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를 다듬고 헤어 스타일에 변화를 주고 염색을 하고 이런 것들은 분명
그 사람의 분위기를 다르게 보이는 가장 큰 방법 중의 한가지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그렇다.
그래서 나는 오늘 제목은 패션 이야기이지만 헤어 스타일 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언제부터인지 옷 보다도 조금은 더 예민했던 나의 헤어 스타일 이야기이다.
어제 한달 하고 10여일만에 염색을 한 날이어서 생각이 이어졌던 듯 하다.(염색 주기가 점점 더 짧아진다.)
딸만 내리 있었던 우리 엄마는 그다지 튼실한 체력이 아니셨고
일하는 것을 즐겨하는 성향도 아니셨어서
가급적 꼭 해야 하는 일만 하시는 스타일이셨다.
딸일 경우 아들보다 힘든 것 중 한가지는 머리 빗겨주고 묶어주고 따아주는데
시간도 많이 걸리고 머리카락도 많이 떨어진다는 어려운 점이 있다.
물론 요새는 남자라고 머리를 기르지 않는다는 법이 없지만 말이다.
대학 시절 초등학교 저학년을 대상으로 하는 여름 방학 캠프 지도자를 했던 적이 있는데
몇 명 되지 않는 남자 대학생들은 모두 남학생 대상의 반을 맡고
그래도 남은 남학생반은 나머지 여자 대학생들의 열화와 같은 희망을 받곤 했는데 이유는 딱 두가지 였다.
머리 빗어서 묶어주기 힘들고(모양과 희망이 다 다르다.) 수영복 입혀주기 힘들어서였다.
심지어 나는 임신중에 아들을 간절히 바라기도 했다.
단순히 머리 빗기고 따아주고 머리핀 꼽아주고 그게 쉽지 않다는 이유만으로 말이다. 머리빗기다가 빗에 머리카락이 끼이기라도 하면 난리난다. 나는 선천적 똥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렸을때의 나는 짧은 커트머리(지금같은 커트가 아니고 쥐 파먹은 것 같은 상고머리)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몇 장 남지 않은 사진에서도 그렇고 내 기억으로도 그렇다.
중학생이 되어서는 두발 단정화 시대였으므로 선택은 귀 밑 3cm 단발 딱 한 가지였다.
내 얼굴이 어떻고 어울리고 안 어울리고를 떠나서 전교생이 모두 그랬으니
머리 모양에 대한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고 길이가 길었나 안 길었나에 대한 생각만 있었다.
아침 마다 등굣길에 30cm 쇠자를 드신 학생부장 선생님께서 머리 길이 검사를 했다,
그런데 머리 길이가 조금 더 길어진다해서 내 미모가 달라질거라는 생각은 그때는 할 수 없었다.(살이 왕창 빠진다면 몰라도 말이다. 그때는 왜 그리도 통통했는지 교복이 터질까봐 고민이었다.)
고등학생때는 머리를 길러서 묶거나 따야 하는 학교였다.
갑자기 길어진 머리가 거추장 스럽기 짝이 없었고
아침 바쁜 등교 시간에 머리를 따느라 시간이 많이 필요했고(혼자 따기가 어려워서 엄마를 힘들게 했다.)
기껏 곱게 딴 머리가 점심쯤 되면 한 올 두올 빠져나와서 산발이 되곤 했고(직모가 그렇더라)
만원 버스에 시달리고 흔들려서 집에 돌아오면 귀신 머리처럼 되기 일수였다.
그러다가 두발 자유화가 갑자기 선언되고 나는 며칠 되지 않아 기다렸다는듯 숏커트를 쳤다.
공부하는데 걸리적 거리는 머리를 정리한다는 심오한 뜻을 피력했었고
초등학교 때보다 미용 기술이 비약적인 발전을 했었는지
그나마 목선이 드러나서 얼굴이 조금은 작아보여서 나름 만족했었다.
본격적인 헤어스타일에 대한 고민은 대학 입학 후였다.
