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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병상일기

그때 그 사람

병상일기 #016

by 자크


- 넌 책 읽는 거 좋아하잖아. 국문과 가면 되지 않아?


친구는 그런 말을 하곤 했는데, 나로선 대체 뭐야 이 수준 높은 폭력은- 하는 심정이었다. 책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 이 내가 합격할 정도라면 어차피 국문과의 미래는 한 줌 빛도 없는 재앙일 게 분명한데. 애당초 대학에 갈 마음도 없었다. 40명 정원에 내 성적은 뒤에서 열 번째 정도였던 데다가, 고3이 되도록 알고 싶은 것은 물론 하고 싶은 일도 떠오르지 않았다. 역시 잘못 살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도, 별수 없는 일이었다. 적어도 내가 속한 무리 안에서 그런 처지는 보통이었다. 속 편한 놈. 어쨌거나 친구의 집은 제법 사는지라 그런 천진한, 얄밉도록 둔감한 소릴 얼마든 지껄여도 그 미래가 최소 국문과보다는 밝은 편이었다.


국문과라. 내가 아는 유일한 국문과 출신은 담임뿐이었다. 본인이 쓴 책을 수업 교재로 강매하고, 학부모들에게는 은근히 촌지를 요구하면서 돈을 내놓지 않으면 보란 듯이 그 자식을 두들겨 패는 탐욕스러운 돼지새끼.


- 고등교육을 받아 봐야 저런 인간이 되는 거라고.

- 병신, 조용히 해. 들려!


우산을 골프채 삼아 스윙 연습을 하고 있는 담임을 노려 보며 나는 중얼거렸다. 그건 생애 처음으로 마주한 가장 닮고 싶지 않은 어른의 스탠더드였다. 입체감 따위 없는 완전 평면의 악. 학교를 벗어난 그가 누군가의 남편이고 아버지일 생각을 하면 토악질이 나왔다.




위이이이잉

더 이상 깎을 데도 없는 구레나룻을 밀고 지나가는 바리깡.


- 머리카락이 내 손가락에 잡히면 죽는다고 했지? 공부를 하겠다는 새끼들이 말이야.


귓전을 하염없이 스치는 바리깡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담임의 표적은 크게 두 부류. 1) 실적에 도움 안 되는, 즉 공부 못하는 놈들 2) 촌지를 바치지 않는 놈들. 나는 둘 다 해당되니까, 그래서 빠따가 늘 두 배로 세지는 건가?


멍한 표정을 하고 있어서, 급식비를 늦게 내서, 말대꾸를 해서 내 엉덩이엔 날마다 불이 났다. 피떡이 된 엉덩이에 눌어붙은 교복 바지를 떼어 내는 게 하루 일과였고, 탱탱 부어 오른 볼따귀를 감추느라 저녁도 거르고 이불을 뒤집어쓰는 일 역시 예사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인간은 폭력에마저 적응하는 동물이고, 지금까지는 뭐 평온한 삶이었다고. 그럭저럭 어제 같고 오늘 같은 생이지.


하지만 수시 지원 상담을 하던 날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지원 생각이 없다고 말했더니 눈 앞으로 날아오는 슬리퍼. 너는 편모 가정이면서 이래저래 돈도 잘 안 내고, 그런 주제에 나이키 운동화를 신고 다니는 게 참 꼴 같잖다고 담임은 말해 주었다. 공부도 못하는 게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도 없으며, 당최 예쁜 구석이라고는 없으니 더 맞을 수밖에 없다나. 친절하게도 내가 더 세게 맞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그는 구구절절 일러 주었다. 아, 스승의 은혜. 낚싯대를 들고도 멍청하게 서 있는 나를 물속으로 걷어 차 주시기까지. 나는 흠뻑 젖은 채 교무실을 기어 나왔다. 이상하게 그날은 눈물이 났다. 귀싸대기 서너 대 정도야 아무것도 아닌데.


- 오오 그래그래. 어머님은 잘 계시지? 자! 어느 대학으로 모실까요-?


내 다음 차례인 반장을 맞으며 배부른 돼지처럼 웃는 담임이었다. 조심스레 교실 문을 열었을 때, 만화책을 보던 예체능 반 녀석들이 서로를 툭툭 치며 낄낄거렸다. 몇몇은 채점을 하며 고개를 떨구었고, 또 몇몇은 음악을 들으며 까딱까딱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냥 어제 같고 오늘 같은, 야자 시간이었다.


그게 무슨 기분이었더라. 어둠 속 환한 빛처럼 세계가 또렷해진 느낌. 내겐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나이키 운동화가, 이만 원짜리 시장표 신발만 신는 게 딱하다며 할머니가 백화점까지 끌고 가 사 준 올빽 포스가 누군가에게는 그토록 꼴 같잖고 혐오스러울 수 있구나. 담임은 그게 그렇게 참을 수 없이 미웠을까. 친절한 세상. 어둡지만 또렷한 세상.


나는 정말로 대학이란 곳에 가 보고 싶어졌다.










* 감사합니다 선생님. 스승도, 가르침도 다양한 형태로 존재한다는 걸 확실히 배웠어요. 가끔은 분노가 인간을 움직인다는 것도. 내 합격 발표를 듣고 지금까지 미안했다고, 너를 오해했다고 말하던 당신이 실은 하나도 밉지 않았습니다. 국문과가 아니라 영문과에 가게 돼서 다행이란 생각만 했어요. 혹시 살아 계신가요? 그렇기를 바랍니다. 살아만, 계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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