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 하루가 시작되고 있다.
어제 밤 두통이 오고 힘들었지만
나에게는 진통제가 있고
말을 들어줄 아들 녀석이 있어서 버텼다.
함께 집 앞 식당에서 마지막으로 갈비탕과 비빔냉면을 나눠먹고
남편이 사용하던 화장실 청소 수준을 놓고 티격대격하고
(그래도 이 순간이 좋다. 말을 하니 속이 뻥 뚫리는 듯하다.)
다음 일은 내일의 나로 미루고 잠이 들었다.
밤 12시 설마하던 무서운 일이 일어난다. 꼭 이런다.
종아리 부분 뼈의 쥐남 현상으로 공포의 시간을
10여분 보내고 나니 진이 빠졌다.
어찌저찌 다시 눈을 억지로 감았다 떴다를 반복했다가
그다지 심하지는 않은 설사 두 번을 하고
네시 반에는 아예 일어나버렸다.
억지로 더 누워있다 해도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마음을 바꾼다.
즐거운 조금 먼 골프장에 가는 날이나
아침 일찍 비행기를 타고 해외여향을 가는 날이라고 뇌를 속여본다.
세뇌작용이다.
그런 날만 이른 아침 네시반에 일어났지
다른 날은 그럴 필요가 없었으니
오늘이 그날이라고 되뇌여본다.
사실 이제는 그런 즐거운 날조차도 이른 기상을 하기에는 힘이 많이 부친다.
어제 저녁 이사가려는 조치원에는
올해 첫눈이 내렸다고 한다.
동생의 걱정이 가득이다.
걱정해봤자 어쩌겠나 고속도로는 얼어붙지 않기를 기도할 수 밖에.
우리나라 고속도로 제설 컨트롤 능력을 믿어보는 수밖에
이사가는 아파트가 오래된 곳이어서 현관문의 경첩이 약간 뻑뻑하다 한다.
첫날 동생은 안에 들어갔다가 문이 안 열려서 잠시 갇혔다고 하는데
오늘 이삿짐을 나르다가 사단이 날까봐 걱정이다.
어쩌겠나. 조심해달라고 신신당부를 할 수 밖에.
고장나면 또 돈들여서 고쳐야지 별수가 있겠나.
나름 이삿짐 옮기시는 분들도 전문가들이기 때문에
그들의 역량을 믿어볼 수 밖에.
8시까지 이삿짐 센터가 오고
8시반까지 고양이털 특수 청소팀이 오고
7시반까지 아들 녀석이 오기로 했다만
제일 걱정은 아들 녀석이다.
아들 녀석만 온다면 나는 버티는데 무리는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오늘이 D-Day 이고
나는 저녁 브런치를 쓸 수 있는 정신줄이 그때까지 남아있을지는 알 수 없다만
오늘도 똑같은 24시간이고
조금 먼 여행을 나서는 길목일뿐이고
내 옆에는 이제는 든든하기 짝이 없는 아들 녀석이 있고
쳐다보면 힘이 나고 마음이 안정되는 고양이 설이가 있다.
네시반부터 두 개의 화장실 세밀 청소를 완료했고
(전문가는 아닌 내 수준에서)
남편 방 정리를 시작했는데
사방에 떨어져있는 알약들이 누가봐도 아픈 사람이 사용한 방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다.
손가락의 감각이 떨어져서 알약 한 알이 떨어지는지도 체크가 안되는 상태이다.
침대 밑에는 더 다양한 것들이 떨어져있다.
그리고 이불에도 무언가 흔적들이 묻어있다.
이불을 버리고 가야하나 고민중인데
이것은 고민 축에도 들지 않는다.
오늘을 잘 보내고
주민센터에 해야할 신고등을 잘 마치고
내일 두시 강의에 아무일도 없다는 듯 나타나는 것이 일단 목표이다.
오랜만에 해외여행을 가기 위해서 두근두근하면서
인천공항에서 탑승에 성공하기만을 희망하는 그 심정과 같다.
먼 곳의 골프장에 잘 도착해서 첫 티샷에 무사히 공을 맞추기만을 바라는 그 심정과 같다.
해보자.
어제 사다놓은 달달구리 도너츠로
에너지를 투입해본다.
아마도 48시간 정도의 느낌이 드는 긴 하루 일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