갑자기 옷도 자유, 머리 모양도 자유가 되니 생각이 많아졌고
가끔씩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러 갈때가 생기고
흔치않았지만 미팅도 있었고
주변 과 친구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면서 욕구도 생겨났으나(나는 여대출신이다)
적지않게 필요한 돈이 문제였다.
학교앞 유명 미용실은 매우 비싸다는게 문제였다.
파마도 해보고(물론 폭망해서 아줌마처럼 변했다.)
포니테일 스타일로 묶어도 보고(뒷 머리가 그렇게 생동감있게 되지 않더라. 그냥 추욱 늘어졌다.)
이런 저런 시도를 해보았으나 매번 만족스럽지는 못했고
“이쁜 머리란 없다. 이쁜 얼굴이 있을 뿐”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었다.
그리고는 근 30년 이상을 머리를 풍성하게 만들어서
얼굴을 조금이라도 작게보이자는 기본 생각에 충실하게 살았다.
머리에 볼륨감을 주는 다양한 방법을 모색했었다.
그러려면 파마는 필수, 그 힘들고 냄새나는 파마를 3개월 정도만에 하는 힘듬을 기꺼이 참았었다.
단골 헤어숍을 만들어서 중요한 일이 있을때는 수시로 도움을 받았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을지 모르지만 나는 만족했었다.
그 큰 틀이 깨지게 된 것은 2년전 쯤이었다.
파마하는게 너무 힘든 거다.
머리가 많이 아프고 냄새나고 엉덩이도 허리도 아픈 시간을 보내야 하고 너무 비싸졌다.
그리고 이사를 오고 단골 헤어샵이 멀어졌고
내 머리를 해주시던 단골 선생님은 아파서 일을 그만둔 것이 크게 작용했다.
또다른 누군가에게 나의 머리카락이 갖고 있는 본태성 어려움(숱은 적고 힘은 떨어지고 머리통은 크고 얼굴도 크다)을 설명하고 이해시키고 함께 묘안을 짜내야 되는 그 일을 해야하나 싶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새로운 복병이 등장했는데 바로 흰머리이다.
흰머리를 안보이게 하는데 최선을 다하자는 것으로 목표가 자연스럽게 바뀐 것이다.
학교에서 너무 늙은 할머니 선생님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염색에 몰두하다보니 염색하다 파마하다 이런 반복된 일들이 힘들어졌고 자연스럽게 염색만 하자가 되었다.
세상에, 파마기가 조금만 떨어져서 머리가 주저앉고
머리가 주저앉으면 얼굴이 더욱 커보이는 그 마법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아니다. 그 마법은 여전하나 나의 시력이 나빠져서 보이지 않게 되었을 수도 있다.
이제는 염색만 하러 나선다.(다행히 친한 친구가 함께 해주니 염색 겸 놀이 시간이 된다. 행복한 밥 한 끼도 같이 해주고 수다와 디저트도 덤이다.)
염색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머리 길이와 모양도 다듬어주신다.
길이는 점점 짧아지고 있는데 당연하다.
이제 머리 감는데도 팔이 아프기 시작하니 말이다.
은퇴 후 머지 않아 자연스럽게 염색 횟수도 줄고
자연스런 흰머리로 가는 과도기를 거치게 될 것이고
머리 길이는 점점 짧아지게 될 것이고
아마도 헤어숍은 특별한 일이 있는 1년에 몇 번만 다니게 될 것이지만
아직까지는 할머니 스타일은 아닌 스타일리쉬한 단발과 커트의 중간을 유지하고 있다.(마지막 자존심이다.)
머리도 패션이 분명한데(적어도 얼굴을 고치지 않은 나에게는 매우 중요했다.)
더이상 옷을 사지 않고 옷에 대한 관심이 줄어든 것처럼
헤어스타일도 자연스럽게 다른 분 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게 될 것이다.
2년 정도 후에는 말이다. 아직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