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어떻게 듣기 좋은 말만 듣고 살 수 있겠나
그것은 대통령이어도 슈퍼 레전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여도 불가능한일이다.
악플이나 악성댓글은 차치하고 말이다.
나도 남에게 듣기 좋은 말만 하고 살수는 없었으니 듣기 싫은 말을 듣는 것도 어찌보면 당연하다.
그런데 다른 사람은 별 나쁜 생각 없이 하는 말일수도 있는데
나에게는 가슴 아프고 듣기싫은 이야기가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먼저 부잣집 맏며느리라는 말이다. 잘 생겼다는 말이랑도 비슷하다.
어렸을때 나를 잘 모르는 어르신들이 나를 처음보고 대부분 하시는 말이었는데
얼마전 오랜만에 그 단어를 다시 들었더니 그때의 감정이 확 살아났다.
이쁘다, 귀엽다 이런 말은 살면서 평생 들어보지 못했다.
여자로 태어났는데 잘 생겼다, 이목구비가 또렷하다, 큼직큼직하게 생겼다, 이런 말만 듣고 자랐다.
심지어는 추운 겨울날 털모자를 눌러쓰고 버스를 탔더니 나를 남자로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
나도, 남자인줄 알고 이야기를 걸었던 그녀도 둘 다 엄청 당황했었다.
이런 말과 기억들이 평생 나를 얼굴 콤플렉스 덩어리로 살아가게 만들었고
첫사랑을 짝사랑으로 끝내게 만들었고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여성으로서의 나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이 커져갔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살던 시대(?)는 지금보다는 훨씬 더 고정된 성역할이 존재하던 시기였다.
지금에야 무슨 일에서건 남자, 여자를 구별하는 시대가 아니지만
이쁜 여자가 받는 많은 호감과 배려를 받아보지 못한 생각에서 출발한 묘한 열등감일 수도 있지만
지금도 나는 여성이라서 특별히 배려받고자 하는 상황도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지만
(물론 임신한 여성은 특별 배려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나를 젠더 이슈에 민감하게 만든 것은 부잣집 맏며느리라는 그 단어였다.
그래서 아마도 석사 논문을 과학수업과 젠더 이슈에 관련된 내용을 선택하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어려서부터 나를 본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이야기해주었지만
결코 부잣집 맏며느리가 될 수는 없었고 그냥 맏며느리만 된지 40여년째이다.
따라서 나는 여자 어린아이에게 절대 잘생겼다라고 이쁘다고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냥 인물가지고 뭐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어쩌면 나와 같은 트라우마를 만들어줄 수도 있다는 생각에서이다.
또 하나의 듣기 싫어하는 말은 일을 잘한다는 이야기이다.
일을 소리없이 잘한다는 말은 주로 동료들이 하는 이야기인데
그것은 칭찬인 것도 같지만 묘한 느낌의 말로 다가올때가 있다.
니가 일을 잘하고 일을 좋아하니 어려운 일을 니가 더하라는 의미인 경우가 종종 있었다.
두 번째 학교에서의 그 경험이 나를 참으로 힘들게 했었다.
교사들 모두가 기피하는 1년 행사 중 한 가지가 수업 공개이다.
과목마다 돌아가면서 교사 전체에게 수업 공개를 하는 것이고
학교별로 그 중에 한명쯤은 주변학교 선생님들과 장학사까지 불러모아 공개를 하는 연례행사가 있었다.
지금은 많이 축소되었지만 예전에는 학교별로 <흑백요리사> 컨셉으로
마치 수업 경연대회를 하듯이 준비가 많이 필요하고 극심한 스트레스를 주는 행사였다.
서로 안하려고 눈치주고 미루고 핑계를 대고 며칠을 신경싸움을 하는 그 상황을 참지 못하고
교감선생님이 나를 콕 찍어서 지구별 공개 수업을 준비하라셨다.
다른 선생님들도 너는 일을 잘하고 수업도 잘하니 나머지 준비는 본인들이 다 도와줄테니
니가 하라고 등을 떠미셨다.(그런데 내 수업 준비를 누가 어떻게 도와줄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거절을 잘 하지 못하는 나는 할 수 없이 그러겠다고 하고 최선을 다해서 준비를 했었다.
그때 아들 녀석은 막 돌을 지났었을 때였고, 아들을 봐주시는 이모님을 구하기 힘들어서
(지금도 나는 육아 문제가 가장 힘든 것이라 생각한다. 못지않게 간병 문제도 힘들다. 둘다 해본 경험치에 의하면 말이다.)
아침에는 친정집으로 아들 녀석을 나르고 퇴근후에는 다시 집으로 아들 녀석을 데려오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들 녀석은 아침과 저녁 찬바람을 맞아서 감기를 늘상 달고 살았었다.
퇴근길은 자주 병원행이 되었고 이렇게 많이 아픈 아이가 또 있나요? 라고 의사선생님께 진지하게 물어볼 정도였다.
최악의 상황에서 준비를 한다고는 했는데 내 생각대로 멋진 수업이 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고는 평가회에서 뭐라뭐라 안 좋은 이야기들을 쏟아내는 동료 교사들에게 나는 참 많이도 서운했었다.
지금 생각해도 화가 난다.
그때의 과학과 동료들은 나이지긋하고 여유있던 경력자들이었고 육아도 끝난 분들이셨는데(아마 그래서 더 수업공개를 하기 싫으셨을게다. 옛날 수업 방식으로 굳어진 모습을 보여주는게 꺼려지셨겠다는것을 지금은 알겠다만)
눈물도 찔끔 났었던 것 같다. 요새는 그럴리 없다. 아이가 어린 경우 출퇴근 시간도 배려를 해주는 시기이다.
그 일 이후 나는 누구에게인가 일을 떠밀어 안기는 일에도 절대 동참하지 않으려 애썼고
마음에 없으면서 일을 잘한다고 칭찬으로 포장한 입에 발린 말을 절대하지 않았다.
그리고 더더욱 내가 해야 할 일을 다른 사람에게 억지로 떠넘기지 않았다.
그후로 새 학교로 이동할 때마다 나는 자진해서 수업 공개를 하였다.
남에게 떠밀려서 할바에는 내가 손들어서 하겠다는 마인드였다.
그리고 수업 공개 준비를 하면서 나의 역량이 많이 업그레이드 됨을 알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지막 학교에서도 나는 작년과 올해 수업공개를 했다.
작년에는 생명과학 부분을 마치고 VR 과 AR 을 활용한 실습 활동으로
올해는 재해재난과 안전 부분을 마치고 토양오염 자료 분석 부분을 토론 활동으로 진행했다.
이제 더는 수업공개를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다.
이제 더는 부잣집 맏며느리감이라는 말이나 일잘한다는 말을 들을 기회도 없지 싶어서 옛일을 써보았다.
그런데 사람 일 모르는 거다.
듣기 싫어했던 그 말을 듣는 대화의 기회조차 몹시 그리워질지도 모른다.