 숱한 유행가들을 목이 쉬어라 따라 불렀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행복하다, 소설 개미를 읽을 수 있어서!' 따위의 라디오 광고를 따라 하면 엄마와 아빠가 뒤집어졌다.


사랑합니다 고객님. 중산층 패키지시네요. 안정적인 수입과 평탄한 생활이 보장됩니다. 최고는 아니지만 남 부러울 것 없는 인생 패키지이죠!


아무도 그렇게 말해 준 적 없지만 마치 그런 패키지를 구매한 것 같은, 생활이 언제까지고 이어질 거라 생각했다. 엑셀처럼, 또 르망처럼. 그럭저럭 팔자 좋은 경쟁을 하며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될 것 같았다.





예기치 않은 어떤 날을 기점으로 두 가정의 경쟁 서사는 꽤 허무하게 끝났다. 아빠가 구매한 패키지의 유효기간이 생각보다 짧았기 때문이다. 아빠가 돌아가시자마자 삶은 우리 가족의 모든 것들을, 마치 원래부터 렌트용품였던 것 마냥 차례로 회수해 갔다. 엑셀부터 시작해서 집, 세간, 저녁 식탁 앞에서의 왁자지껄한 수다까지. 아무리 생각해도 거짓말 같은 일이었다. 그러니까 어제까지의 기억은, 전부 무엇이었으며 앞으로의 삶은 대체 어디로, 어떻게 가는 것인지 누구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무리 패키지 상품였다지만 이토록 엉망인 사후 서비스라니.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아주 유명한 누군가 말하는 것을 들었다. 삶은 원래 그런 거라고. 근데 그게 누구였더라.


경로를 이탈하였습니다. 다른 길로 안내합니다.


아. 물론 알고 있다. 경로대로만 가는 삶은 없다는 것을. 아빠였다면 어땠을까. 별수 없나, 하며 핸들을 크게 돌렸겠지. 하지만 그날의 아빠보다 더 많은 나이를 먹었음에도 여전히 운전할 수 없는 나를 보면, 아빠는 뭐라고 할까. 나는 여전히 뒷좌석이다. 면허도 없고. 내비게이션 따위. 도무지 신용할 수 없어.


누군가의 엑셀이, 안내자가 될 차례인데. 어쩌면 내가 운전하는 날은 끝내 오지 않을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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