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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생적 오지라퍼 Jun 27. 2024

늙지않은 혼밥요리사의 비밀 레시피 57

콩나물국밥의 힘으로 버티기

오늘은 아침부터 이상했다. 기상 시간이 평소보다 30여분이상 늦었다. 고양이도 나를 깨우지 않았다.

그래봤자 학교 출근 시간까지는 많이 남았지만 그래도 마음이 급해진 것일까?

세수하다가 손이 미끌하면서 도자기로 된 비누곽이 바닥에 산산조각 박살이 났다.

옆에 있었던 고양이가 놀라서 도망갈 정도였다.

아뿔싸, 오늘은 아들 녀석이 차를 가지고 운전해서 평창 출장을 가는 날인데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그릇을 깨는 일은 아침이건 저녁이건 기분이 나쁘기 마련인데

하루의 시작점인 아침에 이런 사고가 나고보니 침이 꼴깍 삼켜졌다.

도망간 고양이가 못들어오게 화장실 문을 닫고 유리조각을 조심스레 치우고

물 청소까지 하느라 아침부터 정신이 없었다.


오늘 급식으로는 빨갛게 양념된 오리고기가 나왔다.

고기라면 마냥 좋아라하는, 비건은 절대 될 수 없는, 내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게 오리고기이다.

기름기가 너무 많은 것 같은 느낌 때문이었다.

요새 특히 닭가슴살을 자주 먹어서 상대적으로 더 기름지게 느끼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함께 나온 열무김치와 올해 첫 번째 먹는 자두가 알맞게 익어서

아침 그릇 깨기로 가라앉았던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음식은 이렇게 기분을 변화시켜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나에게는...

아침에 조바심 났던 마음은 아들 녀석이 출장지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는

액땜이었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퇴근 후 을지로 4가역에서 전시중인 적외선 필터를 사용한 천체사진 전시를 잠깐 보고

(주로 도심의 은하수를 찍었는데 남산, 여의도, 해운대의 은하수가 각각 다 달랐다.)

나의 고양이가 기다리는 집으로 귀가했다.

그리고는 찬밥 조금에 데운 콩나물국으로 국밥을 만들어 신김치와 먹었고

(저녁은 거지처럼 먹는 것이 건강에 좋다는 옛말을 믿어본다.)

빨래를 돌리고 개키고 내일 다림질할 옷들을 꺼내놓고

별 기대를 하지 않고 나의 최애 방송인 최강야구 주말 직관 취소표 티켓팅에 들어갔다.

요 며칠 습관적으로 취팅에 참여하였는데

자리 포도알만 몇번 본 적이 있고 모조리 실패했었다.

방금 전 갑자기 별이 반짝 보이는 듯하더니 믿기지 않게 그 어려운 좌석을 선점하는데 성공했다.

내 똥손이 드디어 해냈구나 싶으니 울컥했다.

아들 녀석의 힘을 빌지 않고 처음으로 성공한 것이다.

그래, 아침의 유리 깨기는 액땜이 틀림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열치열 따뜻한 콩나물국밥이 힘을 줬던 것이 틀림없다.

왜 이리도 내 인생에는 행운이란 없는 것일까 우울했던 마음이

신나는 마음으로 바뀌는데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맛난 것을 먹고 힘을 내고 집안 정리를 하면서 힘을 내고 버티고 버티다가

그러다가 한 번의 행운이 찾아오면 힘을 부쩍 내는 그런 것이 인생일게다.

여기서 티켓 한 장을 더 잡아서 지인과 함께 직관을 가는 기쁨을 기대하는 것은 당치도 않는 것일까?

너무 오버하는 것일까? 조금은 더 행복하고 싶은 저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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